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적한 최필립 정수장학회 이사장 44일간 추적기

경향신문

"좀 더 붙여 주세요!" 취재차량 기사님을 채근했다. 최필립 정수장학회 이사장 추적 23일 만에 최 이사장에게 가장 가까워졌다. 최 이사장의 차가 눈 앞에서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차창에는 두 개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하나는 이사장 운전기사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틀림없이 최 이사장일 것이다. 놓칠 수 없었다. "더 못 붙여." 기사님도 이미 최선을 다해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최 이사장의 차는 너무 빨랐다.

최 이사장의 차량을 따라 올림픽대로에 진입했다. 차량 간격은 200m 이상 벌어졌다. 속이 탔다. 2차로를 달리던 최 이사장의 차는 동호대교가 가까워오자 5차로로 급하게 바꿨다. 동호대교를 건널 것으로 보고 취재차도 급하게 차선을 넘었다. 다른 차량 역시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어 차선 변경이 쉽지 않았다. "안돼요. 차선 다시 바꿔요!" 기사님에게 급박하게 소리쳤다. 동호대교 진입로가 가까워질 즈음 최 이사장의 차량이 다시 차선을 넘었기 때문이다. 최 이사장의 차는 동호대교를 타는 것처럼 하다가 다시 올림픽대로로 나아갔다.

간신히 동호대교로 나가는 것은 피했지만 간격은 더 벌어졌다. 미행을 들켰음이 확실해졌다. 애초에 미행이랄 수 없었다. 취재차량에는 '경향신문' 마크가 버젓이 찍혀있었기 때문이다. 최 이사장의 차량은 2차로를 달렸다. 이대로 달린다면 부산행이다. '부산일보 건으로 부산에 가는 건가.' 잠깐 사이 여러 생각이 스쳤다. 영동대교 근처를 지나갈 즈음, 최 이사장의 차는 갑작스럽게 차선 변경을 시도했다. 2차로에 있던 차량이 순식간에 6차로 영동대교 진입로로 들어갔다.

취재차량도 급히 차선 변경을 했다. 하지만 강남대로로 진입하려는 차량들이 5차로에 길게 늘어서 있는 바람에 6차로로 바로 변경할 수 없었다. 어떻게든 놓치지 않기 위해 최 이사장의 검은색 SUV 차량을 눈으로라도 쫓았으나, 차량은 이내 시야에서도 사라졌다. 11월5일 오전 11시30분. 취재진은 또, 최 이사장을 놓쳤다. 돌아오자마자 취재차량의 회사 로고를 가리는 작업부터 했다. 23일 만에 얻은 교훈이었다.

경향신문 사회부 이효상 기자가 30일 최필립 정수장학회 이사장을 취재하기 위해 서울 청담동 최 이사장의 자택 근처에서 최 이사장을 기다리고 있다. | 정지윤 기자

▲ 자택 깜깜하고 전화·문자도 안 받아
죄 지은 것도 아닌데 철저하게 은신
장학회 이사·직원들도 모르쇠 일관


10월13일 최필립 정수장학회 이사장과 이진숙 MBC 기획홍보본부장 간의 회동 사실이 언론에 보도된 다음날부터 최 이사장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공개된 대화록에는 'MBC 지분의 매각을 통한 부산·경남지역 반값 등록금 지원' 같은 내용이 포함돼 있었지만 양측 모두 입을 닫아 입장을 확인할 수 없었다.

당사자들의 침묵에도 정수장학회를 둘러싼 논란은 계속됐다. 공은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 후보에게 넘어갔다. 박 후보는 2005년 정수장학회 이사장에서 퇴임한 이후 줄곧 장학회와는 상관이 없다는 입장을 유지해왔다. 하지만 이번만은 박 후보도 정수장학회 문제를 직접 정리할 것이라는 관측이 적잖이 제기됐다.

10월21일 박 후보는 기자회견을 열고 정수장학회에 대한 입장을 발표했다. 기자회견에서 박 후보는 "정수장학회 이사진이 부정부패와 연루됐다면 물러나야겠지만 설립자와 가까운 사람이라는 이유로 물러나라는 것은 옳지 못한 정치공세"라며 "이사장과 이사진은 국민에게 해답을 내놓으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기존 입장에서 한 치의 변화도 확인할 수 없는 기자회견이었다. 이날 저녁 최 이사장은 한 방송사와의 인터뷰에서 "지금 현재 누구도 이사장직에 대해서 '그만둬야 된다' 혹은 '해야 된다'고 말할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며 사퇴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것이 최 이사장이 언론에 공개된 마지막 모습이었다.

하루 만에 논란의 중심에 있던 두 사람이 차례로 '정수장학회'에 대한 입장을 밝혔지만 애초 문제의 시발점이던 'MBC 지분 매각'과 관련한 해명은 누구에게도 들을 수 없었다. '공영방송 MBC의 지분 매각을 구상한 사람이 누구였는지' '매각 대금을 특정 지역의 복지사업 재원으로 사용하려는 데 정치적 의도는 없었는지'를 듣기 위해 최 이사장에 대한 추적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10월14일 처음으로 최 이사장의 서울 강남구 청남동 집 앞에서 그를 기다릴 때만해도 이 추적이 44일 동안 계속될 줄 몰랐다. 며칠 지나지 않아 최 이사장이 모습을 드러내리라고 생각했다. 정수장학회 다른 이사들의 말처럼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굳이 몸을 숨길 이유는 없다고 봤다. 하지만 최 이사장의 잠행은 철저하고 끈질겼다.

최 이사장이 집에 나타나지 않는 상황이 길어지자 정수장학회 측의 소명을 듣기 위해 다른 이사 4명과 접촉을 시도했다. 이사들 집 앞에서 며칠씩 기다렸지만 이들은 한결같이 자신들은 모르는 일이라고 발뺌했다. 10월23일 강남구 자택 앞에서 기자와 만난 김덕순 이사는 'MBC 지분 매각'에 대해 "우리 이사장이 듣는 입장이었다"라며 "더 이상 대화하려고 하지 말라"고 말했다.

최성홍 이사, 송광용 이사 역시 "자신들은 모른다"며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심지어 신성오 이사는 "얘기 안할 것"이라며 "더 이상 물어보면 화를 내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정수장학회 사무실 측도 마찬가지였다. 이창원 정수장학회 사무처장은 'MBC 지분 매각'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했다. 정수장학회라는 공익재단에서 결국 이 사태에 대해 소명할 수 있는 사람은 최 이사장밖에 없었다. 그런 최 이사장이 종적을 감춘 것이다.

최 이사장의 집은 조용했다. 저녁이 돼도 불빛 하나 새어나오지 않았다. 휴대폰이나 집전화는 아무리 걸어도 받지 않았다. 정식으로 인터뷰를 요청한다는 내용의 문자메시지를 하루에 몇번씩 보냈으나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다시 정수장학회 4명의 이사들을 뒤쫓았다. 이사들도 전화를 안 받기는 마찬가지였다. 김덕순 이사는 간혹 전화를 받았는데 기자라고 신분을 밝히면 언제나 "운전 중"이라고 응답했다. 오며가며 마주친 이사들의 말을 종합하면 최 이사장은 서울에 있었다. 집에는 들어가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다고 호텔에서 묵는 것도 아니라고 했다. '인터뷰를 왜 피하느냐'고 물으니 "어떤 의도로 말하건 기자들이 자기들 편한 대로 말을 바꿔버리니까"라는 답이 돌아왔다. 이사들의 의견을 참고해서 최 이사장에게 "인터뷰 내용은 전문을 인터넷에 싣겠다"거나 "왜곡하거나 조작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추가했다. 그래도 응답은 없었다.

정수장학회 이사들과 직원들에게서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10월31일부터는 전략을 바꿔 최 이사장의 운전기사를 추적하기로 했다. 하지만 간신히 알아낸 운전기사의 집에서도 사람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운전기사 집 앞에서 대기한 지 3일이 지났을 무렵,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집에서 운전기사가 나왔다. 운전기사는 청담동 최 이사장 집으로 출근해 차를 가지고 움직였다. 숨죽이며 기다리기도 하고 살금살금 미행하기도 했다.

기자를 피하기 위해서였는지 최 이사장 운전기사는 적어도 4대 이상의 차량을 사용하고 있었다. 최 이사장의 차라는 것을 간신히 알아내면 다음날은 새로운 차를 타고 움직였다. 차량을 붙잡아도 허탕을 치기 일쑤였다. 대개 빈차거나 최 이사장의 가족이 타고 있었다. 최 이사장의 모습은 확인할 수 없었다.

처음 차를 막아설 때 운전기사는 불같이 화를 냈다. "한번 뵙고 인터뷰를 요청하고 싶을 뿐"이라고 말하자 운전기사도 더 이상 화를 내지 않았다.

44일이 흐르는 동안 날은 점점 짧아졌고 동장군은 성큼성큼 다가왔다. 추위를 견디기 힘들었다. 핫팩이 없었다면 하루 18시간씩 밖에 서있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더 견디기 힘든 것은 단 한번도 최 이사장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는 점이다. 끝내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추위보다도 힘겨웠고 조바심나게 했다. 최 이사장의 대답을 독자들께 전하지 못해 죄송할 따름이다.

마지막으로 최필립 이사장에게 한말씀 드리고 싶다. "진지는 드시고 다니십니까. 여전히 인터뷰하고 싶습니다. 이 기사 읽고 마음 바뀌시거든 연락주세요."

< 이효상 기자 hslee@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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