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 여객선 침몰 / 왜 탈출 못했나] 배 가라앉는데 "船室(선실) 대기하라" 방송만 10여차례
이번 세월호 침몰 사고의 최대 미스터리는 배가 2시간20분이나 떠 있었는데 왜 그렇게 배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승객이 많았느냐는 점이다. 세월호는 오전 8시 55분 침수가 시작됐고, 승객들은 오전 9시부터 구명조끼를 입었다고 한다. "여객선 침몰이 임박했으니 탑승객은 바다로 뛰어내리는 상황에 대비하라"는 선내 방송이 나온 건 첫 침수 시점부터 약 한 시간여가 지난 10시 15분이었다. 구명조끼를 입은 승객들이 선실을 나와 바다로 뛰어들 수 있는 여유가 최소 한 시간 이상 있었던 셈이다. 그로부터 다시 한 시간이 지난 뒤 배는 완전히 침몰했다.
전문가들은 '선실에서 움직이지 말고 기다리라'고 한 선내 방송이 승객들의 발목을 잡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해난 인명 구조 전문가인 배민훈씨는 "최초 조난 신고를 하고 '객실에서 움직이지 말라'는 안내 방송이 있었다"며 "그 안내 방송 때문에 사람들이 객실에서 대기하다가 귀중한 한 시간을 허비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 시간에 구명조끼를 착용하고 배 밖으로 뛰어내려 구출되기를 기다렸어야 했다는 것이다. 배씨는 "최초의 그 한 시간이 너무 아깝다"고 말했다.
한국잠수산업연구원 정용현 원장도 "침수가 시작되고 배가 기우는 동안 사람들이 왜 대피를 안 했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정 원장은 "사람들이 '움직이지 말고 앉아 있어라'는 방송 때문에 선실에 있다가 뒤늦게 탈출하려 했지만 배가 뒤집히고 물이 차서 나가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실제로 목숨을 구한 승객들은 대개 '그대로 있으라'는 방송을 믿는 대신 행동을 택한 쪽이었다. 안산 단원고 엄찬호군은 "배가 서서히 기울다가 '쿵' 하고 완전히 기울었는데 '위험하니까 움직이지 말라'는 선내 방송이 10여 차례나 반복됐다"고 말했다. 사고 당시 4층 선실에 있었다는 엄군은 "방송을 믿을 수 없어 구명조끼 차림으로 복도로 나온 뒤 배 밖으로 나왔다"고 했다. "그 말대로 했으면 어떻게 됐을지 모르겠어요." 1층 3등실 맨 앞방에 있던 신영자(여·71)씨도 "'움직이면 위험하니 가만히 있으라'고 방송했다"고 말했다. 일행 중 한 명이 "그게 말이 되느냐. 어떻게 조치를 해야 하지 않으냐"고 해 신씨도 함께 위쪽으로 올라왔다고 했다.
배민훈씨는 "첫 선내 방송이 나왔을 때 구명조끼를 입고 차라리 물로 뛰어내렸다면 구조될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구조 선박이 바로 오지 않았더라도 사고 해역의 조류가 지금이 가장 강한 철이어서 인근 해역을 운항하는 배나 섬에서 구조됐을 수 있다는 말이다. 만약 지금까지 선실에 갇혔다면 구조될 가능성은 극히 낮다고 그는 말했다.
선내 방송에서 "바다로 뛰어내릴 준비를 하라"는 경고가 나온 것은 첫 선내 방송이 나온 지 한 시간 만이었다. 한국해양구조협회 황대식 본부장은 "그때는 이미 배가 거의 90도로 기울면서 이동에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황 본부장은 "승객들로서는 서 있던 땅이 벽으로 바뀌어 문을 열기도 걸음을 떼기도 힘겨운 상황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용현 원장도 "배가 기울고 침수까지 된 상황이라면 승객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가장 큰 문제는 어둠"이라고 그는 말했다. 정 원장은 "전기가 없으면 배는 완전히 캄캄해진다"며 "그런 상황에서 갑판과 천장이 뒤바뀐 선실 상황이었으니 승객들은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알기가 힘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계단 7~8곳을 거쳐야 갑판으로 나올 수 있는 아래층 선실이라면 올라오는 길을 찾기는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배민훈씨는 "배가 기울어지면 물체가 떨어져 부상당했을 가능성이 크고 중심 잡기도 힘들어 공황이 온다"고 말했다. "만약 선실이 침수 속도가 빨랐던 선미 쪽에 있었다면 더더욱 탈출하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배씨는 "구명보트도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그는 "원래 선박 사고가 나면 저절로 구명보트가 에어백처럼 터져서 뜬다"며 "그것도 전혀 작동 안 했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세월호에는 25승짜리 구명벌(천막처럼 펴지는 둥근 형태의 구명보트)이 46개 장착돼 있지만 딱 한 개만 펴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론적으로 1150명이 몸을 의지할 수 있는 도구가 있었지만 거의 사용하지 못한 것이다. 구명벌이 없어 현장에서는 적지 않은 승객들이 구명조끼에만 의지한 채 바다에 뛰어들었다.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진도 여객선 침몰 / 망연자실 학교·가족] '환갑기념 여행' 초등생 동창들, 17명 중 5명만 구조
- [진도 여객선 침몰 / 망연자실 학교·가족] "나 아직 안 죽었어.. 안에 사람 있어" 怪문자 소동
- [진도 여객선 침몰] "朴대통령, 뜬 눈으로 밤새워"
- [진도 여객선 침몰 / 망연자실 학교·가족] '단원高의 비극'.. 2학년 325명 중 생존 확인 75명뿐
- [진도 여객선 침몰 / 왜 탈출 못했나] "배가 많이 넘어갔다"→"인명 피해는"→"확인 불가"
- 오너가 이재명과 같은 경주 이씨라고… 사직한 사외이사가 李캠프 있었다고…
- 특별 단속 한다더니 손놓고 있는 금감원
- 정치 테마주 급등에 대주주 먹튀… 투자자 83% 손해 봤다
- [팔면봉] ‘이재명 선거법 사건’ 속도 내는 大法 전합 외
- 그래도 결혼은 11개월째 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