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시각] 대통령 옷 찾아 헤맨 2년

송혜진 주말뉴스부 기자 2016. 10. 27. 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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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짓는지 어쩜 이렇게까지 비밀에 부칠까…. 골방에 재단사 불러다 놓고 직접 만드는 것 아냐?(웃음)"

2년 전쯤 국내 정상급 디자이너가 박근혜 대통령이 입은 옷을 보면서 이 말을 했을 땐 농담으로 여겼다. 지난 25일 '최순실 손에 순방 일정표, 대통령 옷 맘대로 결정했다'는 TV조선 단독 보도를 보며 뒤통수를 세게 맞은 느낌이 들었다.

2010~2014년 패션을 맡아 박근혜 대통령의 옷에 대한 기사를 종종 썼다. 특히 그의 옷을 만드는 디자이너가 누군지 알아내기 위해 오래 취재했다. 어디에 물어봐도 대답은 '알 수 없다'거나 '알려 하지 말라'였다. 전 세계 여성 지도자 중 누구도 이렇게까지 자신의 의상에 대해 함구하는 경우는 없었다. 더군다나 박 대통령처럼 시시때때로 색을 변주해가며 옷을 바꿔 입는 지도자라면 그 옷을 어떻게 정했고, 왜 골랐는지 대중에게 알리는 게 외국에선 정석이고 상식이다. 오죽하면 '박 대통령이 남몰래 직접 만들어 입는다'는 우스개가 나돌았을까. 그런데 박 대통령의 옷은 정말로 골방에서 은밀하게 만들어져 왔던 것이다. 그것도 최순실이라는 비(非)전문가, 문외한의 진두지휘 아래에서.

2014년 박근혜 대통령이 스위스 다보스 포럼에서 보랏빛 클러치를 들고 나왔을 때 그 가방을 만든 회사를 찾아 알리고 싶어서 취재했다. 가방 회사 이름이 '빌로밀로'이고 이 중소기업의 대표는 고영태라는 사실은 알아냈다. 가방을 제작한 서울 성수동 가죽 공장까지 찾아갔더니 공장 사장은 펄쩍 뛰었다. "절대로 기사가 나가면 안 된다"고 했다. 직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위에서 절대로 발설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기사 나가면 우리가 혼납니다." 박 대통령이 당선인 시절 들고 다닌 가방이 을지로 지하상가에서 제작됐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갔을 때도 비슷한 반응을 접했다. "안 쓰는 게 도와주는 겁니다."

대통령 패션이 왜 기밀(機密)인 걸까 의아했다. 당시 취재 후기를 엮어 2014년 1월 말 기사를 썼다. 그때 몇 곳 빈칸으로 남았다가 이번에 뒤늦게 맞춰진 퍼즐은 경악스러웠다. 고영태가 최순실이 설립한 국내 법인 회사 '더블루K'의 사내이사였다는 것, 박 대통령이 입고 걸친 모든 것이 소상공인을 생각하는 '서민 행보'에서 나온 게 아닌 최순실의 국정 농단을 보여주는 슬픈 증거였다는 사실만 남았다.

그간 대통령의 옷을 평해 왔던 전문가들에게 연락해봤다. 어떤 이는 "그토록 아마추어 흔적이 심했던 이유가 있었다"고 한탄했고, 또 다른 이는 "그의 옷에서 국가 지도자의 메시지를 읽으려 애썼던 게 민망하다"고 허탈해했다. 한 디자이너의 한숨 섞인 이 말이 계속 귀에서 맴돈다.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의 지도자가 비선(秘線)이 조종하는 대로 입고 걸쳤다니…. 우리는 그걸 보면서 저게 대한민국 대통령의 패션이라고 말했다니요." 대통령의 옷에서 패션이 아닌 '비선'이란 단어를 떠올리는 심정이 참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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