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스트 출신 구둘래 기자, 모교를 가다"일어도 영어로 배워..'장짤'땐 낙오자" 숨쉴틈 없었다

2011. 4. 12.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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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체육관과 동아리방은

더 고급스러워졌지만

학생들 억압은 심해져

첫 학기 학점은 2.7이었다. 아침밥을 먹기 전 도서관에 자리를 맡았고, 수업 끝난 뒤 자연스럽게 발길이 향하던 곳도 도서관이었다. 그래도 모르는 게 너무 많았다. 강의는 따라가기 벅찼고, 숙제는 끝이 없었다. 답답했다. 2학기가 시작됐을 때는 매일 밤 잠을 설쳤다. 어느 월요일 아침 무작정 고향집으로 내려갔다. 차마 "학교 못 다니겠어"라는 말은 못했다. 사흘이 지나자 어머니는 내 손목을 끌고 고속버스 안으로 밀어넣었다. 어머니는 버스 꽁무니를 오랫동안 지켜보고 있었다. 1992년이었고 나는 카이스트 1학년이었다.

10일 오후, 몸무게와 나이 모두 세월과 더불어 늘어난 채 학교를 찾았다. 캠퍼스는 한결 깨끗해지고 높아졌다. 체육관은 화려한 건물로 탈바꿈했고, 운동장은 야구장으로 정비됐다. 동아리 방들이 어지럽게 붙어 있던 가건물은 정리되고, 대신 '유레카관'이 보인다. 밤참 먹으러 들르곤 했던 함바집은 철거되었고, 매점은 버거킹으로 변신했다.

도서관 입구에는 '총장과의 대화' 의견을 모으는 대자보가 붙어 있다. "이렇게 카이스트가 세계 10위권 대학이 될 수 있을까"라고 적힌 글 밑에 누가 '사망지수'라고 써놓았다. 큰 글씨로 "살려주세요"도 적혀 있다.

문제의 차등등록금제는 폐지로 가닥을 잡았지만 학교의 뒤숭숭함은 수그러들지 않는다. 원인은 한 곳을 향하지 않았다. 2006년부터 시작된 총장의 개혁은 생활 곳곳까지 미친다. 영어 수업만 해도 그렇다. "예외가 있으면 그 수업으로 학생들이 몰리게 될 것"이라는 이유로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중국사도 동양철학도 일본어도 영어로 배운다. 한 학생은 이렇게 말했다. "딱 한번 한국어로 강의를 받아본 적이 있다. 보강수업이어서 가능했다. 너무 잘 알아들을 수 있어서 혁명적이었다." 게시판에는 "영어 강의를 한번도 이해해본 적이 없다"는 글도 올라와 있다.

학생들에 대한 억압도 공공연했다. 2008년에는 '연차 초과자는 학생 대표가 될 수 없다'는 학칙을 내세워 총학 선거를 무기한 연기했다. 그해 연말에는 인터넷에 카이스트의 개혁을 바라는 글을 올린 학생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발했다.

'이런 상황을 견디고 있는 게 놀랍다'고 말했더니 학보사 기자가 옛날 신문을 갖다주었다. 학생들은 2006년 개혁안에 대해서 집회를 열어 '일방통행식'이라고 문제점을 제기했다. 2008년에는 총장과의 대화도 가졌다. 그러나 진전은 없었다. 학보사의 송석영 편집장은 "서남표식 개혁을 '성과' 위주로 보도하다가 불행한 일이 벌어지자 뒤늦게 문제가 있다고 앞다투어 취재하고 있다"고 말했다. 외부의 뒤늦은 관심이 되레 씁쓸하단다. 그래도 "언론의 관심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됐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학교는 여전히 모를 곳이다. 학교 게시판은 '서남표 총장 파이팅!'을 놓고 추천 53, 비추천 43으로 막상막하다. 누군가는 이렇게 글을 올렸다. "'정말 노력했는데도 학점이 3.0이 안 되면 카이스트에 붙어 있을 자격이 없다'는 말을 지껄입니다. 그런 글에 추천을 오십개씩이나 눌러댑니다. 정말 무섭습니다." 한 학생은 "장짤(학점이 3.0이 안 되어 장학금이 짤리는 경우)이 되면 우리는 마음속에서 '낙오자'가 된다"고도 했다. 5년의 개혁은 학생들이 경쟁을 몸으로 익히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1992년에도 '경쟁'과 '낙오'를 알고 있었다. 나랏돈으로 공부한다는 부채의식도 있었다. 징벌적 제도 없이도 그랬다. 오랜만에 전화한 94학번 후배는 "그때보다 더 심한 것 같다. 우리 때와 달리 퇴로가 없다"고 말한다. 나는 96년 가을 졸업을 한 뒤 백수 생활을 하다 회사에 취직을 했다. 후배 하나는 영상원에 진학했고, 오랜만에 만난 한 친구는 제주도에서 펜션을 운영한다고 했다. 한 후배는 아예 시민단체 활동가가 되기도 했다. '과학입국'을 가슴에 새기고 들어간 대학에도 샛길은 있어야 한다. 사방이 꽉 막힌 곳에서 후배들이 파랗게 질려 있다.

대전/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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