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풉시다, 태양처럼.. 편견에 화냅시다, 불같이"

취재/김한수 기자 2016. 7. 16. 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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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大賞 20주년]

"베푸는 사람이 됩시다, 태양과 같이. 우애를 퍼뜨립시다, 바람처럼. 무지와 편견에 대하여 열렬히 화냅시다, 불과 같이. 사랑의 씨앗을 마음들 속에 자라게 합시다, 땅과 같이. 서로에게 친절합시다."

지난 2009년 8월 강원도 인제군 백담사만해마을에서 열린 제13회 만해대상 시상식. 평화대상을 받은 이란 출신의 여성 변호사 시린 에바디는 이렇게 수상 소감을 말했다. 장내는 일순 침묵이 감돌다 이내 천둥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테헤란대 법대를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한 시린 에바디는 이란 최초의 여성 판사였다. 그러나 1979년 이슬람혁명 후 판사직에서 쫓겨나고 1990년대부터 이란 인권 상황 개선을 위해 노력했으며 2003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이날 수상 소감엔 자신의 삶 전체가 녹아 있었다.

만해대상 시상식장은 '명언의 산실(産室)'이다. 올해로 20회를 맞는 만해대상의 역대 수상자는 모두 105명. 한국인 외에도 25국 출신 36명(단체)이 수상했다. 노벨상 수상자가 6명, 수상 당시 전·현직 국가원수급이 5명에 이른다. 그런 삶의 무게가 온축돼 드러난 수상 소감은 한마디 한마디의 결이 다르다.

◇모두가 평화로울 때까지

"만델라가 만해대상을 받은 것은 빛에 조명을 더하는 것, 혹은 마주 보는 거울 두 개와 같다." 2014년 문예대상을 받은 이란의 영화감독 마흐말바프는 만해대상의 의미를 이렇게 해석했다. 그는 "언젠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진정한 평화를 이뤄내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청년에게 만해대상이 수여되는 날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198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나이지리아 시인 월레 소잉카(2005년 수상)는 "시인은 빛을 캐내는 광부"라며 '가족'의 개념을 확대할 것을 제안했다. "산과, 바다와, 분쟁과 오해, 때로는 서로에 대한 무지가 갈라놓고 있는 가족, 바로 그 가족에게 지극히 겸허한 마음으로 이 상을 바칩니다."

◇만해 그리고 '님'

만해대상 수상자들의 소감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단어는 '님'이다. 김지하 시인은 1972년 10월유신 헌법이 공포된 다음 날 백담사 계곡에 머물렀던 때를 회상했다. 그 외에도 문인들은 "만해 '님'의 의미는 오늘 여기까지 와서 우리에게 아름다운 자연 그리고 통일과 자유의 고른 실현에 있을 것"(고은 시인) "만해 선생의 시들은 참으로 큰 나무들"(신경림 시인) "만해대상의 이름으로 내 존재가 수식되는 순간, 나는 비로소 만해를 나의 님으로 부를 수 있게 됐다"(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고 말했다.

◇새 다짐들

큰 상은 큰 다짐을 낳는다. 유종호 전 연세대 특임교수는 만해의 시 '알 수 없어요'를 인용, "겨레의 별을 그리는 한 마리 불나방, 한 방울 약한 등불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천주교 전 안동교구장 두봉 주교는 "남은 생애 발걸음의 방향을 어디에 둘 것인지 다시 한 번 가다듬는 계기가 됐다"고 했고, 발달장애인 공동체 '무지개공동회'를 이끄는 아일랜드 출신 천노엘 신부는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했다"고 했다. 안숙선 명창은 "더 많은 이에게 우리 소리를 전하는 것, 또 그 음악을 통해 더 많은 이가 감동받고, 치유되는 것, 그것만이 제가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1997년 제1회 만해대상 포교 부문 수상자인 숭산 스님의 수상 소감은 만해대상의 의미를 한마디로 말해준다. "만해 큰스님께서 제창한 '님'은 어디 있습니까. 님은 산에 있는 것도 아니오, 강에 있는 것도 아니오, 물에 있는 것도 아니오, 바로 각자 내 안에 '님'이란 것이 있습니다. 내 '참님'을 찾았을 때에 이 말세(末世)를 '결실시대'로 전환할 수 있습니다."

실천賞 마리안느·마르가레트 수녀

"우리 특별한 거 안 했으니까 소감이 없지. 허허허…."

수화기 너머에서 할매 수녀가 웃었다. 43년간 전남 고흥군 소록도에서 한센인을 돌보다 2005년 모국 오스트리아로 귀국한 마리안느 스퇴거(82) 수녀다. 그는 지난 4월 국립소록도병원 100주년을 맞아 한국을 방문, 57일간 머물다 돌아갔다. 오스트리아의 작은 마을 마트레이에 사는 그에게 만해실천대상 수상 소식을 전화로 알렸다. 소감을 묻자 그는 거듭 "특별한 일을 한 게 없다"면서도 "한국 사람들 마음 잘 알고 감사하다"고 했다. 함께 한센인을 돌봤던 친구이자 동료 마르가레트 피사렛(81) 수녀에게도 좋은 소식을 바로 전하겠다고 했다. 전라도 사투리 억양이 살짝 밴 한국말이었다.

두 수녀는 20대 젊은 나이에 소록도에 들어와 한센인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 마스크와 장갑, 방역복으로 무장한 병원 직원들과 달리 수녀들은 흰 가운만 걸친 채 짓물러 달라붙은 환자의 손·발가락을 맨손으로 떼어 소독했다. 피고름이 얼굴에 튀어도 개의치 않았다. 허름한 창고를 고쳐 어린 미감아(한센병 환자의 자녀로 증세가 나타나지 않은 아이)들까지 보살폈다. 환자들은 그들을 "소록도의 엄마"라 불렀다.

애정만 베푼 것이 아니다. 두 수녀가 오스트리아 가톨릭부인회 후원을 받은 덕분에 소록도에 의약품을 보급하고 영아원, 결핵 병동, 목욕탕 등을 지을 수 있었다. 결혼 후 섬 밖으로 나가는 이들에겐 정착금을 쥐여줬다. 정작 자신들을 위해선 한 푼도 쓰지 않았다. 빗자루가 부러지면 테이프로 붙여 썼고 죽은 환자들의 옷을 수선해 입었다. 낡은 사택에서 지네에게 물리면서도 한 번도 집 수리에 돈을 쓰지 않았다.

당신들의 희생과 봉사에 한국인들이 깊이 감동받았다고 하자 수녀가 또 한 번 소탈하게 웃었다. "할튼(하여튼) 나는 예수님 뜻 따르고 복음 따라서 산 거니까 특별한 거 없어요. 소록도에서 진짜 좋은 시간 보냈고, 나는 그저 그들의 좋은 친구였어요. 기쁘게 (일)했으니까 충분한 거여." 30여분 통화 중 '할튼~'이란 말이 12번 나왔다. 입맛까지 한국화된 수녀들은 된장찌개를 가장 좋아했다고 한다.

마르가레트 수녀는 치매를 앓고 있어서 지난 방문 때 함께 오지 못했다. 인스부르크에 있는 요양원에서 지낸다. 마리안느 수녀는 "내가 소록도에서 우리 친구들 사진 많이 찍어가서 보여줬다"고 했다. 요즘도 그는 일주일에 세 번 20㎞ 떨어진 인스부르크에 가서 미사 드리고 아픈 마르가레트 수녀를 보고 온다. "60년 동안 같이 살았으니까 가봐야지. 할튼 마르가레트가 (건강이) 안 좋아요. 옛날 얘기 잘 하는데 요즘 생긴 일은 기억 잘 못 해요. 지금도 가끔 자신이 소록도에 있다고 생각해요."

지난달 수녀들은 대한민국 명예 국민이 됐다. 법무부는 거스 히딩크 감독에 이어 두 번째로 두 수녀에게 대한민국 명예국민증을 수여했다. 명예국민증은 법적인 권리와 의무는 부여되지 않고 장기 체류를 원할 경우 영주 자격이 주어진다. 두 수녀를 다룬 다큐 영화도 만들어졌다. 두 수녀를 기리는 재단을 세운 김연준 소록도성당 신부가 주도해 촬영을 끝냈고 올해 안에 극장 개봉할 예정이다.

11년 만의 한국 방문 후 마리안느 수녀는 고흥 군민에게 감사 편지를 보냈다. "하루하루 축복이었으며 흘러넘치는 선물도 많이 받았습니다. 매일 동행해 주셨던 소록도 가족들께도 고마움을 표합니다." 한국 와서 달라진 소록도를 보며 깜짝 놀랐다는 그는 "할튼 많이 좋아졌지. 소록도에 다리도 생기고 다들 부자 됐다"며 웃었다.

마리안느 수녀는 여전히 '현역'이라고 했다. "지금은 여기 이웃 할매들을 돕고 있어요. 집 옆 양로원에 100명 넘게 사는데 시간 날 때마다 가서 도와주고 있어요. 소록도 친구들은 이제 잘 사니까 안 도와줘도 돼요(웃음)."

평화賞 '로터스월드' 성관 스님

"만해 스님은 생각을 실천하기 위해 생명을 걸어야 했던 시대에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이룬 분입니다. 저는 마음은 있지만 용기도, 능력도 없어서 망설이기만 했던 사람입니다. 교육, 구호, 복지 활동은 그저 출가자로서 제 삶에 대한 위로였는데 이런 큰 상을 받게 되니 부끄럽고 당황스럽습니다."

2016 만해평화대상 수상자로 선정된 불교 국제구호단체 로터스월드 이사장 성관(61) 스님은 "남은 인생, 만해 스님께 부끄럽지 않게 살겠다"고 말했다.

2016 만해평화대상 수상자로 선정된 불교 국제구호단체 로터스월드 이사장 성관(61) 스님은 "남은 인생, 만해 스님께 부끄럽지 않게 살겠다"고 말했다.

성관 스님이 2004년 설립한 로터스월드는 캄보디아와 미얀마, 라오스에서 교육·의료·복지 사업을 활발히 벌이고 있는 불교계 대표적 구호단체의 하나다. 대표적 무대는 캄보디아. 세계적 유적인 앙코르와트 인근 시엠레아프에 2006년 설립한 BWC(뷰티풀 월드 오브 캄보디아) 센터는 기숙사와 사찰, 안과병원, 도서관, 학교, 식당 등을 갖춘 곳. 고아와 결손가정 어린이·청소년 60여 명이 지내고 있다. 스님은 이곳을 '모함(母艦)'으로 삼아 김안과·건양대와 함께 주민 1000명의 개안(開眼) 수술을 해줬고, 형편이 어려운 어린이 500명이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한국 후원자와 1대 1 결연을 맺어줬다.

로터스월드는 또 올 연말 완공을 목표로 수원시와 함께 시엠레아프에 '수원마을'과 '수원중·고교' 건축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지난 6월에는 라오스의 산간 오지 마을에 초등학교를 지었다.

성관 스님이 해외 구호에 나서게 된 것은 1996년 도반(道伴) 스님들과 함께 앙코르와트를 방문한 것이 시작이었다. 유적 입구에서 '원 달러'를 외치며 몰려든 50여 명의 남녀노소와 만난 것. 그 참담한 장면을 보며 스님은 '노년의 여생(餘生)은 저들과 함께 살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는 "빈곤의 시대와 경제 부흥 시대를 겪어본 입장에서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문맹 퇴치, 교육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10년간 스님이 캄보디아를 방문한 것만 65회에 이른다. 그런 정성에 힘입어 비로소 '연꽃 세상(로터스월드)'이 뿌리를 내려가고 있는 것이다.

성관 스님은 "부·권력·물질이 편중되면 진정한 평화는 깨진다"며 "평화를 이루기 위해 계속 노력해나가겠다"고 말했다.

평화賞 박청수 원불교 교무

"상(賞)은 언제나 받으면 좋지요. 또 좋은 일에 상금을 쓸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제가 내년이면 팔십이에요. 이제 상은 '졸업'한 줄 알았는데 만해 스님을 기리는 큰 상을 주신다니 너무나 기쁩니다."

경기 용인시 처인구 대안학교인 헌산중학교 뒷산에 자리한 '삶의 이야기가 있는 집'에서 만난 청수나눔실천회 이사장 박청수 교무는 '만해 한용운 평전'을 읽고 있었다. "여학교 때 '님의 침묵'을 읽고 황홀한 감동을 받아 얼마나 열심히 읽었는지 몰라요. 늘 체받고(본받고) 싶었던 어른이 만해 스님입니다. 평전을 읽으면서 제가 얼마나 큰 상을 받게 되는지 다시 느끼고 있어요."

박 교무는 해외에서 '마더 박'으로 불린다. 출가 60년 동안 55개국에 모두 105억원어치, 컨테이너 32개 분량을 혼자 힘으로 지원해준 그를 마더 테레사 수녀처럼 부르는 별칭이다.

'동파키스탄 이재민 구호 성금 2만4000원 원불교 서울교구에 기탁'(1970) 그의 일기장에 적힌 첫 구호활동의 기록이다. 그의 나이 33세, 서울 사직교당을 개척한 지 불과 1년째일 때 일이다. 그의 일기장에는 이런 소박한 기록이 손글씨로 빽빽이 적혀 있다. 1975년 경기 의왕에 천주교 한센인 시설 성라자로마을 축성식엔 스스로 찾아간 이후 지금까지 40년이 넘도록 매년 거르지 않고 찾는다.

자비의 동심원이 외국으로 퍼져나간 것은 1988년부터. 현재 인도 북부 라다크엔 박 교무가 세운 마하보디기숙학교에 초·중·고교생 830명이 재학 중이다. 1992년 여학생 25명으로 시작한 이 학교 옆엔 양로원과 병원도 지어줬다.

캄보디아 프놈펜 탁아원엔 생후 7개월~3세 어린이 70명이 하루 11시간 동안 세 끼를 모두 먹고 생활하고 있다. 캄보디아 북부 바탐방엔 연인원 18만명을 진료한 병원과 교육센터가 있다. 그 외에도 박 교무의 일기장엔 천주교, 불교, 개신교의 구제활동에 동참해 지원한 내력이 빽빽하다.

그는 "원불교 설교(법문) 단상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그런 호소에 교도들뿐 아니라 법정 스님은 원고료를 기증했고, 박완서 작가는 호암상 상금을 보탰다.

박 교무는 "따뜻한 마음이 많아지면 전 세계 어려운 이들의 차가운 아랫목이 따뜻해진다"고 말했다.

문예賞 이미자

"한평생 노래만 불러온 제가 '만해문예대상'이라는 귀한 상을 받게 됐다는 소식에 잠시 어리둥절했습니다. 나라를 빼앗긴 일제 시대, 민족 운동과 시(詩)를 통해 우리 민족의 설움을 달래고 앞길을 제시했던 선각자가 만해 한용운 선생이라고 배웠습니다."

2016 만해문예대상 수상자로 선정된 가수 이미자(75)씨는 수상 소식을 듣고 처음엔 어리둥절했다고 했다. 그러나 "일제 시대와 분단, 전쟁과 가난으로 괴롭고 힘들었던 시절에 우리 민족의 한과 슬픔을 어루만지고 달랬다는 점에선 제가 반세기 넘게 부르고 있는 전통 가요도 만해 선생님과 닮은 점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씨는 1965년 베트남 위문 공연 이야기를 꺼냈다. 직항편이 없던 시절 꼬박 사흘이 걸려 찾아간 파병 부대 식당 스피커에선 마침 자신의 '동백 아가씨'가 흘러나오고 있었다는 것. 그날 밤 위문 공연에서도 이씨는 이 노래를 불렀다. 장병들은 눈물을 훔쳤고, 이씨는 "장병들의 사기를 올려주기는커녕 괜히 마음만 아프게 한 것 같아 죄송스럽다"고 말했다. 하지만 장병들은 "괜찮다. 마음껏 울어서 가슴 후련하고 행복하다"고 말해줬다. 이씨는 "반백년 노래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무대"라고 말했다.

이씨는 1958년 여고 2학년 때 한국 민간 TV 방송인 HLKZ의 신인 발굴 프로그램 '예능 로터리'에서 가요 부문 1등을 차지했다. 이 방송을 본 작곡가 나화랑씨의 연락을 받고 오디션을 봤다. 이씨는 그 자리에서 '열아홉 순정' 등 다섯 곡을 나씨에게 받았다. 이 노래는 이씨의 데뷔곡이 됐다.

데뷔 이후 한 해에 10여 장씩 음반을 쏟아냈다. 1991년 KBS가 집계한 기준으로 그의 음반은 560장, 발표곡은 2069곡에 이른다. 지금은 2500곡으로 추산된다.

2002년 남북 동시 생중계된 평양 특별 공연과 201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렸던 한국 근로자 파독 50주년 공연까지 이씨의 노래는 세대·계층·국경을 뛰어넘어 국민의 심금을 울렸다. 이씨는 스스로를 '전통 가요 가수'라고 불렀다. "슬프면 슬픈 대로 기쁘면 기쁜 대로, 보태지도 빼지도 말고 불러야 해요. 가볍고 요란한 기교는 한두 번은 듣기 좋을지 몰라도 결국 나중에는 듣기 싫어지거든요."

반백년 노래 인생의 비결을 물었을 때, 그가 가장 많이 썼던 단어는 '정석(定石)'이었다.

문예賞 이승훈

2016 만해문예대상 수상자로 선정된 이승훈(74) 시인은 이렇게 고백한 적 있다. "난 시밖에 쓸 줄 몰라요/ 벽에 못도 박지 못하고…." 시 '고백'에서 밝혔듯, 시인은 첫 시집 '사물A'(1969)와 최근 '당신이 보는 것이 당신이 보는 것이다'(2014)를 포함해 지금껏 24권의 시집과 시선집을 출간했다.

시인은 1963년 등단 이래 끊임없이 아방가르드 정신을 추구해 왔다. '나'와 '언어' '대상'까지 버리고 시상(詩想)의 전복을 감행한 시인의 시 세계는 금강경(金剛經)을 만난 뒤 불교적 선(禪) 사상으로 전환한다. 평생을 고집해온 전위의 정신이 불교에 녹아들면서 '현대 선시(禪詩)'를 낳은 것이다. 만해대상 심사위원회는 "이승훈은 자신의 시와 시론서를 통해 현대 선시가 현대 시의 불가능성을 타파하는 첩경임을 증명하려 했다"고 밝혔다.

시력(詩歷) 53년. 시인은 "아직도 사는 게 서글픈 떠돌이 시인이자 자폐증에 시달리는 정년 퇴임 교수이자 선객(禪客)일 뿐"이라며 "언제 미칠지 모른다는 불안 속에서 시를 썼지만 이제 시는 시를 모르고 나는 나를 모른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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