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롭지 못한 현실 앞에서 침묵하는 것은 죄악"

2013. 8. 14.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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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대구·대전교구 사제 등 506명 동참

전국 15개 교구 중 8곳서 시국선언

14일 천주교 대구대교구에서는 100명이 넘는 사제들이 시국선언을 했다. 다른 단체가 주도한 시국선언에 몇몇 사제들이 참여한 것이 아니라, 대구대교구 산하 정의평화위원회가 직접 시국선언을 이끌어냈다. 대구대교구 설립(1911년 4월8일) 102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대구대교구는 지금까지 천주교 안에서 '보수의 아이콘'으로 통했다. 용산참사, 4대강 사업 등 그동안 논란이 일었던 많은 사회적 문제들에 사제들은 침묵했다. 전두환 군사독재에 맞선 1987년 6월 항쟁 당시 부산교구 소속 사제들이 시국선언을 했을 때도 대구대교구는 조용했다.

102년 만에 대구대교구에서 일어난 이번 시국선언은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국가정보원의 대통령 선거 불법 개입에 대한 비판 여론이 가톨릭 안에서 그만큼 높다는 것이다. 짙은 보수색과 폐쇄적인 성향이 강했던 대구대교구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는 것이다.

■ 대구대교구 사제들 103년 만의 시국선언

천주교 대구대교구와 안동교구 사제, 대구·경북지역 수도자 500여명은 14일 오후 3시 대구 수성구 범어동 새누리당 대구시당·경북도당 앞에서 국정원 대선 개입을 규탄하고 민주주의를 수호하자는 내용의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이날 대구·경북지역 사제와 수도자들이 발표한 시국선언문에는 대구대교구 소속 사제 103명, 안동교구 소속 사제 66명, 남자 수도자 72명, 여자 수도자 265명 등 모두 506명이 서명했다. 시국선언문 발표에는 사제와 수도자들, 지역 천주교 신자와 시민단체 회원 등 50여명도 함께했다.

시국선언문 발표에 앞서 말씀 선포와 시작기도를 맡은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고진석 사제는 "왜 신부가 하라는 기도는 안하고 정치에 개입을 하느냐는 말이 있는데, 가톨릭교회는 정의롭지 못한 현실 앞에서 침묵하는 것을 죄악으로 규정하고 우리에게 불의에 저항할 권리와 의무가 있음을 가르친다. 불의에 저항하는 우리의 목소리는 바로 우리가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왔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대구대교구 권혁시 사제는 대표사제 인사말에서 "1911년 대구교구가 만들어지고 사제들이 처음으로 공동선 실현을 위해 이 자리에 함께 모였다. 국정원 사태는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이며 위기라는 우려 때문이다"라고 밝혔다.

안동교구 정진훈 사제는 대표사제 인사말에서 "행복은 가질 수 있다는 희망이 있을 때 살아가는 희망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나라는 권력의 조직적 통제 앞에서 이런 희망을 잃어가고 있다. 희망의 씨앗을 뿌리기 위해 우리는 이 자리에 모였다"고 말했다.

시국선언문은 김영호 대구대교구 정의평화위원장과 권중희 안동교구 정의평화위원장이 번갈아가며 낭독했다.

이들은 시국선언문에서 "교회의 입장에서 바라본 작금의 대한민국 현실은 분노를 넘어 우리를 경악하게 한다. 국정원이 특정 정당의 대통령 후보를 위해 수준 이하의 댓글 공작을 자행하면서 국가를 저버리고 정권의 하수인으로 전락했다"고 비판했다. 또 국정원의 대통령 선거 불법 개입과 남북정상 대화록 불법 공개 문제와 관련해 △진상 규명 △책임자 처벌 △재발 대책 마련 △박근혜 대통령의 사과를 촉구했다.

■ 보수적이라는 대구대교구에서 무슨 일이?

천주교 대구대교구는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성향이 짙다고 알려져 있다. 일부 천주교 신자들 사이에선 "대구지역 천주교는 마치 고립된 섬 같다"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대구대교구의 이런 분위기는 박정희·전두환 군사정권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0년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는 대통령 자문기구인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만든다. 1979년 12·12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불법으로 장악한 신군부가 독재정부 수립을 위해 만들어낸 어용기관이었다. 당시 국보위에는 81명이 위원으로 참여했는데, 천주교 사제 2명이 포함돼 있었다.

이들 2명은 모두 대구대교구 사제들이었다. 지역 일간 <매일신문> 사장을 지냈던 고 전달출 신부,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사무총장 등을 맡았던 이종흥 원로신부였다. 이들이 국보위에 들어갔을 당시 대구대교구장은 이문희 대주교였다. 이문희 대주교의 아버지는 박정희 정권 때 6·7대 국회의장을 지냈던 이효상씨다. 1980년 11월4일 전두환 정권의 언론 통폐합 때 <매일신문>은 대구경북지역 일간지 가운데 유일하게 남았다. 이문희 대주교는 1986~2007년 대구대교구장을 지냈다. 그동안 대구대교구 사제들은 침묵했다.

그러나 14일 시국선언에 참여한 천주교 대구대교구와 안동교구 사제, 대구·경북지역 수도자 506명의 명단을 보면 눈길 끄는 대목이 있다. 시국선언에 서명한 대구대교구 사제 103명은 교구 소속 사제 450명의 23%에 이른다. 주요 직책인 대구대교구 사무처장인 박석재 사제도 있었다. 안동교구에선 사제 81명 가운데 66명이 참여했고, 남자 수도자 72명과 여자 수도자 265명도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사상 초유의 대구대교구 사제와 수도자들은 시국선언은 국정원 사태에 대한 우려가 가톨릭 안에서도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준다. 2010년 2월 대구대교구장에 오른 조환길 대주교가 이전 교구장들보다 좀 더 개방적인 점이 영향을 줬다는 분석도 나온다.

임성무 대구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교육분과장은 "대구대교구 사제들이 시국선언에 대거 참여한 것은 그만큼 국정원 사태를 심각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진보냐 보수냐를 떠나서 민주주의라는 우리 사회의 기본적 가치가 훼손되고 있다"고 말했다.

■ 전국적으로 번지는 천주교 시국선언

국정원 사태와 관련해 지난달 25일 부산교구 소속 사제 121명이 처음 시국선언을 한 것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마산교구(7월29일·사제 77명)와 광주대교구(7월31일·사제 및 수도자 508명), 인천교구(8월7일·사제164명), 전주교구(8월8일·사제 152명)에서 시국선언이 잇따랐다. 14일 오전 대전교구 소속 사제 141명도 전국 교구 중에서 6번째로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이들은 시국선언문에서 '너희는 공정을 지키고 정의를 실천하여라'라는 성경 구절을 인용한 뒤, 국정원의 대통령 선거 불법 개입과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불법 공개의 진상을 철저히 규명하고 책임자를 처벌할 것 등을 촉구했다.

오후 대구대교구와 안동교구 사제 등이 시국선언을 함에 따라, 전국 15개 가톨릭 교구 가운데 절반이 넘는 8개 교구에서 시국선언이 나왔다. 원주교구 소속 신부 57명은 15일 시국선언을 할 계획이다. 대구 대전 원주/김일우 전진식 박수혁 기자 cool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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