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클립] Special Knowledge [232] 서해 5도

정기환 2010. 12. 24. 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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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정기환]

지난달 23일 북한이 연평도에 무차별 포 공격을 했다. 대낮에 날벼락을 맞은 섬 주민들은 어선을 타고 인천으로 건너와 지금까지 피란생활을 하고 있다. 이번 연평도 공격을 계기로 서해 5도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다. 서해 5도는 본래 군사 용어로 백령도와 대청·소청도 및 연평도·우도를 일컫는 말이지만 행정적으로는 주민이 없는 우도를 빼고 소연평도가 포함된다. 이들 섬은 인천에서 120∼200㎞ 이상 떨어져 있지만 북한 땅과는 십수㎞ 거리에 있다. 국토의 막내이자 최일선 보루인 서해 5도의 모든 것을 짚어본다.

정기환 기자 < einbaumjoongang.co.kr >

인천 옹진군 대청면 대청리의 선진포항 전경. 대청도의 동쪽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만의 입구가 서쪽으로 나 있어 천혜의 어항 입지를 갖추고 있다. 주 어종은 우럭과 노래미이며 인천 연안부두와 백령도를 오가는 여객선이 하루 3차례 들른다. [옹진군 제공]

서해 5도는 본래 황해도 옹진군과 벽성군·장연군 등에 속해 있던 섬이다. 해방 후 38선을 경계로 남북으로 분단되면서 대한민국 경기도 관할로 편입돼 이들 섬과 옹진반도 지역이 옹진군으로 묶였다. 6·25 전쟁 초기 한때 북한에 점령됐으나 인천상륙작전 이후 수복됐다. 이후 국군이 서해상의 해상 통제권을 장악하면서 서해 5도에는 1951년부터 해병대가 주둔해 방어작전을 담당하고 있다.

서해 5도는 대한민국이 실효적으로 지배하는 지역이지만 73년 북한이 주변 수역을 연해라고 주장하면서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백령도의 경우 인천에서 210㎞ 떨어져 있지만 평양까지의 거리는 150㎞다. 북한이 서해 5도 주변 수역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이유는 서해 5도를 요새화할 경우 국군의 첨단 무기로 북한의 황해남·북도는 물론 평양까지 위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 입장에서는 서해 5도가 '옆구리에 들이밀어진 비수'인 것이다. 북한이 서해를 통해 남침할 경우 서해 5도는 1차 방어선 역할을 하게 된다.

반대로 서해 5도가 북한으로 넘어갈 경우에는 북방한계선(NLL)이 무력화되고 남침의 전초기지로 변하게 된다. 또 북한 해군·공군의 활동 반경이 확대돼 대한민국의 안보에 큰 위협 요인이 된다. 또한 중국 등으로 향하는 항행 통로가 막히면서 인천항의 물류 기능이 큰 타격을 받게 된다. 서해 5도의 전략적 중요성은 이처럼 비중이 크다.

인천 앞바다에는 크고 작은 섬이 155개 있다. 이 중 주민이 거주하는 섬은 41개에 불과하고 나머지 114개는 무인도다. 서해 5도는 인천 옹진군에 소속된 103개 섬 가운데 비교적 큰 편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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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개 섬 중 백령도가 면적이나 인구에서 가장 크다. 10월 말 현재 5000여 명이 거주하지만 해병대·해군 등 주둔하는 군인까지 감안하면 1만 명을 웃돈다. 농경지도 넓어(14㎢) 섬으로서는 드물게 어업보다는 농업이 주업이다. 6㎢의 논에서 생산되는 쌀은 대부분 주둔 해병부대에서 군량미로 소비돼 민·군 친선관계의 촉매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연평도·대청도에서는 농경지가 거의 없어 식량을 자급자족하지 못한다.

백령도를 빼고는 어업의 비중이 높은데 서해 5도의 어선은 251척에 이른다. 옹진군 전체의 어선 중 절반 이상이 서해 5도에서 조업을 하고 있는 셈이다. 백령도의 까나리 어업은 전국 생산량의 60%를 차지하고 있다. 연평도는 과거 '조기섬'으로 불렸지만 지금은 꽃게잡이가 주업이다. 대청도는 홍어·우럭 등이 많이 잡힌다. 대청도 홍어는 흑산도 홍어와 달리 주로 횟감으로 유명하다. 백령도와 대청도에는 각각 용기포·선진포항 등 어항이 7개씩 있고 연평도도 연평항 등 2개 어항을 갖고 있다.

서해 5도의 특징은 교회가 유난히 많은 것이다. 백령도에는 교회가 13개, 성당·사찰이 1개씩 있다. 교회와 성당에 나가는 신도는 3700여 명으로 전체 주민의 75%에 이른다. 연평도·대청도 등에서도 비슷한 현상을 보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기독교가 가장 먼저 전파된 곳이 황해도 연안의 섬 지방인 데다 외롭고 고달픈 섬 살이가 주민들을 신앙에 의지하도록 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세워진 교회도 백령도에 있다. 연화리의 중화동교회는 황해도 소래교회의 도움을 받아 1898년 10월 설립됐다. 이에 앞서 1832년에는 독일인 선교사 카를 귀츨라프가 백령도에서 처음으로 선교활동을 펴기도 했다. 이 교회의 초대 당회장은 당시 황해도 지역의 선교를 지휘하던 언더우드 목사였다. 중화동교회 바로 옆에는 초기 기독교 선교의 발자취를 담은 백령기독교역사관이 있다.

천연기념물 등 자연유산 문화재도 많다. 백령도 사곶천연비행장(천연기념물 391호)을 비롯해 대청도 동백나무 자생 북한지, 백령도 남포리 콩돌해안 등 서해 5도의 천연기념물은 모두 7건에 이른다. 백령도 두무진은 명승(제8호)으로, 연평도 충민사는 향토유적(제1호)으로 지정돼 있다.

5∼6년 전부터 섬 여행 바람이 불면서 서해 5도를 찾는 관광객이 증가 추세를 보여왔다. 그러나 올해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으로 증가세가 꺾여 백령도의 경우 지난해 8만7000여 명에서 올해는 6만6000여 명으로 24% 줄었다.

서해 5도로 가는 뱃길은 모두 인천 연안부두에서 시작된다. 대청도를 거쳐 백령도로 가는 여객선은 하루 3편이 운항되며 4시간30분∼5시간 걸린다. 연평도행 여객선은 하루 2편씩 운항하며 쾌속선은 2시간, 일반 여객선은 4시간 정도 걸린다.

다음은 서해 5도 각 섬들의 역사와 주요 관광 포인트.

심청전의 인당수는 백령도 북서쪽바다

고구려의 영토일 때는 곡도(鵠島)였으나 고려 때 백령진이 됐다. 따오기가 흰 날개를 펼치고 공중을 나는 모습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진촌리 조개무지에서는 신석기시대의 유물이 다량 출토돼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흔적을 보여준다. 후삼국시대 후백제와 고려가 백령도를 두고 치열한 해전을 벌인 것도 이 섬이 중국으로 가는 해상 교통의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국방의 요지로 꼽혀 진(鎭)을 두었으며 면 소재지인 진촌리의 지명도 여기서 유래한다.

1·4후퇴 때는 황해도에서 피란을 온 청년 8000여 명이 켈로부대로 불리는 유격대를 조직해 섬을 지켜낸 뒤 해병대에 방어작전권을 넘기기도 했다.

백령도는 전래설화 심청전의 무대이기도 하다. 심청이 공양미 삼백 석에 뱃사람들에게 팔려가 몸을 던진 인당수가 바로 이 섬의 북서쪽 바다다. 1999년 인당수가 바라다보이는 진촌리에 심청각이 세워져 심청전을 판소리·영화·음반·고서 등으로 감상할 수 있다.

백령도의 볼거리는 해안선을 따라 이어진다. 사곶해변의 백사장은 나폴리와 함께 세계에서 두 곳밖에 없는 천연 비행장이다. 길이 2.5㎞, 폭 300m의 규조토 해변으로 물이 빠지면 소형 항공기가 착륙할 수 있을 만큼 백사장이 단단해진다. 천안함 폭침 사건 때도 군용 항공기가 사곶천연비행장을 이용했다. 사곶해변에서 남서쪽으로 2㎞ 떨어진 콩돌해안은 2㎞에 걸쳐 콩알 모양의 동글동글한 자갈로 뒤덮여 있다. 피부에 좋다는 콩돌자갈찜질이 인기다.

백령도 관광의 백미는 서해의 해금강으로 불리는 두무진이다. 사암과 규암이 겹겹이 쌓인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장관을 이룬다. 특산물로는 담백하고 비린내가 적은 까나리액젓과 전복·해삼 등의 해산물 이외에 백령약숙·흑염소 등이 있다.

사막에서나 볼 수 있는 모래언덕, 대청도의 자랑

백령도 남쪽 12㎞ 거리에 있다. 배를 타고 중국을 오가던 뱃사람들이 산림이 울창하다고 '푸른 섬'으로 불렀던 데서 지명이 유래됐다고 한다.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되며, 고려시대에는 유배지로 이용됐다.

고려 중엽 이후 매를 길들여 꿩이나 비둘기를 잡는 매사냥이 성행할 때는 대청도·백령도에 사는 매를 제일로 쳐 '해동청 보라매'로 불렀다고 한다. 대청도 보라매가 인기를 끈 것은 멀리 몽골·중국에서 날아와 서해 바다를 건너 처음 날개를 쉬는 곳이 대청도여서라고 한다. 예전에는 가을만 되면 육지에서 대청 보라매를 잡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매를 잡아 키우던 매막도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매막골'이라는 지명이 있다. 대청도 매는 천연기념물 323호로 지정돼 있다.

대청도는 1406년 옹진현에 편입되었다가 16세기 다시 장연현 소속으로 바뀌었다. 1793년 주민의 입주와 경작이 허락됐으며, 1799년에는 대청·소청도를 수원부로 편입시키고 두 섬에 각각 진(鎭)을 설치했다. 1894년 황해도 장연군에 속했다가 1928년 백령면에 편입됐으며 74년 대청면으로 승격된 이후, 95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경기도에서 인천광역시로 통합됐다.

전체적으로 경사가 급한 산지이며 해안선은 단조롭다. 북쪽은 모래 해안이 발달해 해수욕장이 많다. 우거진 해송과 은빛 백사장의 사탄동 해변과 노송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답동 해변이 관광지로 꼽힌다. 옥죽동 해변에는 사막에서나 볼 수 있는 모래산과 모래 골짜기가 바람을 따라 파도 모양의 주름이나 무늬를 만들어 내는 대청도 모래언덕이 있다. 소청도에는 1908년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설치된 소청등대가 있다.

농경지가 적어 주민의 대부분이 어업에 종사하는 전형적인 어촌 지역으로 80년대 말까지는 홍어잡이가 성행했다. 조선시대 문정왕후의 병을 깨끗이 낫게 했다는 상기생(桑寄生) 등 약초 100여 종이 자라고 있다. 우리나라 최북단의 대청도 동백나무 자생 북한지(北限地 천연기념물 66호)도 있다.

조기에 얽힌 설화 … 임경업 사당 있는 연평도

섬의 모양이 바다 위를 달리는 열차 모양으로 평평하게 생겼다 해서 연평도라 불렸다고 한다. 황해도 해주의 수양산으로부터 일곱 번째 있는 섬으로 길게 늘어선 섬들의 행렬이 열차를 연상시킨다.

연평도 조기잡이에는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를 구하기 위해 배를 타고 중국으로 가던 임경업 장군에 얽힌 설화가 전해진다. 뱃사람들의 부식이 떨어지자 임경업 장군이 연평도에 배를 대게 하고 나뭇가지를 꺾어 개펄에 꽂아두었더니 물이 빠지면서 나뭇가지마다 조기가 가득 걸려 있었다는 것이다. 연평도 어부들은 고기잡이를 나갈 때 임경업 장군을 모신 사당인 충민사에 참배하고 새해나 명절이면 풍어제를 올린다.

조기 역사관과 조기섬 동상은 1960년대 말까지 매년 봄이면 조기 파시(波市)가 열렸던 연평도 조기잡이의 역사를 담고 있다. 조기 떼가 사라진 이후에는 꽃게가 그 자리를 차지해 주민들의 주 소득원이 되고 있다. 씨알이 굵고 알이 찬 연평꽃게는 최상품으로 대접받는다.

관광 명소로는 낙조가 아름다워 사진촬영 대회가 자주 열리는 빠삐용 절벽과 기암괴석과 흰 자갈·고운 모래가 함께 펼쳐져 있는 구리동 해변 등이 유명하다. 특산품으로는 꽃게와 자연산 굴, 잎이 두꺼운 수퍼다시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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