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들이 그리워요" 어느 필리핀 노동자의 죽음

2011. 7. 11.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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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 이대희 기자 · 강민정 수습기자]

지난 10일 저녁 8시 서울 동대문구의 한 고시원에서 40대 필리핀 출신 남성 이주노동자가 숨진 지 나흘 만에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지갑 안 가족사진으로 두 아이의 아버지이자 한 여인의 남편임을 확인할 수 있는 그의 이름은 래니 사손(45).

한 달에 13만원을 주고 살던 한 평도 안 되는 고시원 방에는 눅눅한 침대 매트와 책상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오래된 냉장고 안에는 소금과 간장, 물 그리고 바닥이 보이는 빈 잼통만이 나뒹굴었다.

사손씨가 3년 전부터 지내던 이 방에는 손바닥 만한 창문 하나 없었다.

단돈 2만원만 더 내면 창문이 딸린 방을 얻을 수 있었지만 가족에게 1원 한 푼이라도 더 보내기 위해서라도 그는 돈을 아껴야 했다.

가족. 가족을 위해서라면 한 여름 더위에 선풍기도 없이 밀폐된 방도 견딜 수 있는 그였다.

가족은 사손씨가 멀고 먼 타향인 대한민국의 고된 환경 속에서 친구도 거의 없이 버텨내는 단 한 가지 이유였다.

사손씨는 일터에서도 '1평'을 벗어날 수 없었다.

남들은 아늑한 집에서 가족과 함께 잠든 시간에, 필리핀에서 온 한 아버지는 그렇게 한 달에 130만원을 받으면서 1평도 안 되는 작업실에서 옷에 자수를 박으며 하루 10시간을 묵묵히 일했다.

◈"필리핀인이 왜 동료인가. 다 죽어가는 애 일 시켜놨더니…"

고혈압으로 고통 받던 그였지만 병원에 가기도 쉽지 않았다.

어렵게 병원에 갔지만 16년 한국 생활에 일만 해온 탓인지 '알겠어요', '내일까지 방 값을 줄게요' 정도의 간단한 한국어만 가능했기에 자신의 증세를 설명할 수 없어 병세를 키웠다.

아파도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눈치가 보여 회사에 쉰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꿈에 그리던 가족을 16년 동안이나 보지 못했지만, 자신이 송금하는 한 달 100만원 남짓한 돈으로 가족의 생계비와 자식들의 학비를 댈 수 있기에 견딜 수 있었다.

그렇게 보낸 학비로 필리핀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한 장성한 아들이 최근 한국으로 취업을 오겠다는 소식을 전했다.

하지만 16년 만에 아들을 볼 꿈에 부풀어 있던 사손씨의 꿈은 죽음으로 영영 이루지 못하게 됐다.

경찰은 사망원인을 지병에 의한 돌연사로 추정하고 있다.

고인이 일했던 회사 관계자는 "난 한국 사람이다. 필리핀인이 왜 동료인가. 다 죽어가는 애 일 시켜놨더니…"라고 말할 뿐 망자에 대한 어떤 위로도 하지 않았다.

노트에 적힌 사손씨의 마지막 메모는 결국 유서가 돼버렸다.

"작업장이 너무 시끄러워 당신의 전화를 받을 수 없어요. 미안해요. 나는 너무 바빠요. 당신과 애들이 그리워요. 신의 축복이 함께 하길"2vs2@c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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