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 'NLL 포기 억지주장' 부추긴 언론

2013. 7. 4.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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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미디어 전망대

정치인들의 '억지'를 우리는 신물이 나게 겪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느끼는 '정치 혐오증'은 누가 봐도 뻔한 일을 그렇지 않다고 우기는 정치인들의 억지 때문인 경우가 많다. 그 전형적인 사례를 지난 대선 당시 불거져 아직도 가라앉지 않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엔엘엘(NLL) 포기 발언' 논란에서 볼 수 있다.

노 대통령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발췌본'이 국정원을 통해 일부 새누리당 의원 쪽으로 흘러들어갔다. 새누리당이 이를 정략적으로 이용하여 노 전 대통령이 '엔엘엘 포기 발언'을 했다고 선전한 것은 지난 대선 때의 일이다. 국정원은 자신의 대선 불법 개입이 검찰 수사로 드러나자 대화록 '발췌본'과 '전문'을 공개함으로써 맞불을 질러, 국익보다는 자기 조직의 이익을 앞세웠다는 비난을 샀다.

남북 대화가 재개되면 북한은 엔엘엘 문제를 다시 거론할 것이다. 아무리 대통령 소속 정당이 달라졌다고 해도 이전 대통령이 북한에 한 약속은 존중되어야 하고, 약속을 파기할 경우에는 이에 따른 부담을 질 수밖에 없는 것이 국제 관례다. 따라서 노 전 대통령이 엔엘엘 포기 약속을 했다고 북한이 주장하고 나오더라도 그렇지 않다고 반박해야 하는 것이 여당이다. 그럼에도 새누리당이 정파적 이익에 매몰되어 전임 대통령이 '포기'했다고 스스로 주장한 것은 자승자박일 뿐이다.

새누리당의 자승자박은 엄연한 사실을 아니라고 우기는 억지에서 출발한다. 새누리당 의원들은 처음에 노 전 대통령이 "엔엘엘을 포기"한다는 발언을 했다고 주장했고, 며칠 전까지는 '포기 발언'이 있었느냐, 없었느냐가 쟁점이었다. 하지만 국정원이 대화록을 공개하고, 일부 언론이 대화록을 소개하면서 "포기 발언은 없었다"고 보도하자 그들은 "포기 취지의 발언을 했다"는 주장으로 바꿔 우긴다.

국정원이 공개한 대화록 '전문'은 물론이고, '발췌본'도 잘 읽어보면 노 전 대통령의 발언 취지가 엔엘엘을 '포기'하려는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따라서 '포기 취지'라고 우기는 새누리당 의원들이 웃음거리가 되는 것으로 논란이 간단히 끝나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그들의 억지 주장은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는데, 그것은 무엇 때문일까?

억지 주장이 생명을 유지하는 비결은 조선, 중앙, 동아 등 보수 신문들의 사실 왜곡 때문이다. 대화록은 노 전 대통령의 발언 취지가 '선 서해협력지대 설치-후 엔엘엘 문제 해결'에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조·중·동은 대화록 공개 기사 제목을 꼭 같이 '엔엘엘 바꿔야…난 위원장님과 인식 같아'라고 달았다. 대화록의 문장들을 거두절미하고 짜깁기하여, 노 전 대통령의 실제 발언 취지가 아니라 신문 자신의 관점을 반영하는 기사로 둔갑시킨 것이다.

한 시대의 흐름을 왜곡시키는 정치적 사건들은 정치인들만의 힘으로는 발생하기가 어렵다. 정치인들의 사실 왜곡을 부추기고, 이를 뒷받침해주는 언론의 협력이 필요한 것이다. '엔엘엘 포기' 논란은 일부 새누리당 의원들과 보수 언론이 합작하여 만들어낸 평지풍파다. 하지만 거대 발행 부수를 자랑하는 조·중·동의 집중 보도에도 불구하고, 한국갤럽의 여론조사에 국민의 다수가 노 전 대통령의 발언이 엔엘엘 포기가 아니라고 응답했다. 정치인과 언론의 합작으로 만들어낸 억지 주장은 결국 양쪽 모두에게 큰 상처를 입히는 것으로 끝날 것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성한표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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