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의 기부 천사는 분홍 마스크를 썼다

2012. 10. 19. 03:13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30분 간격 주민센터-구청 들러 1500만원 건네고 황급히 떠나

[동아일보]

16일 낮 12시 반경 광주 남구 양림동 주민센터. 가을 햇살을 받으며 분홍색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40대 초반의 여성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155cm 정도의 키에 푸른색 셔츠와 검정 바지를 입은 이 여성은 잠시 주위를 살피다 안내 데스크에 놓인 민원인용 봉투를 집어 들었다. 가방에서 묵직한 현금 다발을 꺼내 봉투에 넣은 그녀는 민원 업무를 보는 김문옥 씨(32·여·8급)에게 다가와 쑥스러운 표정으로 봉투를 내밀었다.

"적은 돈이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운 어린이들을 위해 써주세요." 김 씨가 "누구신지 말씀해 주세요. 혹시 양림동 사세요?"라고 묻자 이 여성은 "예, 예"라며 황급히 나갔다. 자리를 피하려고 한 대답일 뿐 실제 양림동 주민은 아닌 듯했다. 김 씨가 배웅하려고 일어서자 이 여성은 주차장에 세워둔 은회색 마티즈 승용차를 타고 사라졌다. 봉투에는 400만 원이 들어있었다. 김 씨는 "승용차 번호라도 확인했으면 좋았을 텐데 경황이 없어 그러지 못했다"며 아쉬워했다.

30분 뒤 광주 동구청에도 이 여성이 나타났다. 이번에는 마스크에다 선캡까지 썼다. 그는 복지사업과 사무실 앞에서 한동안 서성거렸다. 직원이 "무슨 일로 오셨느냐"고 묻자 출입문 밖에서 "결식아동이나 혼자 사는 노인을 돕고 싶다"며 가방에서 흰 봉투를 꺼내 건넸다. 직원이 "영수증 처리를 하려면 인적사항이 필요하니 알려 달라"고 했지만 "외부에 알리지 말아 달라. 좋은 일에만 써 달라"는 말만 남기고 청사를 빠져나갔다. 이 봉투에는 5만 원권 지폐와 수표 묶음 등 1100만 원이 들어 있었다.

남구와 동구는 이 여성이 다녀간 뒤 '미담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동일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동구에서 아동 업무를 보는 박유진 씨(31·여·8급)는 "점심시간 직후 민원인으로 북적이자 사무실로 들어오지 못하신 것 같다"며 "남에게 알려지는 것을 극구 꺼리는 그분의 뜻에 따라 누구인지 알아보지 않기로 했다"고 말했다. 양림동 주민센터와 동구는 '분홍 마스크 천사'가 건넨 성금을 17일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기탁했다.

광주=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오늘의 동아일보][☞동아닷컴 Top기사]

ⓒ 동아일보 & donga.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동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