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가 낮은 나라일수록 더 비싸다? 구매력지수의 착시현상

이정환 기자, black@mediatoday.co.kr 입력 2008. 5. 26. 12:09 수정 2008. 5. 26.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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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소비자원의 반론에 대한 재반론

[미디어오늘 이정환 기자]

21일자 미디어오늘 "엉터리 통계로 끌어낸 세계에서 가장 비싼 물가" 기사에 대해 한국소비자원이 반론을 보내왔습니다. 이에 소비자원의 반론 전문을 게재하고 이정환 기자의 재반론을 별도 기사로 싣습니다.

미디어오늘 온라인판 21일자 기사 "엉터리 통계로 끌어낸 세계에서 가장 비싼 물가"에 대해 한국소비자원이 해명 자료를 보내왔습니다. 소득수준과 구매력지수의 개념을 혼용한 부분과 그 밖에 일부 표현의 오류를 지적해 주셨습니다. 논점은 구매력지수를 적용해 커피와 골프장 그린피, 수입 맥주, 수입 화장품 등 특정 제품의 가격을 상대 비교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가 하는 부분인데요.

소비자원은 "구매력지수로 환산해서 특정품목이 우리나라에서 비싸다는 것은 다른 나라에 비해 더 많은 물건을 살 수 있는 돈으로 더 적거나 작은 물건을 구매하였음을 의미하므로 해당 품목이 다른 나라에 비해 비싸다는 표현은 타당할 뿐 아니라 의미도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소비자원의 주장은 여전히 오류가 있습니다.

구매력지수는 말 그대로 나라마다 다른 구매력과 물가수준을 비교하기 위한 지표입니다. 구매력지수와 이를 반영한 나라별 물가지수는 아래 표와 같습니다.

▲ 나라별 구매력지수와 상대 물가. ⓒOECD.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30개국 평균을 100으로 할 경우 우리나라의 구매력 환산 물가수준은 76으로 비교 대상인 G7 나라들 가운데 가장 낮습니다. 영국의 물가수준은 124인데 이 말은 곧 우리나라에서 비교 대상 품목의 물가수준이 영국의 61.3%(=76/124) 수준임을 의미합니다. 우리나라의 물가가 그만큼 낮기 때문에 같은 1만원이라도 1.5배 이상 더 많은 물건을 살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 맥주 가격 비교. 버드오이저 캔 맥주, 평균 환율 기준. 단위 : 원.

그런데 이번 소비자원 조사에 따르면 버드와이저 캔 맥주는 우리나라에서 1500원인데 영국에서는 2130원(1.07파운드)입니다. 여기에 구매력지수 749와 0.656을 곱하면 버드와이저 캔 맥주의 구매력 환산 가격은 우리나라에서 2.00달러, 영국에서 1.64달러가 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2달러(2009원)를 줘야 맥주 한 캔을 살 수 있는데 영국에서는 1.64달러(1641원)만 줘도 살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되는데요. 어떻게 이런 이상한 결론이 나오는 것일까요?

애초에 기본 전제가 잘못돼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서 1500원(1.5달러)짜리가 구매력지수로 환산해서 2009원(2달러)이 된다는 것은 미국에서 2달러를 주고 사야 하는 제품을 우리나라에서는 1.5달러만 주고도 살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나라의 물가가 미국의 70.9%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영국에서 2130원(2.03달러)짜리가 구매력 환산 가격으로 1641원(1.64달러)짜리가 된다는 것은 미국에서 1.64달러면 살 수 있는 제품을 영국에서는 2.03달러를 주고 사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영국의 물가는 미국의 123% 수준입니다.

그런데 두 나라의 맥주 가격을 비교하는데 이처럼 각각의 물가수준을 반영해 가격을 조정하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이런 논리대로라면 영국에서 맥주 가격이 평균환율 기준으로 1.07파운드(=2.12달러=2130원)일 때 우리나라에서는 1225원(=1.22달러)이 돼야 상대적으로 영국과 비슷한 가격 수준이 됩니다. 애초에 우리나라는 물가수준이 낮기 때문에 그만큼 개별 제품가격도 낮아야 한다는 전제를 깔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국에서는 맥주 한 캔이 2130원인데 우리나라에서는 1225원만 넘으면 영국보다 비싸다는 결론이 나오게 됩니다.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도 마찬가지입니다.

▲ 소득과 구매력지수의 상관관계. 막대 그래프가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고 선 그래프가 구매력 환산 물가 수준이다. 각각 OECD 평균을 100으로 한 상대수치다. ⓒOECD.

소득수준과 구매력은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없지만 위 그래프에서 보듯이 소득수준이 높을수록 물가수준이 높은 경향을 보입니다. 가난한 나라일수록 물가수준이 낮고 역설적으로 구매력 환산 가격은 상대적으로 높게 됩니다.

평균환율 기준으로 제품 가격이 같더라도 구매력 환산 가격은 G7 나라들보다 우리나라에서 훨씬 더 비싸게 됩니다. 애초에 우리나라의 물가는 OECD 평균의 76% 수준이라는 가정을 깔고 있기 때문에 평균환율로 같은 가격이라도 구매력 환산 환율로는 우리나라가 31.6%나 더 비싸게 됩니다. 버드와이저 캔 맥주처럼 평균환율 기준으로는 우리나라에서 훨씬 더 싼데도 구매력 환산 가격으로는 우리나라가 더 비싸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겨날까요? OECD는 "구매력지수가 나라별 국내총생산(GDP)이나 경제적 여유 정도 등을 상대 비교하고 특정 통화의 과대 또는 과소 평가 여부를 산출하는 데 유용하지만 개별 제품의 가격 수준을 비교하는데는 적절치 않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OECD는 "일반적으로 한 나라의 소비 패턴을 대표하지 않은 제품들 가격은 일반적인 제품들 가격보다 상대적으로 더 비싸게 나타나는 경향을 보인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 화장품 가격 상대 비교.

샤넬 립스틱 같은 경우가 좋은 사례가 될 것입니다. 위 그래프는 평균환율 기준 가격(파란색)과 구매력 환산 환율 기준 가격(빨간색)을 우리나라를 100으로 놓고 상대 비교한 것입니다. OECD 이외의 나라들은 세계은행 추산 구매력지수를 대입해 계산했습니다. 절대 가격은 이탈리아나 독일이 더 높은데 구매력 환산 가격은 중국이 훨씬 높게 나타납니다. 중국의 물가는 구매력 기준으로 미국의 42% 수준입니다.

우리나라 역시 일본이나 캐나다, 영국 등과 절대 가격은 거의 같지만 상대 가격은 훨씬 높게 나타납니다. 물가가 G7 나라들의 절반 수준인 싱가포르나 대만 등은 절대가격으로도 더 싸게 파는데 구매력 환산 가격은 오히려 더 비싸게 됩니다.

자, 과연 이런 비교 결과를 놓고 샤넬이 가난한 나라에 립스틱을 더 비싸게 판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이런 식의 비교가 전혀 의미가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에티오피아의 물가 수준은 구매력 기준으로 미국의 26% 수준입니다. 샤넬 립스틱이 미국보다 에티오피아에서 4배나 비싸게 팔린다고 할 수 있을까요? 물론 소득이 낮은 나라일수록 구매력과 물가 수준을 감안하면 더 부담스러운 가격이고 사치재가 되는 것은 맞습니다. 같은 가격이라도 영국 사람들보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더 비싸고 중국 사람들에게 더 비싸고 에티오피아 사람들에게는 더더욱 비쌀 것입니다.

다만 이번 소비자원 조사의 문제는 G7 나라들만 비교 대상으로 정한데다 애초에 이들 나라와 비교해서 우리나라가 구매력 기준으로 가장 비쌀 수 밖에 없는 품목을 고른탓에 우리나라 물가가 세계에서 가장 비싸다는 전혀 엉뚱한 결론을 끌어낸데 있습니다. 물론 소비자원의 당초 조사 의도가 아니었을 수도 있습니다. 언론이 제목으로 뽑기에는 구매력 기준이든 뭐든 "한국 물가 세계 최고"라고 쓰는 쪽이 훨씬 '섹시'했겠지요.

구매력지수는 비교역적인 재화나 서비스의 가격 차이와 나라별 특성을 반영하지 못합니다. 이를테면 점심 한 끼의 가격이나 버스 요금, 세탁비, 공사장 인부의 임금 등은 나라마다 다르기 마련이고 이런 비교역적 재화나 서비스가 많은 경제 시스템일수록 구매력지수와 실제 화폐의 구매력에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관세나 무역장벽, 운송비, 세금 등이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는 것도 구매력지수의 중요한 한계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전체 소득수준이나 물가수준에 비춰볼 때 단순 노동의 인건비나 농산물의 가격은 상대적으로 싼 편이고 버드와이저 캔 맥주나 샤넬 립스틱은 상대적으로 비싼 편입니다. 교역적이나 비교역적이냐의 차이일 텐데요. 소득수준이 낮을수록 교역적 재화나 서비스의 가격이 상대적으로 비싼 반면, 소득수준이 올라가면 비교역적 재화나 서비스의 가격도 올라가는 경향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많은 독자분들이 그래도 우리나라 물가가 비싼 건 사실 아니냐고 지적해주셨는데 기사의 핵심은 물가가 싼가 비싼가를 따지기 이전에 애초에 비교 방법이 잘못돼 있고 그 결과 물가 수준이 턱없이 부풀려졌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언론이 평균 환율을 적용한 결과 보다는 구매력 환산 환율을 적용한 결과를 인용해 "우리나라 물가가 세계 최고"라는 성급한 결론을 포장하기에 바쁜 모습이었습니다.

최근 논란이 됐던, 우리나라 교사 연봉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기사 보셨을 겁니다. 역시 구매력지수를 적용해 수치를 부풀린 경우였는데요. 필요에 따라 GDP 대비 비중을 놓고 비교하거나 매출액 대비 비중을 놓고 비교하거나 입맛대로 적당한 지표를 적용해서 기사가 될 만한 통계를 만들어내는 관행은 사라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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