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년간 작은 함성, 세계로 증폭되다

원희복 선임기자 2016. 1. 9.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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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원희복의 인물탐구] 한국정신대대책협의회 윤미향 상임대표

1월 6일, 서울 종로구 중림동 주한일본대사관 앞은 갑자기 닥친 소한 추위로 쌀쌀했다. 그러나 한국정신대대책협의회(정대협)가 주최하는 이번 ‘수요집회’에는 많은 인파가 몰렸다.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정부의 어설픈 합의에 대한 분노에다 마침 이번 수요집회가 24주년을 맞았기 때문이다. 1212번 열린 이 수요집회는 세계에서 가장 장기간 열린 집회 기록을 계속 경신하고 있다.

단상 옆에서 식전행사로 치러지는 오세란씨의 춤 공연을 말없이 지켜보는 한 여성이 있다. 옆에 앉아 있는 한 남자는 추위 때문에 손장갑에 얼굴을 감싸고 있었지만 그는 아스팔트에 ‘철퍼덕’ 주저앉아 있었다. 춤 배경음악으로 “그 눈물의 꽃이 되는 날, 그때를 기다리며 사는 거야…”라는 슬픈 노랫말이 이어졌다. 그의 표정에는 슬픔도, 분노도, 참담함도, 그리고 일면 허탈함도 보였다.

그는 마이크를 잡고 단상에 오르자 큰 목소리로 “안녕하세요, 여기에 평화가~ 여기에 역사의 정의가~ 와 함성 외쳐봅시다”라고 좌중을 장악했다. 참가자들은 그의 구호에 맞추어 크게 “와~”소리를 냈다. 작은 체구의 큰 함성, 그는 윤미향 정대협 상임대표다.

한국정신대대책위원회 윤미향 상임대표가 1월 6일 열린 1212차 수요집회에 참석해 어린 학생들의 공연을 보며 박수를 치고 있다. / 이상훈 선임기자

수요집회 여는 “와~” 함성 성서서 힌트 24년 전인 1992년 1월 8일 열린 첫 수요집회는 일본 총리의 방한을 계기로 시작됐다. 수요집회에서 “와~”하는 함성은 성서적 의미가 있다. 이 수요집회는 한국교회여성연합회가 모태가 됐다. 성서에는 광야를 떠돌던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으로 가는 길목을 막는 견고한 여리고 성을 “와~” 소리를 지르며 7바퀴 돌자 무너졌다는 기록이 있다. 여성 회원들이 이 성서에 힌트를 얻어 함성을 지르며 일본대사관을 도는 방식으로 시위를 한 것이다. 그렇게 시작한 수요집회가 24년 지났다. 물론 이렇게 오래 지속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윤 상임대표는 처음 수요집회를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처음 시위를 할 때 가장 가슴 아픈 것은 시민의 반응이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저 할머니들이 일제 정신대에 갔던 할머니들이래, 그게 뭐가 자랑이라고 시위를 해’라고 비웃으며 한마디할 때면 오싹함과 당혹감이 들었다. 그래서 처음에 시위를 할 때 할머니들은 피켓으로 얼굴을 가리고, 모자를 쓰기도 했다. 할머니 중에는 양자를 들이거나 조카를 자식처럼 키워 결혼시킨 사람이 있었는데, 사돈댁이 얼굴을 보고 뭐라고 해 나오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지금은 할머니들을 보는 국민의 시선이 과거와 많이 달라졌다.”

1991년 1월 정신대 문제를 본격 제기하는 정대협이 만들어졌는데 아무도 지원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 여신도회 전국연합회에서 일하던 윤미향은 초대 간사를 자원했다. 그리고 24년간 정신대 문제를 국민들에게 각인시키고 헌법재판소 등을 통해 ‘정부의 미온적 태도는 위헌’이라는 사법적 근거도 마련했다. 이제 정신대, 종군위안부 문제는 전쟁과 인권침해 문제로 국제적 이슈화가 됐다.

정대협이 수요집회를 통해 일관되게 요구했던 것은 정신대가 일본 정부가 자행한 국가범죄임을 인정하고, 정부의 책임자가 사과하며, 합당한 배상을 하라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도 “피해당사자가 납득하고 관련 단체가 수긍하는 요건을 충족하지 않으면 진정한 한·일관계 정상화는 없다”고 누차 공언했다.

이곳에서 24년간 함성을 지른 사람도 대단하지만, 그 함성에도 끄떡하지 않은 ‘일제 군국주의 성’도 대단했다. 오히려 일본의 우경화는 더욱 기승을 부리고 최근에는 군국주의 부활 움직임까지 보이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 정부는 지난 70년간 이 문제에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다가 지난 12월 28일 피해당사자는 물론 국민들도 납득할 수 없는 합의를 일본과 하고 말았다. 사전에 협의나 동의는커녕 24년간 정대협이 요구했던 조건 가운데 단 하나도 충족되지 않았다.

<할머니와 손잡기> 재단설립 국민모금 추진 게다가 그 어떤 외교적 합의에서도 보기 힘든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이라는 조건까지 덥석 받아들였다. 평화의 소녀상까지 이전하는 조건까지 달려 있다는 소식에 학생들이 달려와 밤을 새우며 소녀상 지키기에 나섰다. 단돈 10억엔에 할머니들의 자존과 우리의 역사와 세계 공통의 양심을 송두리째 바꿔버린 것이다. 이렇게 합의한 정부에 대해 윤 상임대표는 “정부는 피해자 할머니의 입과 정대협만 막으면 아무 문제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국민은 분노했다. 1월 6일 1212차 수요집회부터는 이곳 서울 중림동 평화로(율곡로)뿐만 아니라 전국, 전 세계에서 수요집회가 열린다. 이날엔 부산·광주·원주·제주 등 국내 15곳, 일본·미국·캐나다 등 세계 19곳 등 모두 12개국 45개 지역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 세계행동>이라는 이름으로 수요집회가 열렸다. 서울 중림동에서의 작은 함성이 이제 전국을 넘어 세계로 증폭된 것이다.

윤 상임대표는 “이번 시민의 반응은 시민단체나 정당을 넘어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를 알려주는 중요한 시사점을 주는 전 국민들의 목소리”라며 “이번 기회를 범시민단체가 각성하는 계기로 만들지 못하면 몇 달 후 또 흐지부지될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JTBC에 한 시민이 일본에서 돈을 받지 말고 우리가 모으자며 1000만원이 넘는 돈을 기부한 사실이 보도됐다. 윤 상임대표는 “어제 늦게 집에 갔더니 남편이 그 TV프로그램을 보여줬다. 그 프로를 보면서 울었다. 아마 그런 분이 많을 것”이라며 “일본의 그 10억 엔을 받지 말고 우리가 모으자고 결의했다”고 말했다.

정대협은 ‘할머니와 손잡기’ 재단 설립을 추진하기로 했다. 정부에 일본과 한 12·28 합의의 파기를 요구하고, 일본에서 주는 10억 엔이 아닌, 순수 우리 국민의 모금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이다. 제2의 국채보상운동과 같은 국민모금을 하겠다는 것이다. 거리 모금도 하고, 언론을 통한 모금도 할 예정이다.(국민은행 069137-04-012347 정대협)

윤 상임대표는 한편으로 “불안한 예감도 든다”고 고백했다. 한국 사회에서 일부 작가나 연구가들이 할머니들의 명예를 훼손하고, 일부 극우 언론은 정대협을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있다. 심지어 이 문제에 대해서도 종북주의자들이라고 매도하는 기류가 나타나고 있다. 급기야 엄마부대라는 사람들이 몰려와 시위를 하고, 소녀상을 지키는 대학생들에 대해 경찰이 집시법 위반 여부를 따지겠다는 소식도 들린다. 권위주의 정권인 노태우 정권 시절에도 이어졌던 수요집회가 ‘위기’를 맞을 수도 있는 것이다. 사람도 조직도 불투명한 엄마부대의 시위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슬프다. 엄마란 이름으로 그렇게 말한다는 것이…. 할머니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엄마라는 단어다. 결혼을 못해 엄마가 되지 못한 슬픔을 가진 할머니들이 많다. 또 일본군 위안부 사실을 안 자신의 엄마가 자살한 사례도 있다. 그 할머니는 ‘엄마를 죽인 죄’라는 멍에까지 있다. 그렇게 할머니들에게 엄마란 각별한 의미다…. 엄마라는 이름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은 굉장한 폭력이다. 저도 할머니들에게 용서하라고 못한다. 할머니들이 용서할 수 있을 때 하는 것이다.”

정대협 윤미향 상임대표는 경찰이 평화의 소녀상을 지키기 위해 농성하는 대학생을 소환하려는 것에 우려를 나타냈다./ 이상훈 선임기자

남편, 딸, 여동생 모두가 자원봉사자 24년간 계속된 수요집회는 집회신고를 했고, 종로경찰서도 많이 도와줬다. 윤 상임대표는 “할머니들이 자기 용돈으로 전경에게 수면양말을 선물하고 전경들은 보답으로 할머니들에게 삼계탕을 사주기도 했다”면서 “여기선 경찰과 할머니들은 좋은 사이였다, 이곳이 율곡로이지만 평화로라고 이름 붙인 것도 그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래도 ‘박근혜 정부가 소녀상을 이전하거나, 이 수요집회에 대해 집시법 잣대를 들이대면 어떻게 할 것이냐’는 질문에 그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안타까운 일이 벌어진다면…. 대학생들이 그저 소녀상 옆에 앉아 밤을 새우는 것인데, 거기에 집시법을 적용한다는 것은 탄압을 시작하겠다는 징조이겠지….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 호소하겠다. 그래도 안 되면… 어떻게 하지….”

그는 더 이상의 상황을 상정하기 싫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문을 닫았다. 말없이 상황을 응시하는 것, 그것은 마치 주먹을 쥐고 말 없이 상대를 응시하는 소녀상의 심경과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됐다. 하지만 말 없는 소녀상의 응시는 많은 ‘그 무엇’을 담고 있다. 그 무엇은 원자폭탄보다 큰 충격이고 부담이고 무서움이 될 수 있다. 일본이 그토록 소녀상 이전에 매달린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정 상임대표는 1964년 경남 남해 당항리, 읍내에서도 1시간 넘게 차를 타고 들어가는 촌구석에서 태어났다. 그의 초등학교 친구 중 중학교 이상 나온 친구가 별로 없다고 한다. 동창 아이들은 초등학교 나오면 부산에 있는 가발공장, 신발공장에 취직하거나 일찍 시집갔다. 그래도 그는 목회자의 길을 가기 위해 대학(한신대 신학과)을 나와 대학원까지 진학했다.

“대학원(이화여대)에 다니며 사회운동을 하다가 기생관광 실태를 조사하게 됐다. 일본 관광객은 호텔 로비에서 군가를 부르고 한국 여성을 끼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여행사는 최저가격에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공공연하게 광고했고, 성매매에 나서는 여성들은 경제성장에 기여하는 애국자로 포장됐다. 이 기생관광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여했다.”

이렇게 시작한 그의 여성운동은 1989년 정신대에 끌려갔던 김학순 할머니가 “한국 여성들 정신차리시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당한 것과 같은 일을 또 당한다”는 말에 충격을 받아 정대협 간사를 자원했다.

그는 “정대협에서 남편도 만났고, 딸과 여동생도 자원봉사하고, 가족 모두가 정대협에 매달려 있다”고 말했다. 경기도에서 한 지역신문을 발행하는 남편은 최근 부인의 바쁜 일정 때문에 운전기사를 자청하고 있다. 윤 상임대표는 이런 공로로 이우정평화상(2007년), 서울특별시여성상 대상(2012년), 늦봄 통일상(2013년) 등 많은 상을 받았다. 심지어 지난해에는 ‘의암논개상’까지 받았다. 왜군 적장과 함께 투신한 논개의 정신을 기리는 상이다. 한치의 빈틈이 없고, 결기가 가득찬 논개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하긴 24년간 세계 최장 집회를 계속하는 데는 웬만한 결기 아니면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를 ‘부드러운 여자, 감성적인 여자’라고 주장한다. (옆에 있던 남편은 인상을 쓰며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드라마를 보다가 감동적이거나 슬픈 장면이 예견되면 나는 벌써 울고 있다. 나는 사람을 긍정적으로 보려고 한다. 그 긍정성은 남편에게 받은 것이다. 남편은 억울하게 감옥을 살았지만 항상 웃는다. 부모님도 하루하루 긍정적으로 살라는 문자를 보내준다. 그것이 큰 힘이 된다.”

그는 마지막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나는 문제를 해결할 때까지 집중하는 스타일”이라며 “하루 3시간 푹 잤으면 좋겠다, 나도 편안하게 숨 쉬며 살고 싶다”고 말하며 수요집회 현장으로 향했다.

<원희복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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