[취재파일] 강남 산부인과 의사의 시신 유기..의사의 거짓말

박세용 기자 2012. 8. 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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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왜 '13가지 약물'을 뒤늦게 자백했는가..

결국 의사의 거짓말이 드러났습니다. 의사는 당초 경찰 조사에서 수면유도제인 미다졸람 5mg을 여성에게 투여했다가, 나중에 병실에 돌아와 보니 숨져 있었다고 진술했습니다. 사실과 달랐습니다. 미다졸람을 투여한 것은 맞지만, 그것만 놓은 게 아니었습니다. 의사가 투여한 약물은 무려 13가지. 다른 마취제가 포함돼 있었습니다. 국소마취제인 '나로핀'도 있고, 전신마취제인 '베카론'도 있었습니다. '리도카인'이라는 마취제도 놓았다, 의사는 뒤늦게 이렇게 자백했습니다.

피의자 진술이 바뀐 것은 그를 의심하게 합니다. 저의 속마음을 공개하면, 사실 여성의 사망은 '사고'일 것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의사가 미다졸람 5mg을 투여했다고 했고, 실제로 미다졸람을 맞고 환자가 숨지는 사고가 종종 있어왔으니까요. 이번에도 그런 사고일 수 있겠다, 추정했습니다. 그런데 13가지 약물을 섞어서 투여했다니, 그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의심입니다. 그의 완강한 결백 주장에 물음표를 던지는 이유는 또 있습니다.

후배 기자가 만난, 한 의사의 말입니다. 과거 마취과 의사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 때 주로 사용한 약물이 '미다졸람'과 '베카론'이다. 생을 편하게 마감하려고, 미다졸람으로 수면 상태에 빠져든 뒤, 베카론으로 자신의 숨을 멎게 한다는 것입니다. 베카론은 앞서 설명한 대로 전신마취제인데, 이걸 맞으면 호흡이 서서히 멈추게 됩니다. 반드시 호흡대체기가 있는 곳에서만 사용해야 하는데, 여성이 숨진 병실에는 이게 없었습니다. 여기다가 국소마취제 '나로핀'까지 짬뽕으로 투여했는데, 이건 또 심장이 멎을 수 있는 부작용이 있다고 하고. 또 '나로핀'을 의료계 상식을 벗어나 여성의 혈관에 직접 맞혔다고 하니...

이쯤 되면 일부러 죽인 것 아닐까? 세련되게 '사고'로 포장한 '살해' 아닐까? 의심은 더 짙어집니다. 45살 산부인과 전문의가 마취제의 이런 ABC를 모를 리가 없고, 사람을 숨지게 할 수 있는 이런 마취제를 투여한 사실을 경찰에 숨기다가 뒤늦게 자백했다는 것도 의혹을 키우고 있습니다. 약물 13가지를 섞어버린 그의 행동이 의료계의 상식을 얼마나 벗어났으면, 경찰이 방송사 카메라 앞에서 대놓고 "비상식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행위"라고 밝혔을까요. 의사는 혈관에 직접 놓으면 안 되는 '나로핀'의 경우, 링거줄을 통해 한 방울씩 투약하면 생명에 지장이 없을 거라고 판단했다, 이렇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13가지 약물' 얘기를 들은 의사들은, 하나같이 산부인과 의사가 술에 만취했었는지를 물었다고, 후배 기자는 전했습니다. 술에 너무 취한 나머지, 눈에 뵈는 약물을 두서없이 섞지 않고서는 나오기 힘든, 황당하고 위험한 약물 조합이라는 얘기입니다. 베카론 하나만 잘못 써도 사람이 죽을 수 있는데, 거기에 다른 마취제를 섞는 것, 의사가 제 정신이었냐는 것입니다. 또 많은 언론이, 의사가 미다졸람을 '최음제'로 사용했다고 보도했는데, 13가지 약물 가운데 '리도카인'이라는 것은 흥분을 누르는 약물, 즉 반-최음제라고 합니다. 최음제와 반-최음제의 조합. 혼돈 상태로 섞이는 약물들.

그 무질서한 약물의 혼합이 '술' 때문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의사는 당시 음주 상태였다고 하지만, 병원에 들어갈 때와 나갈 때 CCTV에 촬영된 모습을 보면 만취 상태로 보기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실제로 그는 여성의 사망을 확인하려고 병실 밖으로 나간 뒤 라이트펜을 갖고 다시 병실로 들어갔고, 시신 유기를 마음먹은 뒤 병원 경비원한테 자신의 차를 대기시켜 달라고 말했고, 여성의 시신을 옮겨 싣고 자신의 집까지 멀쩡하게 운전했습니다. 거기서 다시 부인과 함께 강남에 있는 산부인과로, 이어서 시신을 버린 한강공원으로 새벽 내내 계속 운전대를 잡고 다녔습니다. 또 무엇보다, 그가 13가지 약물의 이름을 또렷하게 기억하다가, 경찰에서 자백했다는 점입니다. 의사는 자신이 어떤 약물을 섞는지, 자기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자각하고 있었습니다. '만취'는 아니었다는 얘기입니다. 이렇게 제 정신을 가진 의사의 처방이라면, 약물의 혼합에 어떤 의도나 목적이 엿보여야 하는데, 그게 안 보이고 그냥 마구 섞은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 경찰을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

그가 대체 왜, 13가지의 약물을 섞었는지,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경찰도 의사에게 살해 의도가 티끌만큼이라도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의사를 집중 추궁했습니다. 죽이려고 했는가? 의사는 부인했고, 거짓말탐지기도 진실을 밝히지 못했습니다. 경찰은 살인의 '미필적 고의'도 추궁했습니다. 의사 당신이 그런 식으로 약물을 투여하면, 여자가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인지하고 있지 않았느냐, 이것입니다. 미필적 고의도 '고의'이고, 이는 살인의 고의성으로 이어집니다. 45살 산부인과 전문의이면,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아는 게 너무나 당연한데, 의사는 몰랐다고 주장하고, 역시 거짓말탐지기에서 걸리지 않습니다. 거짓말탐지기는 진실도 거짓도 아닌, '판단불능'이라는 쓸모없는 답을 내놓았습니다. 의사가 거짓말탐지기를 농락했거나, 의사가 진정 함량 미달이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그럼 의사가 여성을 살해하려고 할 만한 이유라도 있었던 걸까요. 채무 관계? 아직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경찰은 둘의 금융계좌를 뒤지고 있습니다. 치정? 의사의 아내는 둘의 관계를 전혀 몰랐다고, 경찰에서 진술했습니다. 여성을 두고 남편과 아내가 다투다 사단이 난 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의사는 또 여성과 내연관계도 아니었다고 진술합니다. 6차례에 걸쳐 성관계를 가졌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내연과 성관계의 경계는 애매합니다. 경찰은 '화간'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렇다'고 답합니다. 경찰은 주변을 탈탈 털어도 살해 동기가 없었다면서, 둘이 주고받은 문자메시지까지 복원해 공개했습니다. 사건 당일 의사는 "언제 우유주사(피의자는 '영양제'라고 진술) 맞을까요?"라고 문자를 보냈고, 여성은 "오늘요ㅋㅋ"라고 답문을 보냈습니다. 즉, 죽일 만한 이유가 없다는 게 경찰 발표입니다.

경찰은 결국 살인 혐의를 적용하지 못하고, 사건을 오늘 검찰로 넘깁니다.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가 추가됐습니다. 여성을 숨지게 하려는 고의성이 없었고, 의도치 않게 실수로 여성을 죽게 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13가지 약물을 섞은 것이 진정 실수일 뿐인지, 그걸 한꺼번에 투여하면 여성이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의사가 진정 몰랐는지, 경찰한테 묻고 싶습니다. 검찰 수사는 이 지점에서 시작될 것입니다. 경찰이 단순 '사고사'로 정리한 여성의 죽음은, 실상 억울한 타살일 가능성이 남아있습니다. 또 만에 하나, 여성에 대한 부검 결과 약물의 농도가 의사 진술보다 높게 나오거나, 엉뚱한 약물이 추가로 나올 수도 있습니다. 경찰이 발표한 '약물 13가지'는 전적으로 의사의 자백에만 의존한 것이기 때문입니다.박세용 기자 chatmzl@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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