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에 공개할 수 없었던 소름 끼치는 제보

도준우 SBS PD 2016. 1. 9.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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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현장] 도준우 SBS '그것이 알고 싶다' PD

[미디어오늘 도준우 SBS PD]

추석을 며칠 앞둔 9월의 어느 날, 피디들 사이에서 ‘오반장’이라고 불리는 오유경 작가가 신문기사 두 개를 건넸다. “두 사건 비슷하지 않아?” 하나는 익히 알고 있던 ‘노들길 살인사건’이었고, 다른 하나는 ‘신정동 연쇄 살인사건’이라는, 좀 낯선 사건이었다. 마침 그날, 서울경찰청 형사들과 점심약속이 있었고, 또 마침 거기엔 두 사건을 수사한 적 있는 형사가 함께 자리했다.

식사 후 커피를 마시며 슬쩍 물었다. “두 사건, 동일범일까요?” 그런데 잠시 후 생각지 못한 대답이 돌아왔다. “신정동 사건 하시게유? 그거 미수 건이 하나 있는디. 잡혀갔다가 도망친 여자가 있어유.” 연쇄살인범에게서 탈출한 생존자가 있다… 영화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였다.

형사는 이어서 얘기했다. “그 여자가 그걸 기억하더라구유. 엽기토끼 스티커가 붙은 신발장. 근디 문제는 더 이상 우리한테 협조를 안 해주는 거예유.”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는 형사의 표정에선 진한 아쉬움과 약간의 원망이 묻어났다. 그 순간 하나의 질문이 떠올랐다. ‘우리 프로그램을 통해 해결된 미제 사건이 있었던가?’ 그동안 수많은 미제 사건을 다뤄왔지만 막상 범인을 잡은 사건은 금방 기억나지 않았다. 그런데 왠지 이 사건은 그 생존자만 만나면 범인을 잡을 수도 있겠다는 막연한 기대와 희망 같은 것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연쇄살인마에게서 탈출한 생존자. 그녀에게 접근하는 과정은 그 어느 때보다 고민스럽고, 또 조심스러웠다. 그녀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우리 전화를 받고 잠적해버릴까? 다시는 전화하지 말라며 소리를 지를까? 이런 저런 걱정을 안은 채 전화기를 들었고 예상대로 그녀는 우리와의 만남을 거부했다. 두 차례 더 전화를 걸어 설득했지만, 돌아오는 답은 같았다. 그만 포기할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그녀가 통화 중에 했던 말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 “범인이 꼭 잡히면 좋겠어요.”

고심 끝에 그녀를 찾아간 건 방송을 불과 3∼4일 앞두고서였다. 보기 좋게 문전박대를 당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전화를 걸었다. 현관문을 사이에 둔 장시간의 통화 끝에, 드디어 그녀가 마음을 열었다. (사실, 통화 내용은 이전의 통화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현관문 밖에 서서 전화로 얘기하는 내 모습이 안쓰러웠나보다.)

잠시 후 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여전히 우리를 경계하는 눈빛이었지만 그녀에게선 씩씩함, 그리고 속된 말로 깡다구 같은 것이 느껴졌다. 10분만 시간을 내어주겠다고 했던 그녀는 기억의 먼 가장자리에 오래도록 묻어 놓았을 그날의 기억을 벌벌 떨면서, 혹은 펑펑 울면서 하나둘 끄집어냈고, 결국 두 시간에 걸쳐 자신이 겪은 일들을 모두 털어놓았다. 그녀는 인터뷰가 끝난 뒤 내게 두 가지를 부탁했다. 꼭 범인을 잡아 달라. 그리고 다시는 연락하지 말아 달라.

방송이 나간 지 벌써 두 달 반째. 범인과 범인의 집을 추측하는 글로 도배됐던 게시판은 어느새 ‘소라넷’에 대한 글로 재도배됐고, 아직 그녀의 부탁 중 하나는 들어주지 못한 상태다. 하지만 그 사이 양천경찰서는 전담반을 꾸렸고, 담당 형사는 목숨 걸고 범인을 잡아보겠다며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신정동 주택을 하나도 빠짐없이 확인하라는 서장의 특별지시도 있었단다. 게다가 우리를 소름 돋게 했던, 혹은 만세를 부르게 했던 기가 막힌 제보들도 몇 들어왔다.

 
 
▲ 도준우 SBS PD
 

후속편에서 진전된 수사 결과를 보여주지 못해 실망한 분들이 적잖이 계실 텐데, 사실 경찰에서 수사 중인 유력한 제보들은 방송에 공개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수사에 방해가 될까 걱정됐기 때문이다. 언젠가 이 모든 걸 속 시원히 보여줄 수 있는 날이 올 거라 믿는다. 많은 분들이 보내준 소중한 제보가 좋은 결과로 이어져 ‘엽기토끼와 신발장’ 세 번째 편을 만드는 그 날이 오기를 늘 고대하고 있다. (팀장님도 범인 잡기 전엔 ‘그알’ 나갈 생각 하지 말라고 했다. 나도 목숨 걸고 잡아야한다.)

마지막으로, 신정동에서 노들길까지 함께 달려준 오유경 작가, 서울경찰청 형사들과의 점심 자리에 끼워준 배정훈 피디, 그리고 용기 내어 힘든 결정을 해주신 생존자 분께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아참, 혹시라도 이 글을 보고 있을지 모를 범인에게도 한 마디 전해야겠다. “곧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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