뵈는 게 없다

2010. 12. 10.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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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맛있는 뉴스]

뵈는 게 없다.

이마가 아궁이처럼 달아오르는 고열에 시달린다. 3일 정도 굶는다. 혹은 수면제 10알을 한꺼번에 먹는다. 그러면 나타나는 현상이다. 밥은 밥으로 안 보이고, 책은 책으로 보이지 않는다. 현실과 비현실은 구분이 없어진다. 그 경계에서 초현실의 세계가 펼쳐진다. 머릿속에 굳어졌던 고정관념은 깨진다. 상상은 날개를 편다. 벨기에의 초현실주의 거장 르네 마그리트가 그린 그림(왼쪽 아래)을 본다. 그는 파이프 그림을 그려놓고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밑에 써놓았다. 사람들은 어리둥절했지만, 그는 맞았다. 그림 속의 파이프는 파이프가 아니다. 파이프에 최대한 비슷하게 그린 그림일 뿐이었다. 여기서 관념의 파격이 이뤄졌다. 우리는 이를 예술이라고 했다.

마그리트가 울고 갈 천재 예술가가 우리 곁에 있었다. 그분은 처참한 잔해가 남은 현장에서 즉흥적인 행위예술을 하셨다. 집권당의 대표인 그에게는 '이것은 보온병이 아니다'. 따뜻한 물을 담았던 보온병은 며칠 전 갑자기 불꽃을 뿜으면서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의 눈에는 그랬다. 분명 환각이다. 그는 취하지도 않았고, 아프지도 않았고, 굶지도 않았다. 그래서 눈 뜨고도 볼 것을 안 본, 혹은 안 볼 것을 본, 그의 '아트'는 위대하거나 미스터리다.

뵈는 게 '아예' 없다.

한 단계 더 높은 경지다. 물건이 아니다. 숨 쉬고 말하는 사람 얘기다.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 수준이다. 눈 뜬 사람이, 야구방망이를 13번 휘둘러 때려도 되는 '물건'이 된다. 휴지를 입 안에 물리고 뺨을 때려도 되는 '오브제'가 된다. 그래도 한 대에 100만원씩 돌려주면 된다. 탱크로리를 모는 52살의 한 남성은 초현실적인 행위예술의 대상이 된다. 현실적인 맥락에서 이 이야기를 들으면 이해하기 힘들다. 용납하기 버겁다. 제발 '뵈는 게 아예 없는' 예술의 경지로 이해해야 한다. 사과를 요구012했을 때, 때린 쪽의 답도 초현실적이다. "사실 2천만원어치도 안 맞았다." 곧이곧대로 들으면 위험해진다. 이 사건에 놀란 사람들이 성금이라도 하면 어떨까. 그 액수만큼, 가해자를 다시 때려도 된다는 얘기가 된다. 따라서 그의 말과 행동은 현실적으로 들으면 안 된다. '행위예술'을 했을 때, 그는 분명히 취했거나, 아프거나, 굶었다. 그렇게 믿어야 한다. 그의 '창조성'은 지나치게 뵈는 게 없다. 경찰에 출두한 그에게 "돈 주면 사람 때려도 되냐"고 누군가 물었다. 그는 "물의를 빚어 죄송하다"고 말했다. 그가 말한 '물의'가 무엇일지 궁금하지만, 묻지 않는 게 낫겠다.

'뵈는 게 없는 것'이 뵈지 않는다.

한 방송은 앞에서 나온 보온병이 포탄으로 둔갑한 사연에 침묵했다. 다른 방송에서는 모두 이를 비중 있게 보도했을 때, 유독 눈을 감았다. '돈 주고 사람 때린' 초현실적인 이야기는 9시 뉴스의 끄트머리에 '간추린 단신' 세 개 가운데 하나로 나왔다. 거두절미하고 딱 한 문장으로 나갔다. 앞에 32개의 뉴스가 나간 뒤였다. 다른 방송에서는 저녁 뉴스에서 다루고, 앵커가 모두 한마디씩 코멘트를 했다. 이를테면 이런 말이었다. "(경찰이) 소환장만 보내고, 자진 출석할 때까지 기다린다는군요. 반대로 노동자가 재벌 2세를 때렸더라도 경찰이 이렇게 느긋하게 기다릴 수 있었을까요?" 남들에게는 다 보였다. '뵈는 게 없는 행동'이 그들에게는 유독 뵈지 않았다. 그 방송이 요즘 시청료를 올려달라고 떼를 쓰고 있다. 방송통신위원회에서도 한국방송의 시청료를 월 2500원에서 3500으로 올리는 안을 검토하고 있다. 날이 점점 추워지고 있다. 시청료 낼 돈 있으면 조금 더 모아서, 작은 보온병이나 하나 장만해야겠다. 포탄 말고.

김기태 기자 kk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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