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기자 덕질기] 나의 첫 오디오는 버린 오디오 / 이정국

2016. 9. 28.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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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이정국
esc팀 기자

세상에 누가 오디오를 버리다니! 음악 동호회 활동을 하면서 알게 된 형이 알려준 소식은 ‘오디오앓이’ 중이던 내게 가뭄에 단비 같았다. 오디오가 유기(?)된 장소는 서울 강남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단지였다.

그때 나는 서울 강북구 미아6동에서 살고 있었다.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은 4호선 미아삼거리역(지금은 미아사거리역)이었는데, 빠른 걸음으로 20분 남짓 걸렸다. 평소엔 큰길로 나가 마을버스를 타고 역으로 갔지만, 전화를 받고는 우사인 볼트처럼 뛰어갔던 게 기억난다.

충무로역에서 3호선으로 갈아타 압구정역에서 내렸다. 압구정역에서 현대아파트까지도 20여분 거리였다. 빨리 가야 한다는 생각에 뛰듯이 걸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단지 안으로 들어가니, 전화를 한 형이 자신의 발밑에 있는 무언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첫 오디오였던 피셔 400T 리시버. 사진은 ‘민트급’(거의 새것 같은 중고를 뜻하는 은어) 제품이고 내 것은 고물에 가까운 상태였다. 유튜브 갈무리

‘아, 웬 고물.’ 상태가 심각했다. 외관은 찌그러지고 흠집투성이였다. ‘소리가 날까’ 의문이 앞섰다. “이거 좋은 거야. 그런데 너 지하철 타고 갈 거냐, 무거울 텐데.” 20대 초반 혈기에 그 무거운 물건을 들고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정말 무거웠다. 무거웠던 기억밖에 나지 않는다. 그리고 지하철에 그 물건을 들고 탔을 때, ‘젊은 청년이 웬 고물을 들고 다니나’라는 눈빛의 승객들이 기억난다. 그 눈빛이 싫어(실은 창피해서) 미아삼거리역에서 내린 뒤 마을버스를 타지 않고 집까지 걸어왔다. 집에 도착하니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됐고, 팔이 후들거렸다.

땀이 식고 나니 정신이 들었다. 물건을 보니 ‘피셔 400T’라는 리시버였다. 앰프에 라디오 튜너가 포함돼 있는 일체형 앰프 제품을 보통 리시버라 부른다. 지금은 없어진 미국 앰프 제작사인 피셔는 ‘명기’ 앰프를 여럿 만들었던 회사다.

일단 집에 있던 ‘아남전자’ 전축에서 스피커를 떼냈다. 철사처럼 가느다란 스피커 케이블을 리시버에 연결했다. 전원 코드를 보니 미국 제품이라 110볼트였다. 어머니가 다리미를 사용할 때 쓰던 ‘도란스’(트랜스·변압기)를 급히 들고 왔다. 코드를 꽂자 라디오 주파수 창에 주황색 불이 들어왔다. “아싸!”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터졌다.

노브를 돌려 주파수를 맞추기 시작했다. 곧 굵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두시의 데이트 김기덕입니다.” 지금도 그 목소리가 생생하다. 방안을 울리던 그 두툼한 중저음 말이다. 말할 수 없는 희열이 가슴속에서 올라왔다.

jg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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