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돈 한 푼 없어 .. 1만원만 주시옵기를" 독립투사 후손의 곤궁한 삶 드러나

송의호 2015. 8. 15. 0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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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서왈보 아들이 신익희에게 쓴 편지
서왈보의 아들 서진동이 1953년 신익희 국회의장과 비서 앞으로 보낸 편지. 왼쪽 위는 서왈보의 생전 모습. [프리랜서 공정식], [사진 공군역사기록관리단]

광복 70주년을 12일 앞둔 지난 3일 인터넷 고서 경매에 편지 한 통이 올라왔다. 1953년에 쓰여진 편지였다. 수신인은 신익희(申翼熙·1894~1956) 당시 국회의장이었고, 발신인은 봉투 뒷면에 ‘독립운동자 고 서왈보(徐曰甫)의 유자(遺子) 진동(振東)’이라고 붓으로 적혀 있었다. 발신지는 ‘부산 초읍동 603번지 신애원(信愛院)’이었다. 신애원은 51년 장애를 입은 전쟁 고아를 보호하는 시설로 개원했으며 현재도 장애인 복지시설로 운영되고 있다.

 봉투 안에는 편지 두 장이 들어 있었다. 한 장은 국회의장 앞으로, 또 한 장은 국회의장 비서에게 보내는 내용이다. 서왈보가 대체 누구이길래 그의 아들이 국회의장 앞으로 편지를 쓴 것일까.

 일제 강점기의 소문을 정리한 책인 『기로수필』과 여기저기 전하는 기록을 종합하면 서왈보(1886~1926)는 해외 독립운동가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사였다. 함경남도 원산 출신으로 평양 대성학교에서 수학하고 도산 안창호 등과 함께 시베리아로 건너가 사관학교를 설립, 젊은 독립투사를 양성했다. 3·1운동 뒤 망명한 애국지사들과 함께 남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그 뒤 베이징 육군항공학교에 들어가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사가 됐다. 불행히도 1926년 베이징을 방문한 이탈리아 비행사의 비행기를 시승하다 추락해 사망했다.

 홍선표(57)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학술연구팀장은 서왈보의 업적을 두 가지로 요약한다. 하나는 무장 독립운동단체인 김원봉의 의열단에 가입하고 항공을 통해 항일전쟁 의지를 불태운 독립운동이다. 또 하나는 한국 공군 창설의 주역이자 제2대 공군참모총장을 지낸 최용덕을 중국 항공 장교로 성장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점이다.

 서왈보의 아들이 국회의장 앞으로 쓴 편지는 서툰 중국 문어체(백화문·白話文)다. 내용은 기구하다.

 ‘큰아버지 아룁니다…지난해 큰아버지가 부산에 오셔서 도와주셨으면 했던 것은 오로지 이 못난 조카의 취직 문제였습니다. 후회스럽습니다. 조카는 사는 것이 너무 어려워 스스로 일어서려고 1년 동안 마음을 다해 도장 새기는 기술을 익혔습니다. 스스로 살아가는 길을 찾아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돈 한 푼 없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저에게 1만원을 주시옵기를 피눈물로 간절히 바라옵니다. ’

 장애인으로 시설에 몸담은 서진동은 자립해보려고 몸부림을 쳤던 모양이다. 그러다가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며 아버지와 관계가 두터웠던 신익희 국회의장을 떠올렸다. 신 의장과 서왈보는 ‘형님·동생’하는 사이였다. 혈연관계가 아님에도 ‘큰아버지’란 호칭을 쓴 이유다. 그런 국회의장에게 처음에는 취직을 부탁하고 그게 여의치 않자 다시 도장 새기는 기술을 배운 다음 가게를 열 자금 1만원을 요청한 것이다. 독립운동가 후손의 곤궁한 삶이 그대로 묻어난다.

 서진동은 국회의장 비서 앞으로도 국한문 혼용 편지 한 통을 동봉했다. 거기엔 자신이 광복 뒤 충칭(重慶)에서 귀국했고 불행히도 불구의 몸이 됐다고 적었다. 또 국회의장과 자신의 아버지는 형님·동생 하는 사이였다며 말씀을 잘 전해 달라고 덧붙였다.

 서왈보는 1910년 중국으로 떠나기 전 가족으로 부인 이화실과 딸 인숙이 있었다. 1923년 베이징에서 재회한 가족은 그곳에서 아들 둘을 얻었다. 편지를 쓴 서진동이 서왈보의 2남1녀 중 몇 번째인지는 알 수 없다.

 서진동의 이후 소식은 모른다. 국가보훈처는 여태 서왈보의 다른 후손 역시 찾지 못했다. 보훈처는 90년 서왈보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주기로 했지만 이런 이유로 유족에게 수여하지 못했다. 조원경(58) 나라얼연구소 이사장은 “잊어버려선 안 될 애국자를 잊어버리는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며 “그 후손을 찾아내 고단한 삶을 돌보는 것은 남은 자에게 주어진 최소한의 의무”라고 말했다.

대구=송의호 기자 yee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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