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의문품지 않았던 가습기 살균제..22년간 정부는 눈뜬 장님

박인혜,이승윤,박은진 2016. 5. 15.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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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카펫세척용 화학물질 용도바꿔 판매산업부 국가인증 'KC마크' 로 날개 달아줘영유아 목숨 앗아간 첫 생활용품 치사사건

◆ 가습기살균제의 진실 ◆

"22년간 단 한 부처에서라도 합리적 의심을 했거나 내 일처럼 생각했다면 일어나지 않았거나, 피해가 이 정도로까지 커지지는 않았을 겁니다." 칼도 총도 아닌 생활용품으로 수백 명을 죽인 전무후무한 '가습기 살균제 사건'은 기업의 탐욕과 정부 부처의 부처이기주의 및 나태함이 불러일으킨 결과다. 지금으로부터 22년 전인 1994년 유공바이오텍(현 SK케미칼)이 세계 최초로 가습기 살균제를 개발했다고 밝힌 그때부터 지금까지 참사를 막을 몇 번의 기회가 있었지만 번번이 놓쳤다. 그 결과 가습기 살균제는 22년간 천천히 250여 명을 죽이고 1500여 명을 평생 고통 속에 살게 만들었다. 사망자의 절반 이상이 영유아다.

◆ 1994년

가습기 살균제라는 제품이 처음으로 세상에 나온 해다. 11월 화학기업 유공바이오텍은 총 18억원의 개발비를 들여 제품 개발에 성공했다고 밝혔다. 업체는 물에 이 제품을 넣기만 하면 각종 질병을 일으키는 세균을 완전히 죽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 제품의 핵심 성분 CMIT·MIT(클로로메틸이소티아졸리논·메틸이소티아졸리논)에는 치명적인 위험이 있었다. CMIT와 MIT는 박테리아 번식을 막아 유통기한을 늘려주는데, 피부에 닿았을 때는 유해성이 크지 않아 샴푸나 보디워시, 데오드란트 등에 광범위하게 쓰인다. 그러나 이를 코와 입을 통해 증기나 기체 상태로 흡입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얘기다. 폐에 치명적 손상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고 이미 알려져 있었던 것. 다른 나라에서 비슷한 제품을 판매하지 않았던 이유다. 이를 환경부나 산업부는 모두 인지하지 못했다. CMIT와 MIT는 정부가 '유해화학물질관리법'을 제정·시행한 1991년 전부터 쓰였다는 이유로 심사 없이 그대로 제품에 적용됐다. 비극의 씨앗이었다.

◆ 1998년

1998년, 미국 환경청은 '농약 재등록 적격 결정 보고서'를 발행한다. 보고서는 MIT를 '2등급 흡입 독성 물질'로 규정했고, 실내에선 더 빠른 속도로 흡입돼 우려된다고 기술했다. 하지만 환경부가 이 사실을 인지하는 데는 10년이 넘는 시간이 소요됐다.

◆ 2001년

진짜 문제는 2001년 발생한다. 이때 가습기 보급률이 높아졌다. 동양화학 소속이던 옥시는 문제의 가습기 살균제인 '옥시싹싹 가습기청소당번'을 출시한다. 공교롭게도 이 해는 옥시가 영국의 생활용품기업인 레킷벤키저에 인수된 그 해다.

옥시 제품은 PHMG(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를 핵심 성분으로 한다. 환경부에 따르면 PHMG는 원래 SK케미칼이 카펫 청소 및 항균용으로 개발해 검증을 통과한 성분인데 옥시가 이를 무단으로 전용했다.

파렴치한 업체도 문제지만 산업통상자원부와 환경부, 식품의약품안전처도 손 놓고 구경만 했다. PHMG라는 물질 자체가 애초에 항균 카펫 첨가제 용도로 검사를 받아 통과된 물질임에도 불구하고 가습기 살균제로 출시될 때 그 어떤 제재도 없었다. 당시 살균제는 식약처 담당이었지만 '가습기 살균제'에 대한 규정은 없었다는 것. 심지어 산업부는 2007년 세정제로 신고된 제품 중 1곳에 국가통합인증마크(KC마크)까지 부여했다. 산업부는 지난 2일 KC마크 부여 논란에 대해 "당시 살균제는 품질경영 및 공산품안전관리법에 따른 안전관리대상 공산품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를 관리할 법적 근거가 없었다"고 해명했다. 살균제처럼 강력한 물질을 관리할 '법적 근거'조차 없었다는 것이 산업부 해명이다.

대가는 참혹했다. 옥시 제품은 큰 인기를 끌었고, 이에 홀린 기업들은 앞다퉈 유사 제품을 만들었다. 11개 제조사에서 14개 제품이 나왔다.

◆ 2003~2010년

2003년 원인 미상 간질성 폐질환이 발병했고 2006년에도 원인을 알 수 없는 호흡부전증에 시달리는 어린이 환자가 동시에 입원했다.

◆ 2011~2012년

2011년 가습기 살균제 사건이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2006년부터 원인 불명 어린이 폐질환 환자가 자꾸 입원하는 것을 의아하게 여긴 서울아산병원 소아과 홍수종 교수가 전국적으로 엄청난 숫자로 늘어나고 있는 폐질환 환자들에 대한 조사를 요구했다. 질병관리본부는 역학조사에 착수했고, 8월 보건복지부는 그 원인으로 가습기 살균제를 지목했다. '생활화학용품 안전관리 종합대책' 수립을 위해 관계 부처가 모였으나 큰 성과는 없었다. 역학조사는 보건복지부 담당이라 환경부는 아예 손을 놓고 있었고, 역학조사를 하게 된 근본 원인인 오염물질 피해조사는 환경부 소관이라 손발이 전혀 맞지 않았다.

◆ 2013년

이듬해인 2013년 2월 검찰은 피해자 단체가 가습기 살균제 제조·판매사를 상대로 한 형사고발을 기소중지했다. 정부 차원에서 가습기 살균제 사건을 축소하려 한다는 이야기가 나온 이유다. 정부는 부랴부랴 '제2의 가습기 살균제 사태'를 막겠다며 5월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화평법)'을 제정해 지난해 1월부터 시행에 들어갔지만 산업부와 산업계 논리에 밀려 반쪽짜리 법으로 전락했다는 지적이 일었다. 환경부는 최근 유해화학물질 관리가 미흡하다는 점을 인정하고 국내에 유통 중인 살생물질(병원균, 세균 등 생물을 죽이는 효능을 가진 물질) 사용 실태를 전수조사하고 관리체계도 사후관리체계에서 사전관리체계로 전환하는 방안을 논의하기로 했다.

◆ 2014~2015년

2014년 8월 피해자단체는 2차 형사고발을 단행한다. 수사는 더뎠고 진척이 없었다. 2011년 일어났던 국민적 공분은 사그라들었다. 사람들은 점점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를 잊어가고 있었다.

◆ 2016년

22년이 지난 2016년, 박근혜 대통령이 "관계 기관들이 철저히 조사하고 피해자들이 제대로 구제받을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라"고 지시하면서 검찰 수사는 급물살을 탄다. 검찰은 전담 특별수사팀을 확대하는 등 부산을 떨었다. 22년 만에 당시 옥시 대표였던 신현우 씨가 검찰에 처음 소환돼 조사를 받았고 법정구속됐다. 옥시레킷벤키저도 5년간의 침묵을 깨고 마침내 공식 사과했다.

하지만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SK케미칼이 제조하고 애경 브랜드를 달고 판매했던 '가습기 메이트' 등은 옥시 제품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사상자를 냈지만 문제의 CMIT·MIT 성분에 대해선 아직도 수사가 제대로 시작되지 않았다. 피해자들은 진심어린 사과 없이 옥시가 내놓은 총 100억원의 피해자 구제를 위한 기금으로 섣불리 보상받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전무후무한 '생활용품 살인사건'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박인혜 기자 / 이승윤 기자 / 박은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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