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군부독재 무너뜨린 그 정신이 잊혀져 아쉽다"

박민식기자 2012. 6. 9. 0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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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10 항쟁 25주년.. 이한열 피격 현장 지킨 정태원·김종원씨

피격 사진 찍은 정씨아직도 그 사진만 보면 가슴이 먹먹하고 눈물민주화에 청춘 바친 학생들 기리기 위해 국가가 기념관 세워야이한열 부축한 김씨새벽에 죽음 소식 듣고 금반지 등 전당포 맡긴후 유인물 제작 시민에 알려현재 영화 제작사 대표 6월 항쟁 영화 만들겠다

1987년 6월 9일 오후 5시 '6ㆍ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가 열린 서울 신촌동 연세대 정문. 허공을 가르던 최루탄이 스타카토처럼 짧은 파열음을 내며 연달아 터지자 사방이 뿌옇게 변했다. 잠시 뒤 또 한 번의 파열음이 울렸고, 교내로 달리던 이한열(당시 21세ㆍ연세대 경영학2)씨가 픽 쓰러졌다. 최루탄에 직격으로 맞은 뒤통수에서 피가 줄줄 흘렀다. 주변 학생들이 이씨를 안고 치과대학(현 100주년기념관 자리)까지 왔을 때쯤 정문 오른쪽을 지키던 이씨의 학과 1년 선배 김종원(46ㆍ영화제작사 북극성 대표)씨도 급히 달려와 '제발 큰 일은 생기지 마라'는 듯 간절한 몸짓으로 후배를 안았다. 근접촬영을 하려고 학생들과 함께 있었던 로이터통신 사진기자 정태원(73)씨는 이 장면을 놓치지 않았다. 최루가스와 땀으로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는 김씨가 피를 흘리며 고개를 떨어뜨린 이한열씨를 안아 옮기는 강렬한 이미지의 사진 한 장은 6월 항쟁의 역사성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2012년 6월 4일 서울 신촌동 연세대 교내 '이한열 추모비' 앞. 흰 머리가 수북한 정씨와 배가 불룩하게 나온 중년의 김씨가 25년 만에 처음으로 만났다. 정씨는 김씨를 보자마자 "사진 찍혔을 때 보다 살 많이 쪘네"라며 단박에 알아봤다. "저를 어떻게 알아보세요?"라며 놀라워하는 김씨에게, 정씨는 가볍게 웃었다. 말은 않았지만 '역사에 담긴 얼굴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라고 답하는 듯 했다. 정씨는 "사진 속 사람들은 다 알아봐. 살은 좀 쪘어도 얼굴 윤곽은 그대로 있네"라며 김씨와 반갑게 악수했다.

6월 민주항쟁 25년이 된 지금도 민주주의 신새벽을 열었던 그날의 비극적 장면은 두 사람의 뇌리에 여전히 생생했다. 정씨나 김씨나 "아직도 그 사진만 보면 가슴이 먹먹해진다"며 "국민의 힘으로 군부독재를 무너뜨린 6월 항쟁의 정신이 점점 잊혀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했다. 그날 대부분의 사진기자들이 학생과 경찰의 충돌과정을 찍기 위해 연세대 정문 맞은 편 철길 주변에서 취재하고 있었지만 정씨는 카메라를 들고 학생들 안에 자리를 잡았다. 이 바람에 정씨는 역사의 한 장면을 제대로 포착할 수 있었다.

김씨는 "의식을 잃고 병원으로 옮겨지는 한열이를 급히 안았지만 당시 얼마나 중한 상태였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고 말했다. 이한열씨는 그로부터 한 달여를 의식불명 상태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사투를 벌였다.

87년 7월 5일 일요일 오전. 6ㆍ29 선언 후 봉쇄가 풀려 자유롭게 드나들었던 연세대 정문이 갑자기 잠기고 경찰의 삼엄한 경계가 펼쳐졌다.

"6ㆍ29선언 후 일주일도 안 된 시점이라 '쇼크'였죠. 순간 '혹시 한열이가'라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어요." 이한열씨는 이날 새벽 2시쯤 신촌세브란스병원 중환자실에서 꽃 같은 생을 마감하고 민주주의 제단에 바쳐졌다.

김씨는 입으로 전해진 이한열씨 사망사실을 하루빨리 학교 안팎에 알리고 싶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당장 쥐고 있는 현금도 없고 휴일이라 은행도 쉬었다. 그 때 그는 2년 전 아버지로부터 입학선물로 받았던 금반지와 고급 캐논 카메라가 떠올랐다.

"반지와 카메라를 들고 신촌 주변을 헤매다 신촌시장 전당포를 보고 무작정 문을 두들겼죠. '한열이가 세상을 떠난 사실을 알리려 하는데 돈이 없다'고 하자 전당포 주인도 '무슨 말인지 알겠다'며 생각 이상으로 값을 많이 쳐줘서 30만~40만원 정도를 받았죠. 그 돈으로 산 천, 페인트, 복사용지로 유인물과 플래카드를 만들어 학생과 시민들에게 알렸어요."

그 해 6월의 경험은 지금도 김씨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 김씨는 졸업 후 월간 <말>지 기자로 활동했고 97년 영화계에 입문해 임권택 감독의 '천년학' 등을 제작했다. 그는 "어디에서든 하고 싶은 일을 하면 사회발전에 기여한다는 6월 항쟁 정신에 따라 진로를 바꿨다"고 했다. 김씨는 지금 6월 항쟁 영화를 구상하고 있다. 그는 "영화로 여러 번 다뤄진 5ㆍ18 민주화운동은 엄청난 교훈을 줬으나 비극이었던 반면 6월 항쟁은 국민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줬기에 희망의 영화가 될 것"이라며 "시나리오도 구상 중이고, 통사로 할지,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할지, 아니면 인물에 포커스를 둘지 등을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씨는 이러한 김씨의 생각에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필요하면 연락을 달라"고 말했다. 정씨는 28년간 취재현장을 누비다 95년 현역에서 은퇴했다. 그는 "대장수술 등으로 몸이 불편했다"며 "수 년간 집회에서 독한 최루 가스에 노출돼 더운 곳에서 땀을 흘리면 온 몸이 解緞?달아오르는 후유증이 아직도 남아있다"고 말했다.

이 두 사람에게 6월 항쟁은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 것일까. 김씨는 "총칼 밑에서 지내는 게 얼마나 불편하고 자신의 삶을 파괴하는지 몰랐던 국민들이 6월 항쟁으로 세상이 바뀌니까 '계란으로 바위를 쳐도 깰 수 있구나', '낙숫물이 바위를 뚫는구나'라는 걸 실감했다"며 "국민이 자신감을 회복한 계기가 됐다"고 평가했다.

정씨는 "오늘날 민주화와 경제발전으로 편하게 사는 만큼 당시 학생과 시민들이 피땀 흘린 것"이라며 "민주화에 청춘을 바친 학생 등을 기리기 위해 국가차원의 기념관을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박민식기자 bemyself@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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