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프런티어 시대, 전문대에 길을 묻다] '대세' 박보영·이종석 호흡 맞춘 비결.."시나리오 50번 고쳤다"

김봉구 2014. 5. 21.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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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김진섭 담소필름 대표(한국영상대 영상편집제작과 졸) "전문대 꼬리표, 서울예대처럼 자랑스럽게 만들고 싶다"

지식경제사회에 걸맞은 인재상은 '간판보다 실력'입니다. 안전제일 직업관을 벗어던지고, 청년층이 잡프런티어의 주역이 돼야 한다는 인식도 확산되고 있습니다. '스펙초월 채용문화'로의 사회적 인식 전환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한경닷컴과 한국전문대학교육협의회는 전문 지식인과 맞춤형 전문대 교육프로그램을 소개하는 기획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편집자 주>

'피끓는 전쟁' 포스터를 배경으로 포즈를 취한 김진섭 대표.

[ 김봉구 기자 ] “영화 ‘피끓는 청춘’은 개봉까지 만 3년 걸렸어요. 원래 내용은 섹시코미디, 제목도 ‘섹스킹’이었어요. 강하죠? 역시 투자와 캐스팅이 힘들더군요. 이러다 엎어지겠다 싶어 직접 제작사를 차렸습니다. 감독님이 시나리오를 50번 이상 고쳤죠. 박보영 씨 의리가 영화를 살렸어요.”

그는 영화 ‘황산벌’ 제작팀으로 충무로에 발을 들였다. 칸영화제에 간 ‘하녀’가 프로듀서 입봉작. 그리고 곧바로 제작사 ‘담소필름’을 차렸다. 신생 회사의 첫 작품 ‘피끓는 청춘’에 상종가의 청춘스타 박보영·이종석을 캐스팅해 주목받았다. 김진섭 PD(35·사진)의 범상치 않은 필모그래피다.

김 대표의 꿈은 방송사 카메라맨이었다. 막연한 동경으로 한국영상대 영상편집제작과(당시 웅진전문대 영상편집전공)에 진학했다. 하지만 전문대 출신은 공중파 입사가 어려운 현실에 부딪쳤다. 학과 공부를 하며 영화에도 흥미를 느낀 김 대표는 영화 제작으로 방향을 틀었다.

“학생 때 실습 차 영화 조명팀에서 일했는데, 돈이 없어 하루 찍고 한 주 쉬는 거예요. 스태프 7~8명 주머니를 털어도 담배 한 갑 못 사더라고요. 영화판이 이렇구나, 이건 아니다 싶어 일반 회사에 취직했죠. 그랬는데 대학 동기가 영화 같이 해보자고 권하더군요. 내가 너무 일찍 접은 건 아닌가, 딱 10년만 해보자, 그런 생각으로 다시 시작해 지금까지 오게 됐습니다.”

회사를 차린 그는 모교인 한국영상대 ‘가족회사’로 등록해 학생들을 불러 함께 일하고 있다. 후배들의 현장실습과 취업 지원에 팔을 걷어붙였다. 김 대표는 “관련 학과를 졸업했으면 뭔가 메리트가 있어야 한다. 예컨대 학교에서 따로 안 가르쳐줘도 ‘콜시트’(다음날 촬영 개요 및 일정표) 정도의 현장용어는 알아야 다른 학과 출신과 차별화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전문대 꼬리표를 떼지 못할 거라면 유명인을 많이 배출한 서울예대처럼 내 모교도 자랑스러운 곳으로 만들고 싶다”는 그를 대학로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 영화는 충무로, 연극은 대학로 아닌가. 의외로 사무실이 대학로에 있다.

“사실 강남에 회사를 내고 싶었다. 그런데 같이 작품 준비하던 감독님(‘피끓는 청춘’ 이연우 감독)이 갑갑한 걸 안 좋아했다. 사람 냄새 나고 아날로그적인, 한옥이 보이는 곳이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었다. 그래서 이곳으로 택했다. 정작 감독님은 1년에 3~4번밖에 안 오시지만. (웃음) 사람들 얘기를 듣는 편이다. 회사 이름인 담소필름도 이쪽 업계에서 유명한 이만희 작가님이 지어주셨다.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면 좋지 않겠냐면서.”

- 비교적 젊은 나이에 제작사를 설립했는데.

“회사 차릴 생각을 했던 건 아니다. 처음엔 PD와 감독으로 만났다. 이연우 감독님 작품 ‘거북이 달린다’를 재미있게 봐서 같이 작품 안 하더라도 한 번 뵙고 싶었다. 한데 만나서 얘기해 보니 통하는 점이 있었다. 둘 다 돌직구 스타일이다. 처음 시나리오 읽고는 ‘감독님, 이건 우리나라 정서상 영화 안 됩니다’ 대번에 그랬다.”

- 그래도 같이 한 걸 보면 인연이었나 보다.

“영화 원제가 ‘섹스킹’이었다. 제대로 된 섹시코미디를 만들어 보자는 게 감독님 생각이었다. 소재와 캐릭터는 좋았지만 파격적이었다. 말하자면 교복 입고 섹스하는 건데, 그게 국내 정서에서 통할 거란 생각이 안 들었다. 제작하는 입장에선 섹스 코드를 빼야 한다고 말씀드렸다. 감독님은 그걸 빼면 영화를 만들 이유가 없다고 했다. 나도 ‘영화에 투자할 이유 역시 없지 않겠냐’고 얘기했다. 투자사도 배우도 얻는 게 있어야 영화가 나오는데 이건 양쪽 다 아니라고.”

- 영화가 나오기까지 진통이 심했겠다.

“웬만한 충무로 제작사들은 시나리오 한 번씩 봤을 거다. 다들 이건 안 된다고 했다. 감독님께서 제작사들이 퇴짜를 놓으니 우리가 직접 회사를 차려서 영화 만들어보자고 했다. 당연히 반대했다. 솔직히 그건 더 큰 도박이었다. 제작사가 거절하는 데는 분명히 이유가 있으니까. 우리가 신생 제작사를 만들어서 한다고 해도 투자나 캐스팅이 더 힘들 게 뻔했다.”

- 그런데 어떻게 회사를 차렸나.

“계속 터놓고 진솔하게 얘기했다. 어느 순간 어차피 하기로 마음먹었으면 되든 안 되든 한 번 부딪쳐보자는 생각이 들더라. 물론 결정이 쉽진 않았다. 현장 PD가 아닌 경영을 하는 제작자가 된다는 건데,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전부 말리기만 하니까 오히려 오기가 생겼다. 조금만 바꾸고 잘 다듬어 내놓으면 통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 신생 회사 첫 작품에 박보영·이종석을 캐스팅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일진 여학생 ‘영숙’ 역에 박보영을 원했다. 박보영의 소속사 대표가 시나리오를 보더니 못한다고 했다. 욕하고 침 뱉고 싸우는 캐릭터가 전부인데 어떻게 하냐는 거였다. 끈질기게 설득했다. 그러자 시나리오를 자세히 풀어서 다시 달라고 했다. 원체 수위가 셌고 감독님이 시나리오를 압축적으로 쓰는 편이기도 했으니까. 정말 50번 이상 시나리오를 고쳐 썼다. 그만큼 영화를 꼭 하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결국 박보영이 출연하는 방향으로 됐는데 문제가 생겼다.”

- 영화 한 편 만들기가 정말 어렵다. (웃음)

“그러게 말이다. (웃음) 그때가 ‘늑대소년’ 개봉 얼마 전이었다. 시사회와 무대인사 일정 끝나고 최종 O.K 답변을 주겠다고 했는데. 개봉하고 순식간에 관객 200만 명을 넘겼다. 내가 박보영 매니저라 해도 작품을 급하게 할 이유가 없겠더라. 그정도 스코어면 다음 작품은 충분히 보고 고를 수 있는 입장이니까. 300만 돌파하고 그쪽에서 연락이 왔는데 솔직히 겁이 났다. 못한다고 할까봐. 그런데 소속사 대표가 시나리오대로 잘 만들 수 있으면 같이 가자고 하더라.”

- 걸림돌이 많았는데 한숨 돌렸겠다.

“그러고도 크랭크인까지 8개월 가량 더 기다렸다. 소속사 대표 분에게 ‘잘 나가는 박보영 잡아두고 영화도 못 만들고 있어 죄송하다’고 했다. 고맙게도 영화 엎어지기 전까진 기다리겠다고 하더라. 카사노바 ‘중길’ 역을 맡은 이종석은 다행히 시나리오를 좋게 봤다. 드라마 ‘너의 목소리가 들려’(너목들) 촬영 직전 시점이었다. 결과적으로 ‘늑대소년’과 ‘너목들’로 인기몰이 한 두 배우가 함께 캐스팅됐다. 그 과정에서 카라 멤버 구하라가 캐스팅 됐다가 앨범 발매시기와 겹쳐 출연이 불발되기도 하고…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다. (웃음)”

- 필모그래피를 찾아보니 ‘하녀’가 입봉작이더라.

“임상수 감독님이 제일 감사한 분이다. 꿈인 PD가 될 수 있게 해줬으니. 당시에 준비가 덜 된 것 같아 망설였는데 감독님께서 완벽히 준비해 시작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느냐며 손을 내밀어 줬다. 감독님 입장에서도 도박이었을 것이다. 덕분에 갓 서른에 입봉 PD가 되고, 첫 영화로 칸영화제까지 다녀올 수 있었다.”

- 원래 이쪽 분야에 관심이 있었는지.

“처음엔 카메라맨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촬영조명과 진학을 생각했는데 영상편집 전공이 눈에 띄었다. 이걸 전공하면 내 손으로 편집도 할 수 있겠다 싶어 지원했다. 학교에 들어가고 나서야 ‘전문대 출신은 공중파에 못 간다’는 관행을 알았고, 진로 변경을 고민했다. 대학 1학년 때 학생들끼리 만드는 단편영화 PD를 했는데 재미있었다. 그때부터 이쪽을 생각한 것 같다.”

- 곧바로 영화판에 뛰어들었나.

“학생 때 실습생 자격으로 영화 조명팀에 들어갔다가 영화판 실상을 알았다. 돈이 없으니까 영화가 하루 찍고 한 주씩 쉬었다. 결국 10개월 만에 영화가 엎어졌다. 조명팀 형들이 7~8명 정도였는데 주머니를 다 털어도 담배 한 갑을 못 샀다. 당시 디스플러스 한 갑이 1600원이었다. 꽁초 주워 피면서 ‘왜 이러고 살아야 하나’ ‘이게 학교에선 안 가르쳐준 영화판의 현실인가’ 생각했다. 그만두고 졸업 뒤 삼성 테스코에 취직했다. 나는 일반 회사 체질이 맞다고 생각했다.”

- 어떻게 다시 영화를 하게 된 건가.

“대학 동기가 권했다. 내가 싫다고 해도 영화를 전공했는데 한 번 제대로 해봐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한 달 넘게 쫓아다니며 날 설득했다. 이 영화는 주연이랑 투자사도 확실하고 절대 안 엎어진다면서. (웃음) 그게 ‘황산벌’이었다. 나도 너무 빨리 접은 건 아닌가, 한 가지 일을 잡았으면 10년은 해봐야 하지 않겠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줄곧 제작 일을 했다.”

- 모교가 ‘영상대학’으로 특성화가 확실하다. 대학시절은 어땠나.

“학교와 현장은 달랐다. 촬영 현장에선 일본식 은어를 많이 썼다. ‘바라시’ 하라는데 무슨 말인지 몰랐다. 촬영 끝나고 정리하란 뜻이다. 학교에선 못 들어본 용어다. 그땐 이론 수업보다는 현업에 있는 분이 생생한 지식을 전해줬으면 싶었다. 그런데 한 단계씩 올라가면서 관점이 달라진다. 수업에서 배운 작품분석이나 제작기법 같은 지식이 필요하다. 막내 때보다 10~20년 후에 학교에서 배운 걸 많이 써먹게 된다. 이론과 실무의 균형을 잘 잡는 게 중요한 것 같다.”

- 후배들을 불러 함께 일한다고 들었다.

“아무래도 생소한 제작사보다는 여기에서 경험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산학협력 가족회사가 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학교에서 시나리오 분석하고 촬영기법 공부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현장에서 일을 시킬 때 뭔가 영화 관련 전공의 메리트가 있어야 하지 않겠나. 현장에선 ‘콜시트’가 뭔지 일일이 가르쳐주지 않는다. 후배들에게 실무에서의 비교우위를 늘 강조한다. 영화 기획 단계부터 개봉까지 무슨 일들이 있는지, 어떤 현장용어를 쓰는지부터 익혀야 한다고.”

◆ 나에게 전문대란…

처음엔 숨기고 싶은 존재였다. 하지만 내가 숨겨도 꼬리표는 지워지지 않았다. 그럴 바에야 자랑스럽게 여기자고 생각을 바꿨다. 어느 순간부터 모교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하고 있다. 졸업생들이 자랑스러워 하는 전문대의 단적인 예가 서울예대라고 생각한다. 나부터 유명인이 되고 영향력 있는 선후배가 많이 배출된다면 학교 위상은 자연스럽게 높아지지 않겠나.

한경닷컴 김봉구 기자 kbk9@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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