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어야 자식이 살지".. 가난 - 병마의 '슬픈 굴레'

2014. 1. 16.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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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파탄 내몰리는 장기 투병자

[동아일보]

"이렇게 살아버리니… 더 답답해."

김모 할머니(70)는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한숨쉬듯 토해냈다. "죽었어야 했다"며 덜덜 떨리는 왼손으로 가슴께를 쳤다. 13일 오전 3시, 전날 기도원에 다녀온 김 할머니는 화장실에 있는 살균소독제 락스를 마셨다. 토하고 구르는 할머니를 건넛방에서 자던 막내아들이 발견하고 병원으로 모셔갔다. 김 할머니는 지난해 여름 파킨슨병 진단을 받았다.

파킨슨병과 치매 등 장기 투병이 필요한 병마(病魔)는 단순히 몸만 괴롭히지 않는다. 환자는 물론이고 가족들에게도 끊임없는 고통을 준다. 경제적 타격을 주면서 자살, 살인 등 극단적인 선택에까지 이르게 해 끝내는 가족을 해체시키기도 한다. 병마의 위협에 고통받는 우리 이웃들의 현실을 들여다봤다.

○ "죽지 못해 답답해"

30여 년 전 남편과 사별한 김 할머니는 아파트 계단을 청소하며 3남 1녀를 키웠다. 자식들은 건강하게 자라줬지만 다들 형편이 어렵다. 서울 양천구 신정동에서 할머니와 함께 사는 막내아들도 작은 용달차로 그때그때 운송업을 하며 벌이를 한다.

지난해 여름, 할머니는 이석증(균형감각을 담당하는 귓속 세반고리관의 이상으로 나타나는 어지럼증)으로 병원에 갔다가 파킨슨병을 진단받았다. 몸무게는 반년 만에 10kg이 빠졌고 점점 왼쪽 손과 발의 떨림이 심해졌다. 당뇨와 고혈압도 할머니를 괴롭혔다. 지난해 말 집주인이 3000만 원인 전세금을 4000만 원으로 올려달라고 하면서 할머니는 '내가 자식에게 짐'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다고 했다.

락스를 마시고 병원에 입원한 할머니는 복도에서 아들이 병원비를 걱정하는 통화를 할 때마다 "죽지 못해 답답해"란 말만 되풀이했다. 김 할머니는 부양능력이 있는 자식이 있어 기초생활수급자 혜택을 받지 못한다.

○ 병마는 가정을 통째로 흔든다

"끝나지 않을 터널을 걸어가야 하는 숙명이죠."

강민상(가명·29) 씨는 불치병 환자 가족으로 12년째 살고 있다. 강 씨가 고교 3학년이던 2003년, 아버지가 심근경색으로 인한 뇌손상으로 갑자기 쓰러져 의식을 잃었다. 그 뒤 서울 중위권 대학에 입학한 강 씨는 스무 살이 되자마자 빚을 져야 했다. 아버지의 치료비를 마련하느라 집까지 팔아야 했던 가정형편상 도무지 학비를 마련할 수 없었던 것. 대학 4년 동안 학자금 대출로 인한 빚 2700여만 원을 안고 사회로 나왔다. 결혼을 생각했던 여자친구는 사지가 마비된 채 집에 누워만 계시는 아버지가 있다는 말에 그를 떠났다.

병마의 고통은 나이를 가리지 않고 급습해 삶을 흔든다. 지방에서 부군수를 지내고 퇴직한 정철목(가명·82) 씨는 2000년 막내아들(43)이 뇌출혈로 의식을 잃고 쓰러지면서 15년째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당시 지방에 살며 막내아들의 두 살배기 손자를 보는 낙에 살았던 정 씨 부부는 서울로 급히 집을 옮겨 대형병원들을 전전했다. 하지만 막내아들은 눈만 껌뻑일 뿐이었고 며느리는 3년 만에 손자를 데리고 떠나며 인연을 끊었다. 정 씨 부부는 10년 넘게 식물인간 상태인 막내아들을 집에서 간병하다가 심신이 지친 탓인지 지난해 가을 나란히 암에 걸렸다.

14일에는 10여 년째 지병으로 고통 받던 부부가 동반 자살을 시도하는 사건도 일어났다. 장기투병으로 심신이 미약해진 상태에서 기약 없는 투병 생활에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이다. 서울 강북경찰서는 이날 오후 강북구 미아동 자택에서 손목을 칼로 그은 채 쓰러져 있는 임모 씨(67)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그 옆에는 임 씨의 부인 채모 씨(67)가 목이 졸린 채 숨져 있었다. 임 씨는 병원으로 실려 가는 구급차에서 "오랫동안 아프고 힘들어 아내와 같이 죽으려 했다"고 말하곤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다. 임 씨는 신부전증, 채 씨는 허리디스크로 10여 년 동안 극심한 고통을 앓아온 데다 3년 전에도 동반 자살을 시도했던 걸로 알려졌다.

○ 장기투병 지원, 여전히 부족하다

이처럼 장기 투병을 하는 가정, 특히 가정형편이 어려운 저소득층의 경우에도 의료 지원을 받기가 어렵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병원에 갈 필요가 있지만 치료를 포기하는 비중'은 4.8%인데, 그중 72.6%가 경제적 이유로 치료를 포기한 걸로 나타났다. 저소득층이어도 의료 지원을 받기가 어려운 것이다.

가족을 치료하기 위해 전전하다 중산층이 빈곤층으로 전락하는 경우도 많다. 2011년 세계보건기구(WHO)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의료비 지출로 빈곤가구(소득이 중간수준의 절반 미만인 가구)로 전락한 비율이 0.36%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다섯 번째로 높다. 김민영 대한의료사회복지사협회 사무국장은 "저소득층 가정을 위한 '재난적 의료비'(가구당 평균 의료비 부담이 소득의 10%를 초과하는 경우) 지원 제도가 있지만 특정 질병에만 지원된다는 허점이 있다"며 "환자 처지에서 피부에 와 닿는 실질적인 도움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강은지 kej09@donga.com·이은택·조동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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