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마을 운동의 그늘] 괴물, 슬레이트 지붕을 어떻게..

2013. 6. 29. 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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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비붐 세대부터 X세대(1990년대 초반 학번)까지 '슬레이트'는 친숙한 단어다. 60·70년대 농촌에서는 슬레이트 지붕 처마에 달린 고드름을 아이스크림 대신 떼어 먹었다. 90년대 후반까지 대학 캠퍼스에서 슬레이트를 불판 삼아 삼겹살을 구워먹는 '배고픈 대학생'의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그랬던 슬레이트가 이제는 석면이라는 이름의 '괴물'로 변해 우리 앞에 나타났다.

#'애물단지'

지난 25일 충청북도 괴산군 청원면 부흥3리 슬레이트 지붕 처마 밑에서 만난 이채필(80) 할머니는 "석면이 뭐여?"라고 반문했다. 시집온 지 얼마 되지 않았던 60년대 초, 초가지붕을 뜯어내고 남편이 애써 올린 슬레이트 지붕을 왜 뜯어내야 하는지 할머니는 이해하지 못했다. 이 마을 30가구 중 10여 가구는 슬레이트 지붕이다. 그러나 주택에 딸린 축사와 창고, 폐가를 감안하면 슬레이트 건축물은 30동이 훌쩍 넘는다. 검게 변색된 슬레이트 지붕을 손으로 만지자 가루가 우수수 떨어졌다. 농림축산식품부 지역개발과 박헌춘(36) 전문관은 "석면 가루가 함유된 부산물"이라며 "이 1급 발암물질이 숨쉴 때 폐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주민 김만춘(54)씨는 슬레이트 지붕을 '애물단지'라고 표현했다. 슬레이트가 나쁘다는 걸 알면서도 집 옆 폐가에 쌓여있는 슬레이트를 치울 수 없어서다. 2009년 개정된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르면 슬레이트 지붕 철거는 자격증이 있는 전문 처리기사만 할 수 있다. 함부로 만졌다간 범법자가 되는 것이다. 김씨는 "슬레이트가 그렇게 나쁜 물질이면 농민들이 걷어서 면사무소 마당에 내려놓으면 나라가 알아서 치워줘야 하는 것 아니냐"면서 "자기 돈 수백만원을 들여 슬레이트 지붕을 교체할 여력이 있는 농민이 몇이나 되겠느냐"고 반문했다.

#'새마을 운동의 상징' 또는 '꿈의 건축자재'

슬레이트 지붕은 농촌 근대화, 새마을 운동의 상징이었다. 70년대 초 새마을 운동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초가지붕을 슬레이트로 바꾸는 농촌주택 개량사업을 시작했다. 불도저식 추진력과 마을 주민의 협동으로 전국적으로 약 100만동의 농가지붕이 슬레이트로 바뀌었다.

슬레이트는 '꿈의 건축자재'였다. 내구성이 뛰어났고 단열·방음 효과도 초가지붕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일부 나랏돈 지원을 빼고 대부분 비용은 농민들 주머니에서 나왔지만 만족도는 컸다. 현재도 슬레이트를 대체할 건축자재가 없을 정도다. 당시 금강(현 KCC) 등 슬레이트 생산업체는 떼돈을 벌었다.

그러나 슬레이트에 함유된 석면이 1급 발암물질이라는 연구결과가 나오기 시작한 2000년대 초부터 슬레이트는 서서히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과거의 잔재를 책임지려는 이들이 있는 반면 회피하려는 쪽도 있다. 농촌건축학회 소속 김승근(53) 강동대 교수는 대학생들과 함께 슬레이트 지붕 교체 자원봉사를 8년째 하고 있다. 김 교수는 "은사께서 새마을운동 당시 슬레이트 지붕 교체에 앞장섰다고 들었다"며 "당시는 슬레이트가 그렇게 나쁜 줄 몰랐겠지만 그 책임은 우리가 나눠져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반면 KCC는 농가 슬레이트를 대체할 자재를 개발해 달라는 정부의 요청에 묵묵부답이다.

#피하지 말고 맞서야 할 '괴물'

슬레이트 지붕 철거 문제는 단순히 농어촌만의 문제는 아니다. 슬레이트 지붕에 함유된 석면이 빗물에 섞여 토양에 흘러가고, 도시민은 그 흙에서 자란 농산물을 먹는다. 정부가 지난해부터 10년 계획으로 건축된 지 30년이 넘은 농어촌 슬레이트 건축물 34만동을 철거하기 시작한 가장 큰 이유다.

새마을 운동 당시 기와집에 사는 부자들이 아닌 서민들이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것처럼 현재 교체대상 농가 대부분은 독거노인 등 저소득층이 살고 있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철거 비용의 60% 정도를 지원해주고 있지만 새로 얹을 지붕에 들어가는 비용은 본인 몫이다. 부흥리 민원봉사실 양문효(50) 실장은 "슬레이트 ㎡당 철거비용은 약 2만원으로 120㎡ 농가의 슬레이트 지붕을 철거하고 새로 지붕을 얹는 데 대략 1000만원 가까이 든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정부가 관련 예산을 대폭 늘릴 형편도 아니다보니 철거 속도는 지지부진하다. 지난해 전국적으로 약 1만동의 슬레이트 지붕이 철거됐을 뿐이다.

이런 상황을 잘 아는 이동필 농축산부 장관은 슬레이트 지붕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국민적 운동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농축산부는 슬레이트 지붕 철거 사업을 농촌마을 가꾸기 사업과 병행 추진할 계획이다. 새마을 운동 때처럼 마을 주민과 자원봉사자가 힘을 합쳐 '슬레이트 없는 마을'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달 초에 이채필 할머니 집의 슬레이트 지붕을 바꾸는 작업에 이 장관과 대학생 자원봉사자, 마을주민이 참여할 예정이다. 영화 '괴물'의 마지막 장면처럼 괴물은 피하지 말고 맞서서 이겨내야 한다.

괴산=이성규 기자 zhibag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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