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문>, 보고 싶지도 기억하고 싶지도 않다"

송지혜 기자 입력 2012. 7. 25. 00:04 수정 2012. 7. 25.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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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참사 재판이 재개됐다. 7월10일 오전 10시40분, 지 아무개씨(42)와 김 아무개씨(53)가 서울 서초구 중앙지법 505호 법정에 섰다. 2011년 2월 특수공무집행방해치사 등의 혐의로 1심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은 이후 1년5개월 만이다.

이날 재판은 새삼 관심을 끌었다. 다큐멘터리 영화 < 두 개의 문 > 이 개봉한 지 19일 만에 관객이 3만명을 넘어서는 등 용산참사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다시금 높아진 시점에서 재판이 재개됐기 때문이다. 재판에 앞서 용산참사 희생자 유가족 정영신씨는 "재판이 갑자기 재개돼 당혹스러웠다. 영화 < 두 개의 문 > 이 흥행하면서 사건에 가담했던 이들을 다시 범법자로 처벌하려는 것은 아닌지 의문스러웠다"라고 말했다.

부상을 이유로 항소심이 연기되었던 이들은 휠체어를 타거나 목발을 짚고, 다리에 깁스를 한 채 나타났다. 판사가 몸 상태를 묻자, 김씨가 힘겹게 답했다. "5분 이상 걷지 못한다. 통증이 심해 밤에 잠을 잘 수가 없다." 여러 차례 울먹이던 그는 "망루가 뭔지도 모르고 살아왔다. 피할 데가 없어 (옥상으로) 도망을 갔는데 경찰특공대들이 쫓아와 망루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라고 덧붙였다. 지씨도 그날 발목뼈가 으스러지는 사고를 당한 뒤 진통제로 근근이 통증을 이겨낸다고 답했다.

ⓒ뉴시스 2009년 1월20일 새벽 용산 남일당 건물 망루가 불타고 있다(위).

재판은 10여 분 만에 끝났다. 형사10부(재판장 조경란)는 이날 "김씨가 병원 진료를 받는 8월20일 이후 다시 재판 일정을 잡겠다"라고 말했다. 재판장의 짧은 한마디에 지켜보던 용산참사 진상규명 및 재개발제도개선위원회(용산진상규명위) 관계자들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김씨와 지씨가 제대로 앉아 있기도 힘든 상태에서 수감생활을 하기에 무리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재판이 끝나 휠체어를 타고 나오던 지씨는 "경찰만 봐도 심장이 벌렁벌렁한다. 무슨 말을 하려면 계속 눈물이 흐른다.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일들에 지친다"라며 푸념하듯 말했다. 앞서 같은 혐의로 기소된 이충연 용산철거민대책위원회 위원장 등은 2010년 11월 징역 4∼5년을 선고받았다.

" < 두 개의 문 > 보고 싶지도 않아"

사건이 발생하기 하루 전인 2009년 1월19일 새벽, 지씨와 김씨도 그곳에 있었다. 이들은 철거민 30여 명과 함께 서울 용산구 한강로2가 남일당 5층 건물 옥상에 망루를 쌓았다. 다음 날 오전 6시30분쯤 이를 진압하려던 경찰특공대원이 망루에 오르고, 고작 30여 분 만에 '원인을 알 수 없는' 불길이 치솟았다. 이 과정에서 농성자 5명과 경찰 1명은 주검이 되어 내려왔다. 망루에서 떨어진 지씨와 김씨를 비롯해 남아 있던 23명도 크게 다쳤다.

망루에 남아 있던 이들은 불길이 치솟자 건물 옥상으로 뛰어내렸다. 고 윤용헌씨에 이어 지씨가 떨어지고, 지씨의 배 위로 고 이성수씨가 떨어졌다. 그 바람에 지씨의 다리가 부러지기도 했다. 옥상에서 쓰러져 있던 그를 윤씨와 이씨가 함께 옥상 난간까지 부축해 데려갔다. 지씨의 기억은 또렷했다. 그러나 지씨가 치솟는 불길을 피해 옥상 난간에 매달리고 땅으로 떨어지는 사이, 윤용헌씨와 이성수씨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검찰은 윤씨와 이씨가 불에 타 숨진 채 망루에서 발견되었다고 발표했다. 지씨는 '(그들이) 죽었다면 골절상이어야 한다. 화상이라는 것은 믿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더욱이 희생자들이 옥상이 아닌 망루에서 발견되었다는 점 역시 의문으로 남았다. 하지만 그의 증언은 수사에 반영되지 못했다.

ⓒ시사IN 조남진 철거된 용산 3구역과 4구역의 현재 모습.

지씨는 원래 용산 사람이 아니다. 2007년까지만 해도 그는 서울 종로구 순화동에 위치한 장어가게 사장이었다. 11개 테이블이 놓인 작은 가게였지만 그럭저럭 먹고살 만했다고 한다. 그러나 2005년부터 재개발 움직임이 시작됐다. 장어를 팔던 손으로 '순화동 철거민대책위원회'라고 적힌 머리띠를 질끈 묶었다. 결국, 그의 가게는 2007년 9월 철거됐다. '철거민의 마음은 철거민이 안다.' 그가 용산 현장에 나타난 이유였다. 그러나 돕기 위해 달려간 곳에서 가해자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지씨는 이 사고로 몸을 크게 다쳤다. 1·2·3번 요추 손상으로 허리를 굽히기도 힘들다. 양쪽 발목뼈는 산산조각이 났다. 오른쪽 발목은 잦은 염증 발생으로 골수염까지 걸렸다. 허벅지살을 떼어 발목에 붙이기도 여러 번이었다. 10여 차례의 수술 끝에 지체장애 4급 판정을 받았다. 여전히 걷지도, 제대로 눕지도 못한다. 마음의 상처는 더 크다. 주변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그는 '나만 살았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나도 희생자'라는 생각에 심경이 복잡하다는 것이다.

영화 < 두 개의 문 > 을 보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지씨는 "보고 싶지도 기억하고 싶지도 않다. 그때 죽었어야 한다는 생각뿐이다"라고 말했다. 용산참사 희생자 유가족이자 용산진상규명위 활동가인 정영신씨는 "이들이 영상을 통해 '경찰특공대가 나를 죽이러 이렇게 들어왔구나'라고 확인하는 순간, 거대한 충격에 휩싸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생명의 위협을 느꼈던 기억 자체가 상처가 되리라는 판단에서다. 더욱이 사건 이후 '테러리스트'로 규정된 현실이 혼란스러울 거라고 했다.

용산진상규명위 측은 지씨와 김씨를 단순 부상자가 아닌 생존자라고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전쟁터'에서 살아남았지만 사회적·정신적 고립으로 인해 사회와 사람에 대한 원망이 더 커졌을 거라는 분석이다. 박래군 용산진상규명위 집행위원장은 "부러진 뼈를 치료하는 데 급급했지, 내면을 돌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외상후스트레스장애가 너무 심각하다"라고 말했다.

< 두 개의 문 > 김일란 감독은 영화 캐치프레이즈로 '당신이 배심원이라면?'이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재판이 놓친 사건의 맥락을 배심원(국민)이 재평가할 수 있다고 보았다. 정영신씨는 "이러한 '사회적 진상규명'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 두 개의 문 > 이 100만 관객을 돌파하더라도, 김씨와 지씨는 결코 < 두 개의 문 > 을 볼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송지혜 기자 / so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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