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세상] 그날 의정부엔 '義人(의인)의 동아줄'이 내려왔다

정경화 기자 2015. 1. 13.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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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오전 9시 30분쯤 경기 의정부시 10층짜리 대봉그린아파트 1층에서 난 불이 위층으로 번졌다. 불길은 바로 옆 드림타운 아파트로도 옮아 붙고 있었다. 두 아파트 사이의 폭 1.6m 골목길. 그곳에서 올려다보이는 대봉그린 3층 창문에 20대 여성 2명과 남성 1명이 "살려달라"며 매달려 있었다. 지상에 있던 한 남성이 가스배관을 타고 올랐다. 그는 둥글게 사린 밧줄을 어깨에 걸고 있었다. 3층을 지나 4층 가스배관에 밧줄을 묶어 고정시킨 그는 밧줄을 타고 3층으로 내려왔다. 그는 밧줄 반대편 끝을 사람 몸통 정도로 동그랗게 묶어 한 명씩 고정시킨 뒤 천천히 1층으로 내려보냈다. 그는 밧줄을 두 팔로 잡고 창문턱에 발을 대고 버텼다. 그렇게 3명을 모두 내려보내느라 손아귀에 맥이 빠져버린 그의 귀에 다시 비명이 들렸다. 고개를 내밀어 보니 6층과 7층, 8층에 사람이 있었다. 그는 가스배관에 묶었던 밧줄을 푼 뒤 배관을 타고 다시 1층으로 내려왔다. 아직 불길이 출입구를 막지 않은 바로 옆 드림타운 아파트로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대봉그린 옥상으로 훌쩍 건너뛴 그는 옥상 난간에 밧줄을 묶고 아래로 내렸다. 3층에서 한 것처럼 6층, 7층, 8층에 있던 7명을 차례로 땅으로 내려보냈다.

화마 속에서 주민 10명을 구한 이 남성은 우연히 화재 현장 앞을 지나던 시민 이승선(51)씨였다. 사망 4명, 중경상 126명 등 사상자 130명을 낸 화재 현장에서 이씨가 가져온 길이 30m 밧줄과 키 178㎝, 몸무게 84㎏ 건장한 그의 몸과 팔뚝은 '인간 완강기'가 됐다.

그는 오전 9시 20분쯤 승합차를 몰고 일하러 가던 길에 검은 버섯구름이 피어오르는 걸 보고 현장에 달려왔다. "차량 3대가 불타면서 타이어가 폭발해 폭탄이 터지는 것처럼 무서웠어요." 곧이어 달려온 소방관들이 불 끄느라 정신이 없을 때였다. 이씨는 창문에 매달려 비명을 지르는 주민들을 발견했다.

그는 자신의 승합차로 달려가 생수 2병과 밧줄을 꺼내왔다. 그러곤 바로 가스배관을 타고 올랐다. 크레인을 타고 빌딩 외벽에 간판을 다는 일을 하는 이씨는 "늘 100~300㎏짜리 간판을 들고 내리느라 힘은 자신이 있었다"고 했다. 30m 길이, 엄지손가락 굵기의 밧줄은 작업할 때 추락을 막는 생명줄이었다. 3층에서 첫 3명을 구한 뒤 그는 주저앉아 생수를 들이켰다. 이씨는 "위층 사람들의 절박한 눈빛을 보고 다시 힘을 냈다"고 말했다.

옆 건물을 통해 올라간 대봉그린 10층 옥상 난간에 밧줄 한쪽 끝을 묶었다. 그는 "여러 번 묶어야 안전하지만 밧줄이 30m밖에 안 돼 딱 한 번만 감았다"고 했다. 밧줄을 아래로 내려 6층에서 4명, 7층에서 2명을 구했다. 8층엔 20대 여성 1명이 있었다. 8층의 여성은 밧줄을 몸에 묶고도 24m 높이 난간에서 발을 떼지 못했다. 이씨는 "나를 믿어요. 살 수 있어요. 무서우면 눈을 감고 딱 10초만 세면 땅이에요!"라고 소리쳤다. 그는 두 팔과 몸으로 10명의 몸무게를 버텼다.

12일 이씨는 팔뚝에 파스를 붙이고 있었다. 손등은 상처투성이였다. "그분들이 누구인지도 모르지만 제가 고맙죠. 그 높은 데서 저를 믿고 밧줄에 의지해서 내려가기가 쉽지 않았을 거예요." 이씨는 "이번에 소방관들이 저승을 오가는 사람들이라는 걸 알았다"고 했다. 여동생과 함께 6층에 갇혀 있다 이씨가 내려준 밧줄에 매달려 탈출한 홍모(23)씨는 "너무나 침착해서 소방관인 줄 알았는데 일반인이라니 놀랍고도 감사하다"고 말했다. 의정부소방서 박종환 소방관은 "진화하느라 뛰어다니며 그분이 배관 타고 올라가 한 명씩 내려보내는 걸 봤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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