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노조하기 힘든 나라

정원식 기자 2012. 6. 23.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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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에서 '바리깡'을 들고 출근하는 노동자들의 머리를 검사해서 목과 귀를 조금이라도 덮으면 가차없이 그 자리에서 밀어버렸다. 머리에 흉한 '고속도로'가 난 채로 일하다 점심시간에 짬을 내 이발을 해야 했다. (중략) 말로는 날마다 '우리는 한가족'이라고 하면서 회사는 '가족'인 노동자들의 머리를 강제로 깎고, 정해진 작업복에 안전화로 군인을 만들어서 출퇴근을 시켰다. 이건 '가족'이 아니라 '군대'였다.

이갑용 전 민주노총 위원장이 < 길은 복잡하지 않다 > 에서 소묘한 1980년대 중반 현대중공업의 출근길 풍경이다. 책에서 그는 당시 노동자들이 "짐승처럼 일했다. 그리고 짐승 취급을 받았다"고 말한다. 30년 가까이 지난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풍경이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은 '작업장 민주화'를 이뤄냈다. 단결된 조직노동의 힘은 노동자들의 임금조건과 근로조건을 크게 개선했다.

군대식 노사문화는 거의 사라졌다. 그러나 그 자리에 새로 들어선 것은 냉혹한 자본의 논리다. 지난 1월 30일 서울 혜화동 재능교육 본사 앞에서는 한 무리의 노동자들이 '희망뚜벅이'라는 이름으로 12박 13일 동안의 행진을 시작했다. 행진에 참여한 코오롱, 대우자판, 콜트·콜텍, KEC, 재능교육, 풍산마이크로텍, 한국쓰리엠, 기아자동차 사내하청,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노동자, 세종호텔, 충남 유성기업 등의 노동자들은 구조조정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정리해고나 노동법의 사각지대에 갇혀 직장을 잃은 사람들이다. 군대식 노사관계이건 자본에 의한 구조조정이건, 한국의 노사관계가 여전히 사측에 일방적으로 유리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그러나 상급단체인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등 양대 노총은 문제 해결에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노조 조직률 2010년 기준 9.8%

노동운동의 힘은 왜 이렇게 약해졌을까. 노동운동의 쇠약한 힘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지표가 있다. 노조 조직률이다. 노조의 힘은 일차적으로 사용자들에 비해 압도적인 '머릿수'에서 나온다. 조직률이 노동운동의 힘을 측정하는 주요 지표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런데 이 조직률이 노동운동의 존재 의의를 위협하는 수준으로까지 떨어졌다. 지난해 11월 고용노동부는 노조 조직률이 2010년 기준으로 한 자릿수(9.8%)로 떨어졌다고 발표했다. 노조 조직률은 노동자 대투쟁 직후인 1989년 19.8%까지 올랐지만 2000년 12%로 떨어졌고, 2004년 이후로는 10.3% 언저리를 맴돌고 있다. 10명 중 1명만이 노동조합에 가입돼 있는 상황이 이미 8년 전부터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북유럽 국가들은 최소 30%에서 최고 90%의 조직률을 보인다. 일본은 18%, 대만은 37%에 가깝다. 신자유주의 체제의 중심부이자 노동계급을 대표하는 정당이 없는 미국도 한국보다는 높은 12%다. 프랑스는 노조 조직률은 한국보다 낮지만 단체협약 적용률이 90%를 넘기 때문에 낮은 조직률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이러한 하락 추세가 완화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러 가지 변수를 고려하면 '10명 중 1명'의 상태를 벗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노동운동의 활력이 바닥에 도달한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조직률이 낮아졌다는 것은 분자에 해당하는 '조합에 가입된 노동자의 수'보다 '조직 대상 임금근로자'의 수가 더 큰 폭으로 늘었다는 얘기다. 노조 가입 대상이지만 노조에 가입하지 않았거나 가입하지 못한 노동자들의 규모가 훨씬 커진 것이다. 원인은 복합적이다.

조합원 500인 이상 대기업 노조 조합원들이 전체 조합원 수의 78.3%(130만5000여명)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대기업 부문에서는 조합원이 더 늘어날 여지가 별로 없다. 황덕순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원은 "대기업 공공부문 제조업 부문에서는 이미 조직률이 높고 고용이 더 늘어날 여지도 적기 때문에 더 올라갈 가능성이 작다"고 말했다. 30인 미만 사업장의 노조 조직률은 0.2%에 불과하다.

반면 비정규직은 급증했다. 2011년 기준 비정규직 비중은 통계청 기준으로는 임금근로자(1751만) 중 34.2%(599만5000명)이다. 노동계 기준으로는 828만명으로, 전체 임금근로자의 절반에 육박한다. 그러나 비정규직 조직률은 2004년 이후 4~5%대에서 2008년 이후에는 2%대로 급락했다.

한국 노동운동은 1987년 노동자 대투쟁으로 '작업장 민주화'를 이뤄냈지만 2010년 노조 조직률이 한 자릿수로까지 떨어지면서 비정규직·정리해고 문제에 대응하는 데 한계를 보이고 있다. 사진은 지난 16일 여의도 공원에서 열린 '6·16 희망과 연대의 날. 함께 걷자, 함께 살자, 함께 웃자' 행사에서 함께 걷고 있는 시민, 국회의원, 시민단체 관계자들./정지윤 기자

비정규직 노조조직률은 2%대로 급락

법적·제도적 걸림돌도 존재한다. 법과 제도가 없지는 않다. 문제는 시행상의 형평성이다. 현재 부당노동행위와 부당해고 관련 구제신청을 판정하는 권한은 노동위원회에 있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등이 지난 5월 발표한 조사에 따르면, 부당해고 구제신청에 대한 인정률은 2008년 이후 30%대로 내려갔다. 10건 중 3건에 대해서만 부당해고라고 인정한 것이다. 반면 부당노동행위 인정률은 2007년 44.4%, 2008년 15.4%였다가 지난해에는 3.5%로 급감했다. "부당노동행위를 규제하는 규정이 노동법에 있지만 부당노동행위를 입증해야 하는 책임이 근로자에게 있고, 입증 책임도 엄격하게 해석한다. 주변 동료들의 진술이 잘 채택되지도 않는다. 또한 그러한 사업장일수록 동료들이 진술하기 힘든 분위기도 있다." 권영국 변호사(민변 노동위원장)의 말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부당노동행위를 하더라도 처벌받지 않는다는 인식이 사용자들 사이에 퍼질 수밖에 없다."

노동문제에 대한 정부와 사용차 측의 인식이 미흡하거나 적대적이라는 것은 교과서만 봐도 분명하다. 지난 3월 < 오마이뉴스 > 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2012년 1학기 시중에 출판된 사회과목 교과서 62권 중 총 1만7260쪽 가운데 노동 관련 내용은 159쪽으로 1% 미만에 불과했다. 시장경제에서 자본과 기업이 차지하는 역할을 다룬 부분은 4%가량이었다. 재계를 대변하는 전경련은 지난 2008년 "기존 교과서가 시장경제와 기업에 대해 과도하게 편향된 시각"을 갖고 있다며 재계 논리를 강조한 중학교 사회과목 교과서를 발간할 계획이라고 발표해 논란을 빚기도 했다.

비정규직의 경우에는 고용조건 자체가 노조 설립과 가입을 가로막는 장벽으로 작용한다. 이남신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은 "일단은 먹고 살기가 힘들어서 그렇다"고 말했다. "정규직은 고용이 보장돼 있고 일방적 해고가 어렵게 돼 있지만 비정규직은 대단히 불리한 입지에서 출발해야 하고 희생에 비해 성과가 미미하다. 먹고 살기 힘들고 조합을 만들었을 경우 이익보다 희생이 큰데 비정규직이 노조에 가입할 리가 없다. 노동 기본권에 대한 교육을 받을 기회가 적어 노조에 대한 인식도 열악하다. 결국 비정규직 중에서도 조직화된 부분은 임금소득이 높은 대공장 사내하청이나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도다. 정말 최저임금 수준의 비정규직은 미조직 상태로 방치돼 있다." 통계상으로 최저임금 수준 근로자의 43%가 4인 이하 사업장에서 일하는데, 그 중 85%가량은 비정규직이다.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제도적 역량은 산업별 교섭 체계를 강화하는 것뿐인데, 이마저도 쉽지 않다. 임영일 한국노동연구소 소장은 "산별노조 수준의 교섭을 통해 미조직 비정규직의 권리를 보호해야 하는데 우리는 산별 체제로의 전환이 너무 늦었다. 금속노조 부문 같은 경우는 1998년 이전에 전환했어야 하는데 2006년에야 모양이 갖춰졌다. 현재는 형식만 산별노조일 뿐 개별 기업 단위로 교섭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7월 1일부터 시행된 복수노조는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지난해 대표적 쟁의 사업장이었던 구미 KEC, 부산 한진중공업, 유성기업 등은 복수노조 시행으로 홍역을 앓고 있다. 전국에서 복수노조가 가장 먼저 생긴 KEC의 경우, 민노총 KEC지회와 사측의 지원을 받는 KEC노조 사이에 교섭권을 확정하는 문제로 소송을 거치고 있다. 1심에서는 교섭권이 KEC지회에 있다고 봤지만 2심에서는 반대의 판결이 나와 대법원까지 가야 하는 상황이다. 충남 유성기업에서는 지난해 출범한 새노조가 지난 2월 과반을 넘겨 교섭권을 갖게 됐다. 그러나 새노조가 교섭권을 갖게 되면서 노조의 권한은 크게 축소될 것으로 보인다. 최근 대전CBS가 보도한 '단체협약 갱신 회사 요구안'은 노조활동 시간 축소와 활동 전 회사 승인 조항을 명시하고 있다. 정리해고 철회의 성공사례로 평가됐던 한진중공업도 대다수 조합원이 기존의 민노총 한진중공업 지회에서 새노조로 이탈해, 교섭권은 아직 한진중 지회가 갖고 있지만 교섭은 사실상 중단된 상태다.

"정부와 사용자 협공에 궁지 몰려"

2010년 5월 31일 동덕여대 본관에서 대학 청소노동자들이 고용승계를 요구하며 함성을 외치고 있다. 전문가들은 비정규직이 급증한 것이 노조 조직률이 하락한 중요한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정지윤 기자

조직화된 노동운동이 주체적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면서 노동운동의 활력은 소진되고 있다. 이남신 소장은 "사실상 무노조 사회로 가는 것이 아닌지 우려스럽다"며 "노사관계에 대한 정부와 사용자의 왜곡된 인식이 조직률을 낮추고 우리 사회에서 노동을 배제하는 분위기를 확산하는 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정부와 사용자의 협공에 의해 궁지에 몰려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임영일 소장은 "노동운동의 주체적 힘으로 조직률을 올려야 하는데 산별노조의 힘이 없는 상황에서 핵심 부문에서 빠른 속도로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다"며 "거의 바닥이다. 지금보다 조직률이 몇 퍼센트 더 떨어지든 더 올라가든 의미가 없다. 이미 노동운동의 사회적 영향력이나 노동현안에 대한 대응력이 취약해질 대로 취약해져 있다"고 말했다.

한 가닥 희망을 보는 이들도 있다. 황덕순 연구원은 전망이 매우 어둡다면서도 변화의 조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정부나 사용자의 인식은 그대로지만, 노동운동을 보는 국민들의 정서에 변화가 있다. 지난해 희망버스가 움직이면서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가 철회되지 않았나. 국민들의 커다란 정서적 변화가 저변에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민노총 KEC 지회를 지원해온 민노총 구미지부 배태선 사무국장은 "노동의 위기는 그동안 민주노조 운동이 임금과 근로조건 등 실리적인 부분만 챙기면서 노동자들의 불만과 요구를 조직하는 대신 오히려 잠재우는 방식으로 활동해온 결과"라며 "지역의 경우에는 오히려 조합을 만들겠다고 문의하는 이들의 비중이 늘었다. 그만큼 노동자들의 불만이 임계점에 도달했다는 거다"라고 말했다.

잘 조직되고 강력한 노동운동 조직은 노동자에게만이 아니라 자본이나 국가 전체를 위해서도 필요하다. 이병훈 교수의 말이다. "중요한 것은 노조가 자본주의의 안전판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노조가 있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불만이 제도내적으로 해소될 수 있다. 반대로 노조가 취약해지면 그 불만이 현 체제가 수용할 수 없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폭발할 수 있다." 우리 사회가 어떤 이유로든 무노조에 가까운 상태로 가는 것을 막아야 하는 이유다.

<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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