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B 나의 좌충우돌 입사기] 박재훈 남동발전 사원 2

2012. 11. 9.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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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아무리 스스로 자랐다고 주장하더라도 지금의 저를 만든 것은 결국 제 부모님이고 제가 살아온 환경이고 제가 보고들은 지식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야기 할 주제는 저를 만든 가장 근본적인 재료들이 된 역사, 저의 유년시절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커다란 실뭉치를 어디서부터 풀어야 좋을지요. 역사에 관한 이야기는 그 중요성에 비해 자칫 가십거리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고, 또 미처 고려하지 못한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기에 언제나 조심스러운 주제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제가 있기까지의 역사에 관한 언급은 한마디도 없이 그저 지금에 와서 재평가하고 정리한 결과론적인 이야기들과 주장들만 늘어놓는다면 싸구려 자기개발서와 다를 것이 없겠지요. 이 이야기가 선행되고나면, 여러분들은 저의 잡다한 ㅡ하지만 그리 큰 쓸모는 없을지도 모르는ㅡ 무용담들 가운데 각자의 상황에 맞는 이야기들을 건져낼 수 있을 것이고, 또 제 이야기들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여겨지는 오해를 방지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 함께 이 커다란 실뭉치를 이리저리 돌려보고 살펴, 지금의 저를 빚어낸 사람과 사건, 지식이 어떤 것들인지 실마리를 찾아봅시다.

◆내 고향은 '강원도 태백 탄광촌'

강원도 태백의 탄광촌에서 출발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바로 제가 태어난 곳입니다. 누구나 쉽게 예상할 수 있듯이, 제가 태어났을 때 제 아버지는 광부셨습니다. 하지만 많은 이야기가 그렇듯 사연이 그리 간단치만은 않습니다. 아버지는 경남 진주를 통틀어 당대 손에 꼽는 부자집에서 장남으로 자라셨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원하는 것이라면 대부분 성취할 수 있었던 환경에서 자란 아버지는 대학졸업 후 집안의 사업을 확장하여 물려받고자 할아버지와 함께 대전으로 올라오시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대전 토박이인 저희 어머니를 만나 백년가약을 맺고, 얼마 되지 않아 첫째 아들을 출산하게 됩니다.

신혼시절 사진 속 영화배우 뺨치는 외모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보고 있자면, '그 미래의 행복을 누가 막을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그 행복을 막을 수 있는 누군가가 나타났습니다. 야심차게 시작한 사업이 부도를 당하게 된 것입니다. 인생 최초로 '실패'라는 것을 경험하신 아버지는 큰 충격 속에서도 처자식을 먹여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강원도 태백의 탄광촌에 들어가시게 됩니다.

이렇게 이것으로 모든 일이 마무리 되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하지만 아버지가 탄광촌에서 일을 시작한 이래 수년간 그 곳에서, 생채기에 후추뿌리 듯 첫째 아들이 죽고, 둘째인 제가 태어나고, 생후 1년도 되지 않은 제가 소아암으로 1주일 시한부 선고를 당하는 일들이 연이어 일어납니다. 어떤 작가가 쓴 비극이 이렇게 잔인할 수 있을까요. 그 이후 우리 가족의 역사는 오로지 '가난'과 그로인한 고통들로 점철되어 왔습니다.

무엇보다도 안타까운 점은, 우리가족이 평생을 통해 겪어낸 '가난'의 중심에 언제나 제가 서 있었다는 점입니다. 앞서 이야기 한 것 처럼 저는 생후 1년이 되기도 전에 소아암으로 1주일 시한부 선고를 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여러분이 저의 글을 읽고 있는 것이 증명하듯 저는 죽지 않고 살아남아 있습니다. 제가 대학병원에서의 시한부 선고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면하게 된 것은 어머니의 헌신적인 기도와 밤낮없이 약재를 구하러 다니신 아버지의 열성 때문이었고, 제가 시한부 선고를 받고도 죽지 않게 된 것은 정말 무엇으로도 비할 수가 없는 기쁨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 저에 관한 크고 작은 잦은 병치레와 수술들은 엄청난 비용을 동반하는 것이었고, 그 규모는 가정형편을 기울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 가족이 모여 옛날 이야기를 하다보면 농담처럼 '재훈이가 없었으면 우리가족, 서울에 아파트 한 두채는 있었을꺼야' 라는 말이 나올 정도죠.

◆소아암 1주일 시한부 선고

하지만 가난하다고해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부모님은 탄광촌에서의 검은 추억들을 종식시키고 자식들을 조금 더 좋은 환경에서 교육시키고자 여러 가지의 무리를 감수하며 상경(上京)을 결정하시게 됩니다. 물론 서울에서의 삶은 그야말로 '순탄치 않은 상황'의 연속이었습니다. 경남 출신의 아버지와 충청도 출신의 어머니가 친구·친척은 물론 재산이나 경력·기술 하나 없이 커다란 바다와 같은 서울 땅에 뛰어들어 살아남기를 도모하신 것이었기에 사실상 예정된 수순이었죠. 그렇게 시간이 흘러, 제가 다섯 살이 되던 해였던 것 같습니다. 수차례의 잦은 이사를 거친 우리 가족은 서울의 동대문구 청량리에 정착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이후 저는 풍족하지는 않지만 한자리에서 초중고의 유년생활을 보내는 서울 토박이로 자라게 됩니다.

이렇듯 제 삶의 시작은 마치 제가 태어난 곳의 특산물(?)인 '탄광촌의 석탄'처럼 어둡고 딱딱하며 궁핍합니다. 하지만 관성의 법칙은 제 인생을 관통하지 못했고, 저는 어둡고 퀴퀴한 탄광촌에서 태어난지 만 28년이 된 지금, 화력발전 회사에서 석탄을 태워 '빛'을 공급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과연 그 사이에 어떤 일들이 일어난 것일까요.

다음 회에서 더 이야기 해봅시다.

자세한 내용은 한경잡앤스토리(www.jobnstory.com)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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