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그리고 희망 - 2011 대한민국 리포트>'주먹' 날렸던 섬 소년.. "이젠 '樂童'들 키워요"

신세미기자 입력 2011. 7. 13. 11:51 수정 2011. 7. 13.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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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인 봉사단체 'TOP' 단장 권투선수 출신 테너 조용갑씨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이달 초 베세토오페라단이 공연한 푸치니 오페라 '토스카'의 남자주인공으로 국내 무대에 데뷔한 테너 조용갑(41)씨는 인생역전의 주인공이다. 수년간 유럽 무대에서 오페라 '오셀로'의 주역 등 강한 배역을 주로 맡았던 그의 삶은 참으로 드라마틱하다. '섬마을의 악동(樂童)시기'를 거쳐 청년기엔 링 위의 헝그리복서였다. 인생 중반기에 들어 이탈리아 로마를 중심으로 오페라가수로 활동하면서, 어려운 후배 음악인들을 지원하며 나눔의 삶을 실천하고 있다.

'토스카'에서 화가인 카바라도시 역을 맡아 '오묘한 조화' 등을 열창해 박수갈채를 받았던 조씨는 "로마에 살면서도 늘 한국 무대를 그리워했다"며 14년 만에 이뤄진 한국 데뷔무대의 벅찬 감동을 떠올렸다. 국내선 음대라곤 근처에도 못 가본 처지지만 이탈리아 로마에서 어렵게 얻은 성악공부의 기회를 잘 살려 결국 오페라가수의 꿈을 이룬 그다. 그는 '토스카' 무대를 통해 처음 만난 한국 관객들이 이탈리아 관객에 비해 박수도 많이 치고 반응이 뜨거워서 무척 놀랐다"고 웃었다.

"한동안 뭘 해도 되는 일이 없는 우울한 인생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닥치는 대로 온갖 일을 다하면서도 기타 치고 노래 부르거나, 교회 성가대에 서면 행복했어요. 음악은 어렵고 힘들던 시절, 나를 위로해주던 한결같은 친구였어요. 그리고 보면 지금껏 노래와 관련된 일은 다 잘 됐어요."

고향 가거도에서 서울로, 다시 로마로 아무런 연고 없이 무작정 감행한 타지, 이국으로의 길고 험한 여정. 그는 "묘하게도 음악과 관련해선 일들이 술술 풀렸다"고 회고했다. 성실하고 승부근성 강하던 그에게 한 목사가 성악공부를 위한 유학자금을 지원했다. 이탈리아에서 성악도들이 꿈꾸는 산타체칠리아음악원에 합격했다. 국내서 성악공부를 받은 적이 없고 악보조차 볼 줄 몰랐던 그는 독학기를 거쳐 음대서 정식으로 성악을 전공한 사람들과 겨뤄 당당하게 오페라가수가 됐다.

"고향에서 사고뭉치였던 제가 서울서 개과천선했다는 소식은 한동안 고향에서도 얘깃거리가 됐답니다. '문제아 용갑이가 서울의 교회에서 새사람이 됐다'며 아들딸을 교회로 인도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어요(웃음)."

어린 나이에 힘든 세월을 감당하기 힘들어 가난한 환경을 탓하며 분노하고 반항하던 그는 그러나 일에 관한 한 성실하고 책임감 강한 청년이었다. 중국집 철가방 배달이든 지하철 액세서리 판매든 그는 자신의 일을 즐겼고, 고객을 성심성의껏 대했다. 호떡집 장사 때는 재료를 넉넉히 써 크게 만들어 판 탓에 재료비 비중이 높아 그다지 이윤이 남지 않았다고 한다. 각종 일감이 빡빡하게 이어지는 와중에도 교회 개보수 공사 때면 '용갑학생'은 누구보다 먼저 달려와 한 삽이라도 더 뜨며 봉사활동에 열성을 쏟았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가슴에 지녔던 인생에 대한 뜨거운 열정은 이즈음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나누고 베풀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장래 문제로 방황하며 고민하던 어느 날 교회 목사님이 제 목소리가 조영남씨와 비슷하다며 성악 공부를 해보지 않겠느냐고 권하셨어요. 결국 목사님의 후원으로 로마행 비행기를 탔어요. 성악의 기본도 안된 상태에서 무리하게 하루 8시간 이상 노래하느라 목 결절로 하마터면 성악을 포기할 뻔했어요."

유학 직후 발생한 국제통화기금(IMF) 경제위기 속에서 무사히 성악공부를 마치고 유럽에서 성악가로 뜻을 펼치는 가운데서도 나눔의 정신을 잊지 않았다. 연중 50여회 오페라무대에 선 그는 최근 이탈리아서 활동 중인 한국인 성악가들과 'TOP(Truth of Players)'이란 음악인봉사단체를 결성했다. 그는 TOP단장으로서 틈틈이 국내 군부대, 교도소, 교회에서 순회공연을 펼치는 한편, TOP아카데미를 통해 로마에서 재능있는 후배성악가들의 현지 교육 등을 지원해오고 있다.

"이국에서 성악가로 활동하기까지 제 경험을 되살려 유능한 후배들이 꿈을 펼 수 있도록 유럽활동을 적극적으로 도울 계획입니다. 콩쿠르에 나가려 해도 돈이 많이 들고 경제적 어려움뿐 아니라 현지 네트워크가 없어 마음고생도 심하거든요."

그는 자신이 한국에서 교회를 비롯해 여러 후원자들의 지원에 힘입어 성악가의 꿈을 이뤘듯 자신도 재능있는 후배들을 위해 로마의 집을 숙소로 제공하고, 다른 성악가들과 함께 성악교육을 위한 성악아카데미를 지속적으로 운영할 계획이다.

"국내 데뷔 무대도 나눔활동을 계기로 정말 우연한 기회에 이뤄졌어요. 지난 3월 로마의 한인교회를 위한 기금모금차 서울에 왔던 길에 마침 베세토오페라단이 실시한 '토스타' 공개오디션에 참가해 주역으로 발탁됐지요."

'권투선수 출신의 성악가'로 알려진 그는 "지금도 권투동작을 하며 몸을 움직이다 보면 목이 한결 잘 풀린다"며 양팔을 앞으로 크게 내젓는 동작을 취했다. 권투는 가난한 생활을 버텨내기 위한 궁여지책이었다. 22세 때 돈벌이를 위해 프로 무대에 뛰어들어 복서생활을 6년여 경험했다. 자신에 이어 서울에 올라온 남동생(조용인)도 프로복서로 활동했다. 동생은 동양챔피언 3차 방어전을 치르는 등 형제 복서로 한동안 세인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그는 고향에서 자연을 벗 삼아 뛰놀던 어린 시절이며, 청년기의 온갖 장사 등 세상살이 경험은 오페라가수로서 무대 활동에 서는 데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됐다고 소개했다. 복서로서 링 위에 올랐고 장사하며 숱한 사람을 접했던 어려운 시절 경험이 오페라무대에선 긴장감을 덜어주는 것 같다는 설명이다. 그는 무대울렁증과는 거리가 멀고 무대 출연에 앞서 오히려 긴장을 위해 진한 에스프레소를 마신다고 말했다.

쉼 없이 무한도전의 삶을 일궈온 그는 3년 전 로마에 한국여행객 대상의 민박집을 차렸다. 로마 테르미니 부근에 있는 그의 '파파로티민박'은 가끔 투숙객들을 위해 노래솜씨를 발휘하는 주인의 유명세를 타고 로마여행객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유학시절 아르바이트로 관광가이드할 때 여행객이 딸을 소개해 부부의 연을 맺었지요. 일이든 인간관계이든 언제나 즐겁고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고자 합니다." 테너 조용갑씨의 드라마틱한 인생은 바야흐로 국내 오페라무대에서 오묘한 광채를 발산하기 시작했다.

신세미기자 ssemi@munhwa.com

<사랑 그리고 희망 - 2011 대한민국 리포트>조용갑은… 伊유학뒤 유럽 오페라만 30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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