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심리적 부검

류호성기자 2013. 10. 5. 0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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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읽으면 죽음이 보인다
우울증·실연.. 한마디 요약은 얼마나 무지한가
자살자 삶 재구성해 원인 밝히면 예방책도 가능

한국인은 지난해 하루 평균 38.8명이 자살했다. 한 해 자살자는 총 1만4,160명으로 전년보다 11% 줄었다고 통계청은 지난주 밝혔다. 인구 10만명당 28.1명이라는 이 자살률은 하지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여전히 최고이며, 회원국 평균(12.5명)의 두 배를 넘어선다.

'자살 예방의 날'인 지난달 10일 보건복지부는 "심리적 부검을 통해 자살예방대책을 수립하겠다"고 발표했다. 심리적 부검이란, 한마디로 자살한 이의 마음을 읽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자살자의 행적을 수집하고 유족 등 주변인 면담을 통해 자살의 사례별 원인과 매커니즘을 심층적으로, 또 다각도로 파악한다. 미국 핀란드 등 외국은 자살예방책 마련을 위해 심리적 부검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그런데 과연 심리적 부검으로 자살 원인을 밝힐 수 있을까. 연구자들은 "그렇다"고 답한다. 심리적 부검은 또 성적고민, 우울증, 신병비관 등 '한 마디로 요약ㆍ정리'되는 수사당국의 자살 원인 발표나 언론의 추정 보도가 얼마나 무지하고 무책임하고 심지어 난폭한 짓인지도 드러내준다. 연구자들은 고인의 삶을 재구성해보면 복합적인 요인이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특정 시점에서 삶의 위기가 고조되는 징후를 뚜렷이 읽을 수 있다고 말한다. 몸에 병이 들면 온갖 치료법을 찾으면서도 마음의 위기는 방치하는 현실, 여러 차례 자살을 시도한 사람이 아무런 사회의 도움을 받지 못한 채 결국 자살에 이르는 사례들을 그들은 답답해했다.

국내의 심리적 부검은 이제 시작 단계다. 한국형 자살(예방)모델이라도 만들기 위해서는 국가와 지역 차원에서, 또 특정 직종이나 직능 단위에서, 다양한 자살사례 연구가 활발하게 이뤄져야 한다.

하지만 한국의 심리적 부검은 유족의 벽을 좀처럼 넘지 못하고 있다. 심리적 부검을 위해서는 가족의 동의와 협조가 필수적인데, 실제로 유족들은 "왜 죽은 사람 얘기를 꺼내냐"며 말문을 닫기 일쑤라는 것이다. 연구자들은 자살을 외면하는 문화가 또 다른 자살을 막는 노력을 가로막는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우선 자살에 대한 완고한 인식의 터부를 허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심리적 부검은 그런 점에서, 자살 예방 모델이라는 결과 못지않게 그 과정을 통해 자살에 대한 개인적 공동체적 내성을 강화한다. 자살을 여타의 사망 원인처럼 특별한 경계심 없이 언급하고 들여다볼 수 있을 때 자살도 줄어들 수 있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했다.

고인의 삶 되짚는 '치유의 퍼즐'… 또 다른 비극을 막는다

■ "자살자 심리적 부검 활성화" 목소리의료기록ㆍ휴대폰 메시지 확인… 유가족과의 면담 등서 단초핀란드 시행 이후 자살률 급감… 성공적 사례로 거울삼을 만터부시하는 한국 인식변화 필요… 남은자들 트라우마 씻는 효과도

류호성기자 rhs@hk.co.kr

"남성 유가족은 남성이, 여성은 여성이 만나는 게 좋은 것 같네요."

"유가족이 느낄 심리적 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해 면담 참관은 가급적 줄이죠. 답변에 과도한 반응을 보이는 것도 삼가는 게 좋겠어요."

지난달 경기 수원시 아주대 사회과학연구소 회의실에 연구원 5명이 모였다. 이들은 6월부터 보건복지부 연구 용역으로 '심리적 부검'을 진행하고 있다. 연구원들은 유족을 더 잘 배려할 수 있는 방법을 논의하는 중이었다. 서종한 아주대 전임연구원은 "가족의 자살에 대해 말하기를 꺼리는 문화가 우리 사회에 워낙 강하기 때문에 유가족을 설득하고 면담하는 일이 특히 어렵다"고 말했다.

사인(死因)이 명확하지 않을 때 부검을 한다. 하지만 의학적 사인이 확인되더라도 왜라는 물음표가 빠지지 않는 경우가 있다. 자살이 대개 그렇다. 유서로도 이유가 명확히 설명되지 않을 때가 많다. 김경일 아주대 심리학과 교수는 "유서를 분석해보면 이상한 불일치가 발견된다. 유가족들도 유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꽤 많다는 것이다. 그런 불일치를 이해하기 위해 심리적 부검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심리적 부검은 대개 고인이 남긴 흔적과 남은 이들의 입을 통해 고인의 삶을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우선 경찰이나 지역 자살예방센터 등을 통해 심리적 부검 대상자를 선정하고 유가족의 연락처를 확보한다. 경찰의 협력을 얻어 자살을 전후한 사실관계 등을 확인하고, 고인과 관련된 구할 수 있는 모든 자료를 수집한다. 의료 기록, 재산 상황, 인터넷에 쓴 글, 휴대폰 메시지…. 유가족 등 고인과 가까운 이들과의 면담은 심리적 부검의 핵심 절차다. 면담 내용은 어린 시절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학력부터 병력까지 고인에 대한 모든 것을 망라한다. 어린 시절 부모와 떨어져 산 경험은 있는지, 원하는 직汰?가졌는지, 친구는 몇 명인지, 자해를 시도한 적은 있는지….

심리적 부검은 미국 뉴욕에서 1934~40년 경찰 93명이 잇달아 자살하자 원인 규명을 위해 처음 시도됐다. 이후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다양한 집단에 대한 심리적 부검이 실시돼 연구 결과가 자살 예방에 활용됐다. 가장 체계적이고 성공한 심리적 부검으로는 핀란드의 사례가 거론된다. 핀란드는 국가 차원에서 1987년 4월부터 1년간 발생한 자살 사건 1,397건 전체에 대한 심리적 부검을 실시했다. 연구 결과 자살자의 3분의 2 이상이 우울증 증상이 있었지만, 이 중 85%는 자신이 우울증을 앓는지도 모르는 채 방치돼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핀란드 정부는 보건소나 병원을 찾는 모든 환자를 대상으로 우울증 검사를 실시하고 상담ㆍ약물 치료를 받게 하는 등 적극적인 예방정책을 폈다. 1990년 10만명당 30명에 달했던 핀란드의 자살률은 2011년에는 16.4명으로 떨어졌다.

한국에서도 세계 최고 수준에 이른 자살률을 낮추기 위해 심리적 부검을 적극적으로 실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하지만 한국에서 심리적 부검은 좀처럼 활성화하지 못하고 있다. 2009년 보건복지부와 자살예방협회가 경찰의 협조를 얻어 최초로 본격적인 심리적 부검을 시도했지만, 100건을 목표로 했던 이 연구는 7건의 결과를 내놓는 데 그쳤다. 유가족들의 거부 때문이었다. 당시 연구 책임을 맡았던 홍강의 서울의대 정신의학과 명예교수는 당시를 떠올리며 "굉장히 어려웠다"고 말했다. 그는 "동양권,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살을 창피하게 여기고 숨기려고만 한다. 또 가족의 정신 질환이 드러나는 것에 대한 저항감도 크다. 하지만 책에 의존해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할 게 아니라 한국에 어떤 특이한 사정이 있는지 알아야 예방책이 나올 수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심리적 부검 연구자들의 우선 과제 역시 자살에 대해 말하기조차 거부하는 분위기를 극복하는 것이다. 연구자들은 고인 사망 후 3개월 이상의 애도기간을 두고 유가족을 접촉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아주대 연구팀이 보내는 면담 안내문에는 '말하기 어려운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모든 기록은 비밀 유지를 최우선으로 합니다' 등의 내용이 들어 있다. 충남에서 심리적 부검을 진행하고 있는 최명민 백석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부검이라는 단어에 대한 거부감을 줄이기 위해 심리사회학적 원인조사라는 용어를 쓰고 마을 이장이나 보건소장 등 유가족을 잘 아는 분들을 통해 접촉을 한다"며 "이렇게 해도 면접 현장에서 안 되겠다고 하는 분들도 있고 결국 10명 중 8, 9명은 면담을 거절한다"고 말했다. 핀란드 심리적 부검에서 가족 면담 비율은 83%였다.

전문가들은 자살에 대한 한국 사회의 유난한 터부가 역설적으로 심리적 부검이 필요한 이유라고 지적한다. 정신과 전문의인 이영문 국립공주병원장은 "우리 나라는 학생이 자살하면 부모가 얼마나 들볶았겠느냐고 하고 노인이 그러면 자식들을 불효자라고 하는데 그런 식으로 비난을 돌리면 안 된다. 자살에 이르게 된 과정을 살펴보면 사회문화적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자살을 개인의 책임으로 몰고 가는 것만 줄여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임정수 가천의대 예방의학과 교수는 "유가족들도 큰 트라우마를 안고 산다. 심리적 부검을 통해 속에 담았던 것을 풀어놓으면 유가족의 정신적 치료 효과도 있다"고 말했다. 자살은 전염성이 있기 때문에 심리적 부검 자체가 자살 예방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최명민 교수는 "면담 후에는 아무에게도 하지 못하던 얘기를 할 수 있게 해줘서 고맙다고 하는 분들도 많다"고 말했다.

류호성기자 rh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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