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개..' 욕한 그 탤런트가 억울한 까닭
[아시아경제 김철현 기자] #1. 여대생 김주희씨(27.가명)는 얼마 전 리포트 작성을 위해 잠시 PC방에 들렀다가 황당한 경험을 했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초등학생들이 게임을 하며 쉬지 않고 욕을 했던 것. '18'이 감탄사처럼 난무했고 '개'는 모든 문장과 단어에 접두사처럼 붙어 의미를 강조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김씨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건달 뺨치는 험악한 언사에 숨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2. 직장인들의 회식 자리. 남자들만 모인 탓에 질펀한 음담패설이 여기저기서 나온다. 음담패설을 맛깔스럽게 하는 데 욕은 필수다. 취기가 오르자 'ㅈ'부터 'ㅆ'까지 남녀의 생식기를 가리키는 비속어로 만들어진 욕들이 직급에 관계없이 거리낌 없이 던져진다. 한바탕 욕 잔치를 벌이고 나니 참석자들은 서로에게 묘한 친밀감을 느꼈다.
바야흐로 욕의 전성시대다. 앳된 얼굴의 육체파 여배우가 무심코 던진 욕설로 화제의 중심에 서기도 했고 상대방에게 욕을 섞은 랩을 속사포처럼 퍼붓는 방송 프로그램이 인기를 얻고 있기도 하다. 고상할 줄로만 알았던 서울시향에서는 향기 나는 말도 부족한 판에 대표가 단원들에게 욕을 했는지를 두고 공방이 벌어지기도 했다. 욕쟁이 할머니의 '욕배틀' 참가를 그린 영화도 개봉했다. 우리 사회가 '욕 하는 사회'가 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최근 들어서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욕에 노출돼 있는 정도가 점점 심해지고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렇게 욕이 넘쳐나는 까닭은 무엇일까. 욕과 관련해 자주 쓰는 관용적 표현 중에 '욕먹어도 싸다'는 말에서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일일이 열거하기 힘든 부조리한 현실에 욕이 튀어나온다고 보는 게 맞겠다. 국문학자 김열규 교수도 1997년 출간된 욕에 대한 그의 저서 '욕, 그 카타르시스의 미학'에서 "욕먹어 싼 인간이 있고 욕먹어 마땅한 세상이 있기에 욕할 만한 경우가 생기는 것"이라고 적고 있다. 또 "욕은 상식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 이성이나 이치로는 있을 법하지 않은 일에 기겁한다"고 한다. 고운 말로 해서는 통하지 않는 세상이 욕 생산 메커니즘의 실체라는 얘기다.
결국 스트레스가 많고 사람답게 사는 것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는 현실이 욕에 고스란히 반영돼 있다.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서울의 한 초등학교. 교장 선생의 훈화 말씀이 끝도 없이 이어지자 "18, 개 길어, 지랄 개드립 치고 있네" 어김없이 욕설이 터져 나온다. 이런 말은 기존 권위와 질서에 대한 극도의 혐오를 담고 있는데 아이들이 맞닥뜨리고 있는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최근 보건사회연구원이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아동들은 전 세계에서 학업 부담으로 인해 가장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학교생활과 일상에서 느끼는 만족도는 최하위 수준이었다. 행복하지 않는 현실과 청소년기의 튀고 싶은 욕구가 복합적으로 아이들이 욕을 하도록 부추기고 있는 것이다.
성인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여전히 취업률은 최저 수준이고 간신히 취업을 한다고 해도 삶이 나아지는 것도 아니다. 한국, 중국, 홍콩, 태국, 뉴질랜드, 영국 등 6개국에서 실시한 조사 결과 한국 30대의 '웰빙지수'가 가장 낮은 것으로 집계됐다는 발표도 있었다. 사회, 건강, 가족, 재정, 직장 등 뭐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우리네 성인들이 느끼는 솔직한 감정이다. "썅, ㅈ같은 놈, 졸라, ㅆ팔년, 염병 할 새끼, 미친년, 또라이" 등등의 욕설이 익숙한 것은 욕을 통해 감정을 발산하는 이들이 그 만큼 많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또한 욕을 의미하는 다른 단어 '육두문자'에서 '육두'가 남성의 성기를 가리키는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욕에는 성기와 성행위가 즐겨 사용된다. 다른 나라의 욕에서도 성에 대한 표현이 빠지지 않는 것을 보면 성과 욕의 역사는 그 궤를 함께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과거 비유와 은유에서 보다 직접적이고 자극적인 표현으로 변해가는 것은 성에 대한 인식의 변화에 영향을 받고 있다고 얘기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욕할만한, 욕먹어도 싼 세상이니 마음껏 욕해도 좋을까. 욕은 우리가 금기시하는 것들을 직접 건드리는 언어이며 여성 비하와 신체적 결함에 대한 멸시 등을 여과 없이 담고 있다. 요사이 만들어진 욕들도 대부분 그렇다. 김열규 교수는 앞서 언급한 저서에서 이런 욕들은 '쌍욕'이라고 말한다. 대신 비유법, 과장법, 대조법 등이 적절히 섞인 기지의 극치로서 욕을 권하고 있다.
90년대 광주에서 열린 전국욕대회에서 으뜸상으로 입상했다는 경남 고성 노인의 욕은 우리 욕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 준다. "날강도 찜 쪄서 안주 삼고 화냥년 경수 받아 술 빚어먹고, 피똥 싸고 죽을 남원 사또 변학도와 사돈해서 천하의 잡놈 변강쇠 같은 손주 볼 놈". 곱씹어보면 요즘 말로 '후덜덜'한 욕이다.
김철현 기자 kc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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