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정상성'의 기준

전우용|역사학자 2015. 8. 30.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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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8월 초, 부산에 상륙한 미군들이 대오를 정비하는 즉시 낙동강 방어선에 투입되었다. 처음 미군은 북한군을 얕잡아 보았으나, 전투 양상은 그들이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게다가 낙동강변 고지에는 나무가 없었고 참호를 팔 시간도 없었다. 몸을 숨길 엄폐물을 찾지 못한 채 적과 마주 보면서 총을 쏴야 하는 상황에서 그들은 공포에 휩싸였다. 2차 세계대전 중 전투 경험을 쌓은 베테랑들조차 그 공포를 견디지 못했다. 전투가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면 군인들 상당수가 군의관을 찾아 정신적 불안을 호소했다. 이 전투에 참가했던 미군 1000명당 249.7명이 정신질환 판정을 받았다. 그런데 미군과 함께 처음 현대전을 치른 한국군 중에는 그런 판정을 받은 사람이 없었다. 물론 한국군의 정신력이 미군보다 월등했기 때문은 아니다. 군의관 중 정신과 의사가 거의 없었던 데다가 그런 상황에서 겪는 공포는 ‘정상’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이다.

같은 해 10월 중순, 평양에 진주한 미군은 한국군의 행동에서도 ‘비정상성’을 발견했다. “한 건물 안에서 적들이 우리에게 총격을 가했다. 우리는 창문을 향해 두 발을 쐈고 여러 명의 북한군이 손을 들고 나왔다. 나는 그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랐다. 날이 추워지고 있었으므로 나는 그들의 옷을 벗겼다. 추운 날씨에 그들이 뭘 어쩔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한국군 병사가 그들 주위를 돌더니, 갑자기 한 명을 쏘았다. 두 번째 북한군 병사가 총에 맞은 뒤, 우리는 한국군을 쫓아버렸다.”(BATTALION SURGEON, KOREA 1950-1951) 미군이 볼 때 이런 행동은 명백한 제네바 협정 위반이었고 ‘정의의 전쟁’이라는 명분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행위였으나, 한국군 대다수는 이를 전쟁 도발자들에 대한 정당한 분노의 표현으로 여겼다. 결국 미군은 한국군에게는 포로를 맡길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것이 전쟁 중 포로 관리의 전권을 미군이 쥔 이유 중 하나다.

미군은 다른 현장에서도 한국인의 ‘비정상성’을 발견했다. 미군 군의관들은 한국군 동업자들을 ‘절단의 천재’라 불렀는데, 천재라는 단어의 어감과는 달리 결코 칭찬이 아니었다. 그들이 보기에는 조금만 더 정성을 쏟으면 충분히 구할 수 있는 팔다리도 한국군 군의관들은 덮어놓고 잘랐다. 미군 군의관에게 이는 의사로서 ‘비정상적인’ 태도였으나, 적절한 재교육 기회를 얻지 못한 채 밀려드는 부상병을 신속히 ‘처리’해야 했던 한국군 군의관에게 이는 극히 ‘정상’이었다.

전쟁은 본디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인간성의 바닥을 드러내게 한다. 예의, 염치, 배려, 동정 등 인간다움을 구성하는 가치들은 완전히 소멸하거나 최저 수준만 남는다. 그런데 같이 전쟁을 치렀건만 미군의 최저 수준과 한국군의 최저 수준은 또 달랐다. 이것이 단지 남의 땅에서 벌어진 전쟁과 자기 땅에서 벌어진 전쟁의 차이에서만 기인한 것일까? 어쩌면 한국인들이 그런 전쟁을 처음 겪었기에, ‘전쟁의 규칙’과 ‘전시의 문화’에 대해 성찰할 기회를 갖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는 당대 양국민이 도달한 문명 수준의 격차를 표현한 것이었다.

남북 간에 군사적 긴장이 높아질 때면 늘 ‘전시의 기억’이 소환되며, 더불어 평시의 ‘정상성’이 후퇴하고 전시의 ‘정상성’이 전면에 나선다.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으로 치닫던 군사적 대치 상태가 해소된 바로 그날 점심시간, 식당 옆자리에 앉은 노인들의 대화가 귀에 들어왔다. “나는 이번 기회에 정말 불바다 만들기를 바랐어.” “맞아. 사람이 조금 죽더라도 속 시원하게 본때를 보여줘야 했어.” 그들은 수십만이 될지 수백만이 될지 모르는 사망자와 가족 잃은 애통함을 평생 가슴에 새기고 살아가야 할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을 ‘조금’이라고 표현했으며, 그 ‘조금’의 희생과 자기의 ‘속 시원함’을 맞바꾸는 데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다. 그런데 국제 기준에서는 ‘전쟁광’이나 할 말이라고 비난받을 저런 발언이, 지금의 한국에서는 극히 ‘정상’이다.

군사적으로 대치 중인 분단국가에 사는 한 평시의 정상성과 전시의 정상성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정상성’을 재구성하는 시점을 선택하는 것도 보통사람의 권한 밖이다. 하지만 아무리 전쟁의 기억이 거듭 소환된다고 해도, 인간성의 바닥마저 6·25 당시 수준에 묶어두어서는 안 될 터이다. 그것은 인류 문명에 대한 죄이며, 무엇보다 자기 인간성에 대한 범죄다.

<전우용|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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