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금 사라진 초등학교.. '노래방 PC'로 음악수업
지난 3일 낮 12시 30분 서울 은평구 진관동 북한산초등학교에선 이 학교 '메아리 합창단'의 노래 연습이 한창이었다. 3학년 이상 학생 25명으로 이뤄진 합창단은 멕시코 민요 '라쿠카라차'와 호주 민요 '비밀의 계곡'을 3부 합창으로 불렀다. 점심시간을 이용해 피아노를 연주하며 합창을 가르치는 교사는 재즈가수 말로(본명 정수월·42)씨였다. 올해 이 학교에 아들을 입학시킨 그녀는 초등학교에서 더는 오르간(풍금)으로 음악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교사를 자원했다. "선생님이 컴퓨터를 조작하면 모니터에 가사가 뜨면서 조악하게 녹음된 동요가 나와요. 아이들이 그걸 보면서 동요를 배우더라고요." 국민대와 국제예술대 강사인 그녀는 지난 1학기부터 매주 화·목요일에 이 초등학교에서 전 학년을 대상으로 노래를 가르치고 있다. 합창곡 편곡도 손수 한다.
초등학교 교실에서 오르간이 사라졌다.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컴퓨터 프로그램이다. 아이들은 선생님이 아니라 컴퓨터 선창(先唱)을 따라 노래를 배운다. 흡사 노래방 기계로 음악을 가르치는 형국이다. 교사들은 '편리하다'는 이유를 들고 있으나, 교육계에선 "음악교육이 아니라 '클릭 교육'"이라는 자책(自責)이 나오고 있다.
오르간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은 2005년쯤부터다. '교단선진화' 정책에 따라 컴퓨터를 활용한 학습자료가 개발되면서다. 자리만 차지하는 오르간은 창고 신세가 됐다. 2012년 개정된 '서울교육청 교구기준'은 학급당 오르간 또는 전자오르간(키보드) 1대를 두도록 하고 있으나, 이를 따르는 경우는 일부 사립학교뿐이다. 북한산초교 역시 학교 전체에 키보드 4대밖에 없었으나, 말로씨가 음악 수업을 맡은 뒤로 중고 피아노 1대를 구비했다. 이 학교 정하소 교감은 "교사들이 담당 업무가 많아 음악교육을 부담스러워한다"며 "컴퓨터 활용 수업이 많아지면서 음악이 소홀해진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말로씨는 "아이들이 나한테 배운 동요 '달 따러 가자'를 부르며 걸어가는 모습을 보고 다른 학부모들이 '아이들이 함께 동요 부르는 모습을 처음 본다'고 했다"며 "눈을 마주치지 않고 가르치는 음악은 죽은 교육"이라고 말했다.
교육 당국의 방관적 정책도 '음악교육 실종'에 한몫했다는 지적이다. 초등교사 임용시험 필수과목이었던 오르간 연주는 지난 1998년 폐지됐다. 서울교육청은 곽노현 교육감 시절인 2011년 초등 합창대회인 '밝고 맑은 노래 부르기 대회'에 대한 지원을 중단했다. "교사 업무량이 너무 많다"는 이유로 1등 상인 '교육감상'을 폐지한 것이다. 올해 35년째인 이 대회는 서울시내 초등학교 590여곳 중 500여곳이 참가할 만큼 교육청의 '입김'이 큰 행사였다. 그러나 교육청이 손을 떼면서 참가신청이 급감해 올해는 143개교만 대회 무대에 올랐다.
한 16년차 초등교사는 "요즘 아이들이 노래방 문화에 익숙해서 이런 음악 수업에 거부감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서울초등음악교과교육연구회 주천봉 회장(영신초 교감)은 "예전 오르간으로 '고향의 봄'을 가르칠 때는 음이 너무 높아 조(調)를 낮춰 연주했는데, 컴퓨터 프로그램은 그런 기능이 없다"며 "무엇보다 음악이 기능 교육으로 변질되면서 음악적 교감(交感)이나 인성교육이 사라진 것이 큰 문제"라고 말했다. 그는 "요즘 대학생들은 동요 한 곡 제대로 부르지 못할 것"이라며 "모니터를 보고 배운 동요가 기억에 남아 있을 리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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