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 국정교과서의 독백]황국신민 만들던 나,위험한 나를 다시 불러내지 마오

박은하 기자 2015. 10. 23.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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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국사교과서라고 해. 1974년부터 2002년까지 교육부가 독점 발행했지. 이른바 ‘국정교과서’라고 하지. 시민들의 정치적 견해나 사고방식과 밀접하게 연관된 과목이어서 꽤 오랫동안 ‘국정’의 틀에 묶여 있었어. 그러다 2003년 한국 근현대사가 분리되면서 ‘검인정’ 교과서로 다시 태어났지. 2011년에는 한국사 과목도 검인정 체제로 전환됐어. 학계와 시민사회, 법조계가 지속적으로 “교과서는 민간 자율로 출판해 다양한 시각이 반영돼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야. 그 이후 나는 박물관의 유물이 되었어.

그런데 요즘 내 이름이 여기저기서 들리고 있어. 정말 당황스러워.

‘교과서는 당대의 가장 형편없는 역사서’라고 독설을 날린 역사가도 있지만 교과서는 오류가 적고 믿을 수 있다는 미덕이 있지. 하지만, 나는 부끄럽게도 그런 미덕조차 갖추지 못했어. 권력 눈치를 보며 나에게 가위를 들이대거나 붓질을 한 사람들 때문이지. 해서 손바닥 뒤집듯 바뀌어온 내 인생 얘기를 좀 할까 해. 아무래도 내가 다시 교육현장으로 불려 나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 그래

“나는 위기의 구한말에 태어났어충성하는 ‘국민’ 키우라 하더군일제 땐 천황의 성덕 가르쳐전쟁에 동원할 국민을 만들었지잠시 잊혀졌던 나를 불러낸 유신반공·지배층 중심 역사관만…민주화 후 균형 잡힌 연구 반영잠시 숨돌린 적도 있었지동북아 역사 화해 갈 길 바쁜데우린 지금 여기 발목 잡혀있네”

이 글을 읽는 자네에게 먼저 물어보고 싶어. 중·고등학교 시절 한국사 수업 은 어떠했는지.

2003년 이전에 학교를 다녔다면 ‘한국사’보단 ‘국사’가 더 익숙하겠지. ‘민족의 수난과 극복’ 이런 소제목이 있었던 흑백 교과서 이름이 ‘국사’였던 거 기억하나. 아마도 그 교과서에 빽빽하게 밑줄을 치고 이런 것들을 외웠을 거야.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 <무구정광대다라니경>, 세계 최초 금속활자본 <상정고금예문>, 현존하는 최초의 금속활자본 <직지심체요절>, 독창적 상감기법을 활용한 고려청자, 세계 최초의 측우기 발명 등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각종 증거들 말일세. ‘고구려=강건하고 남성적’ ‘백제=우아하고 여성적’ ‘신라=소박하고 토속적’이라는 공식도 시험에 자주 나왔지. ‘백제 전성기=4세기(근초고왕)’ ‘고구려 전성기=5세기(장수왕)’ ‘신라 전성기=6세기(진흥왕)’도 기억나나? 전성기를 맞은 국가들의 공통점은 왕권이 강화되고 한강 유역을 차지했다는 내용이었지. ‘조선후기 이앙법의 도입으로 인한 상공업 발달과 신분제 해체, 근대사회로의 이행’이라는 서술은 이해가 되던가? 재치 있는 역사선생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모르긴 몰라도 이걸 다 외우느라 고생 좀 했겠지.

국사교과서는 학생들이 역사를 공부하기 위해 존재하지. 해서 역사를 왜 공부하는지부터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군. “너답지 않게 왜 이래?” “나다운 게 뭔데?” 요즘 드라마에서도 사라진 이 촌스러운 대사에 이유가 담겨 있다고 생각해. ‘나다운 게 뭔지’, 즉 ‘내가 누군지’ 확인하기 위해 뿌리를 찾아 거슬러 올라가는 것. 누군가 역사에 관심을 갖고 열광적으로 공부하거나 역사서를 열심히 쓰려고 시도한다면 자기 정체성에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는 방증일 거야. 대한제국 시대가 바로 그러한 시대였지. 갑오개혁(1895년) 이후 학교에서 국사 과목이 필수로 지정되고, <조선역대사략> 등이 교과서로 편찬됐어. ‘학부’라고 오늘날 ‘교육부’ 같은 기관에서 만든 것이었지. 학부는 국사교육의 목표로 “국체의 대요를 알게 하고 국민의 지조를 양성하는 것”이라고 내세웠어. 나라가 망하기 직전이라 다들 앞다퉈 지식을 갈구하던 시대였지. 위기에 빠진 국가를 구해내고 충성하는 ‘국민’을 만들기 위한 역사교육이 본격 시작된 게 이즈음이야.

역사교과서 검인정 제도는 을사조약 이후 조선을 통치한 통감부가 만들었어. 통감부는 역사수업을 대폭 줄이고 교과용 도서를 직접 발행하며 사적으로 편찬한 교과서는 학부의 검정을 받도록 했어. 12가지 검정기준을 제시했는데, ‘한국과 일본의 관계와 친교를 저해하거나 비방하는 것이 없는가?’ ‘편협한 애국심을 고취하는 내용은 없는가?’ ‘사회주의나 그 밖의 사회평화를 해치는 내용은 없는가?’ 등이 포함됐지. 식민지 교육의 본질을 검정기준만 봐도 알 수 있지.

한일강제병합 이후 조선을 통치한 조선총독부 역시 교과서를 직접 발행했고 교육 내용도 통제했어. 중일전쟁 이후인 1938년 조선총독부가 발표한 교육령을 보면 “국사는 황국신민 정신을 함양하는 것을 요지로 한다” “조국의 체제, 황통의 무궁, 역대 천황의 성덕, 국민의 충성 등을 가르친다”고 되어 있지. 전쟁을 일으키고 국민을 동원해야 하니 국가가 국민의 머릿속에 뭘 주입하라고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이 더욱 심해진 거야. 내가 그 첨병 역할을 맡았지.

1945년 해방 이후 미 군정은 역사와 사회 과목을 통합해 ‘미국식 시민교육’을 도입하려고 했어. 왕조나 국가에 충성하는 신민이 아니라 ‘독립국가에 필요한 민주시민 양성’을 교육목표로 내세운 것은 이례적인 일이지. 하지만 그대로 되진 않았어. 이제 막 식민통치에서 벗어난 한국인들의 자국사·문화에 대한 관심이 무시됐고, 일제강점기 제대로 된 역사교육·연구가 이뤄지지 않아 발행된 교과서는 식민사관을 답습했지. 게다가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다양한 의견을 존중하는 민주시민의식 대신 절대적으로 공산주의를 배격하는 반공이념이 더 중시됐거든. 이때 나는 잠시 자취를 감추었지.

나는 유신과 함께 돌아왔어. 유신이란 1970년대 초반 껍데기나마 민주공화정 체제를 유지하던 대한민국이 “도저히 정상적 헌법으로 기능하지 못하는 위기상태에 있다”고 선언하며 국가 체제를 완전히 바꿔버렸지. 생각해보면 공식적인 비상사태를 선포하기 전에 국사교육을 통한 비상사태 선포 작업이 지속적으로 있었다고 봐야 해. 바로 나를 통해서 말이야.

1948~1968년을 ‘재건의 시대’라고 부른 역사학자가 있었지. 1960년대 한국 사회는 빠르게 안정되고 경제성장을 달성했어. 학계에서도 식민사관을 극복하려고 노력해 많은 연구성과를 내놨지. 전쟁으로 파괴된 국가의 ‘재건’이 마무리됐다면, 그 다음에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겠어. ‘인간답게 사는 것은 무엇일까?’ 국민들이 ‘재건’을 넘어서 ‘자유’나 ‘민주’ 등을 고민할 때 공화당은 1967년 3선 개헌을 추진하고, 정부는 이듬해 국민교육헌장을 반포했지. “나는 누구지?”란 질문에 국가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고 답을 내놨지. 박정희 대통령은 1971년 유신을 선포하고 이듬해 지방장관회의에서 “광복 이후 막연한 세계인을 만드는 데 치중해왔다. 국적 없는 교육의 국적을 회복하라”고 지시를 내려 곧바로 역사학자 16명과 관료 4명으로 이뤄진 ‘국사교육강화위원회’가 만들어졌지. 그 결과물로 만들어진 게 바로 나야. 그들은 국사교육 강화의 취지와 목표를 다음과 같이 제시했어. “굳건한 민족사관을 바탕으로 국가·사회 발전에 주체의식을 갖고 참여하도록 한다” “민족중흥의 이념을 구현하기 위해 선조들의 노력과 업적을 이해하고 스스로 국가에 헌신하는 태도를 기른다” “자신과 국가를 동일시하는 국민의 자세를 이룩한다”.

형식이 내용을 결정한다고 하지. ‘나라가 위기’라고 선포하면서 만든 교과서에 무슨 내용이 담기겠나. 살수대첩, 귀주대첩, 삼별초의 대몽항쟁을 열심히 외워야 하고, 고대사에서부터 조선사까지 왕권 강화가 좋은 것이고, 일제강점기 소작쟁의·노동자 파업·형평운동 등 각종 사회운동을 무조건 ‘항일운동’의 범주로 뭉뚱그려 외워야 했던 이유가 이때 만들어졌어.

이야기가 길어졌군. 혹시, 충남 천안에 있는 독립기념관 가봤나. 이곳은 1980년대 일본 교과서 왜곡 파동과 관련이 있지. 1982년 일본 문부성이 교과서 검정 과정에서 일본의 제국주의 팽창 정책을 ‘진출’로 표현하고 3·1운동을 ‘폭동’으로 묘사하도록 했어. 20세기 초반 일본이 아시아에서 저지른 식민지배를 축소·은폐하려 하자 동아시아 전체가 발칵 뒤집어졌지. 한국에서도 반일시위가 일어나고 성금을 모아 독립기념관을 만들자는 움직임이 들불처럼 번졌어. 곰곰이 생각해봤지. 정부가 발행하는 ‘국정’교과서를 쓰는 우리가 민간이 발행하고 정부가 통제하는 ‘검정’ 일본교과서를 비판할 자격이 있을까.

나는 계속 비판을 받았지. 민족주체사관을 내세우고 있지만 실제로는 뭐든지 우리 민족이 최초라고 여기는 비과학적인 ‘관제민족주의’, 요즘 말로 ‘국뽕’이 문제였지. 그래, 내가 국뽕의 원조일세. 지배층 중심의 역사인식, 반공 냉전 이데올로기 등등 셀 수가 없었지. 민주화 이후 나는 특히 현대사 부분의 대폭 수정을 요구받았어. 4·19의거는 혁명으로, 제주 4·3사건은 4·3항쟁 식이었지. 군사정권 시절 ‘빨갱이들의 폭동’으로 낙인찍혀 연구조차 금지됐던 사건들이 재조명되면서 가능했던 일이지.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들도 대대적으로 포함됐어. 한국전쟁 시기 민간인 학살 등도 다뤄야 할 사건이었지. 1994년 김영삼 정부 시절, 이런 목소리를 담은 새 교과서 집필 준거안이 만들어지자 ‘민중사관’ 중심의 교과서가 만들어졌다며 보수언론을 중심으로 난리가 났지. ‘주사파가 1980년대부터 작업한 결과물’이라는 얘기도 나왔어. 결국 교육부는 비판을 이기지 못하고 몇몇 항목에서는 백기를 들고 말았지. 익숙한 풍경 아닌가.

그럼에도 나는 잠시나마 퇴장할 수 있었지. ‘전국역사교사모임’이 만들어졌어. 새로운 역사교육 방법론을 계속 연구하고, 민간 출판시장에서 <역사신문> 등 실험적 형식의 역사책이 만들어지고, 교과서 문제로 지식인들과 교육자들이 끊임없이 토론을 벌인 덕이었지. 우리 사회의 지적 역량이 전반적으로 성숙한 결과이기도 해. 역사는 국민에게 답을 강권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하게 만드는 과목으로 전환하는 것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던 게 그즈음이지. 그런 분위기가 형성되니 2001년 일본에서 후소샤 교과서 문제가 불거질 때 우리 정부가 공식적인 비판 서한을 보낼 수 있었겠지. “우리가 생각하는 올바른 역사교육은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국민으로서의 자질을 길러줄 수 있도록 국제적인 상호 이해와 우호 협력을 가르칠 수 있어야 하며, 학생들로 하여금 사실과 증거를 존중하는 습관과 인간 행위의 다양성을 인식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줄 수 있어야 한다.”

역사학자들과 교육자들은 지금 할 일이 너무 많아. 한국사·세계사를 어떻게 통합시켜 교육할 것인가, 동북공정·일본 재무장·위안부 문제 등 역사갈등을 어떻게 평화롭게 해결할 것인가…. ‘올바른 교과서’ 때문에 이 중요한 문제들의 논의가 모두 중단돼버렸어. 이것만 봐도 나의 복귀는 위험해. 그래서 호소하고 싶어. 제발 나를 다시 호출하지 말라고.

*참고

<우리 역사교육의 역사>, 역사교육연구소, 휴머니스트, 2015

<역사교육으로 읽은 한국현대사>, 김한종, 책과함께, 2013

<대한민국, 재건의 시대(1948~1968)>, 이하나, 푸른역사, 2013

[커버스토리]역사교육을 대하는 시대별 관점

<박은하 기자 eunha999@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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