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성향도 스펙?" 신념 포기하는 '취준생들'

김종훈 기자 2015. 11. 10. 0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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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념 벗어난 '정치성향 스펙' 쌓기, 직무 무관한 면접 질문도 논란.."전형 개선·면접관 교육" 기업의 '몫'

[머니투데이 김종훈 기자] [신념 벗어난 '정치성향 스펙' 쌓기, 직무 무관한 면접 질문도 논란…"전형 개선·면접관 교육" 기업의 '몫']

지난달 26일 오전 경기도 성남시 한국잡월드에서 열린 일자리 박람회에서 구직자들이 면접 부스를 살펴보고 있다./ 사진=뉴스1

#취업준비생 김모씨(27)는 올해 상반기에 치러진 한 저축은행 채용 면접에서 질문 하나 받지 못하고 탈락했다. 세월호 관련 단체에서 활동한 경력이 문제였다. 면접관은 "이런 곳에서 활동했으면 회사 와서도 시위만 하는 것 아니냐"며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김씨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했을 뿐인데 이런 식으로 부메랑이 돼 돌아올 줄 몰랐다"며 "다시는 활동 경력을 이력서에 적지 않겠다"고 토로했다.

#야당을 지지하는 취업준비생 A씨는 지난달 새누리당 산하 단체에 가입했다. '보수 성향 이력을 쌓으면 면접관들에게 잘 보일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서 내린 결정이었다. 그러나 보수 성향 일색의 구성원들과 함께 일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특히 A씨는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문제에 대해 토론하면서 "국민 대다수가 국정교과서를 반대한다고 볼 수 없다"는 말에 조목조목 반박하고 싶었지만 '스펙'을 위해 참을 수밖에 없었다.

청년들이 장기적인 취업난으로 인해 정치 신념까지 '스펙화'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업무 능력을 최우선으로 평가한다고 내세우면서도 실제 면접 등에서는 정치적 성향을 문제삼는 기업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능력'보다 '이념'? 면접장서 '사상검증' 논란

9일 대통령직속 청년위원회에 따르면 지난 7월 기준 취업준비생 505명 중 50.1%가 '채용 과정에서 업무와 무관한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고 답했다. 설문조사에서 나타난 '업무와 무관한 질문' 중에서는 정치 신념과 관련된 내용도 상당수라는 것이 구직자들의 설명이다.

실제로 아모레퍼시픽은 최근 신입사원 면접에서 정부가 강행하고 있는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에 대한 질문을 제시해 질타를 받았다. 면접 당사자였다는 B씨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역사를 바라보는 눈은 다양해야 한다"며 국정교과서에 반대하는 답변을 내놨고 '탈락했다'고 밝혔다. B씨는 "영업관리직무를 수행하는데 국정교과서에 대한 견해가 왜 필요한 지 모르겠다"며 결과를 이해할 수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이에 대해 아모레퍼시픽 측은 "지원자의 사회에 대한 관심과 답변 스킬, 결론 도출의 논리성 등을 평가하기 위함이었을 뿐"이라고 해명했지만 이를 두고 "사상검증이냐"는 반발이 거세게 일었다.

A씨는 "기업들은 구직자들에게 '자신만의 신념', '도전 정신' 등을 가지라고 강조하는데 전혀 공감할 수 없다"며 "신념까지 팔아서 취직해야 하는 게 요즘 현실"라고 말했다.

9일 오전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2015 리딩 코리아 잡 페스티벌에서 구직자들이 등록을 위해 길게 줄을 서서 자료를 살피고 있다./ 사진=뉴스1

◇"정치 관련 면접 질문, 세대간 불신 조장"…"전형 개선·면접관 교육" 기업의 '몫'야권과 시민단체들은 청년들 사이에서 민주주의 기본 가치인 '다양성'이 기업 논리에 의해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다고 우려했다. 안효상 노동당 대변인은 "면접관들이 직무가 아닌 정치 이슈나 노동조합 활동에 대한 의견을 묻는 것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라며 "신입사원 채용에서부터 청년들을 사회적으로 길들이려는 시도로 볼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취업시장에서 나타나는 갈등이 다시 한 번 '세대갈등'으로 비화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임운택 계명대 사회학과 교수는 "면접장에서 직무와 상관 없는 정치 이슈를 묻는 것은 정치권을 염두에 둔 노이즈마케팅에 불과하다"며 "기득권에 충성하고 아첨하는 능력을 확인하는 절차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반면 주요 기업 인사담당자들은 정치·사회적 현안 질문은 지원자의 논리적 사고 능력을 평가하기 위한 측면도 있다는 입장이다. 한 대기업 채용담당자는 "기업은 단순히 직장 내에서 실무만 하는 사람이 아닌 사회 각계와 소통할 수 있는 인재를 필요로 한다"며 "채용 과정에서 정치·사회 현안에 대한 질문을 아예 배제하는 것은 오히려 좋은 인재를 가려내는데 장애가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결국 취업 시즌마다 되풀이되는 이 같은 논란은 채용 과정에서 '갑'의 위치인 기업들이 해결에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다. 한 취업 컨설팅사 관계자는 "기업들이 한 쪽의 정치색을 강요하는 인상의 전형을 개선하고, 각종 현안에 대해 구직자들과 유연하게 대화할 수 있도록 면접관들을 교육해야 한다"며 "채용 과정의 논란은 회사 전체 이미지에도 타격을 줄 수 있는 만큼 기업마다 전향적인 고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종훈 기자 ninachum24@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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