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인의 페르시아 산책](8) 자생적 근대화'의 좌절이 흐르고 짧은 왕조, 욕망의 흔적만 남아

글·사진 김중식 시인 2016. 6. 24. 21:57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경향신문] ㆍ핀 가든에서 팔레비궁으로
ㆍ페르시아 이상향 구현한 ‘샘물 솟는 정원’ 핀 가든
ㆍ“근대화=서구화” 이란으로 국명 바꾼 팔레비의 궁

페르시아의 궁전 ‘핀 가든’ 오아시스 도시 커션의 여름 궁전인 ‘핀 가든’. 중세 페르시아의 이상향을 본뜬 정원이다. 팔각 연못의 용천수가 미세하게 경사진 물길을 따라 정원을 흘러다닌다.

‘살아 진천, 죽어 용인’이라는데, 이란에서는 ‘살아 이스파한, 죽어 커션’이다. 커션은 테헤란에서 자동차로 두어 시간 걸리는 오아시스 도시다.

커션의 대표적인 볼거리는 아바스 대왕(1587~1629)이 만든 여름 궁전 ‘핀 가든’인데, 그는 “죽어서 이곳에 묻히고 싶다”고 했다는 것이다.

핀 가든 역시 페르시아의 이상향을 구현한 정원이다. 팔각 연못에서는 샘물이 퐁퐁 솟아오른다. 수로의 바닥엔 천국의 색깔인 파란색 타일을 깔았다. 그 위로 붉은 장미꽃잎이 떠다닌다.

페르시아 최초의 근대인 아미르 카비르가 핀 가든 목욕탕에서 최후를 맞이하고 있다.

지진이 많은 동네에는 온천도 많은 것인지, 이란에는 온천도 많다. 핀 가든에도 병에 잘 듣는 온천수가 솟아오른다. 왕은 정원 한쪽에 목욕탕을 짓고 천연 사우나를 즐겼다.

물이야말로 생명의 기원이라는 것은 정원 밖의 황무지와 비교하면 눈으로 확인된다.

■검은 진주, 석유의 저주

그러나 황무지는 ‘버려진 땅’(wasteland) 또는 ‘나쁜 땅’(badland)이 아니다. ‘땅 파봐야 10원짜리 하나 안 나온다’는 우리 속담도 수정되어야 한다. 황무지는 ‘풀과 나무가 안 보이는 땅’일 뿐이다.

페르시아의 황무지에서는 빨대만 꽂아도 석유와 천연가스가 나오기 때문이다. 19세기 말 유럽 열강은 조로아스터교 사원 근처를 파보았다고 한다. ‘꺼지지 않는 불’은 땅속에서 무한 리필로 새어 나오는 천연가스 덕분에 가능했다고 보았다.

테헤란의 니아바란궁에 있는 팔레비왕과 왕비, 그리고 막내왕자의 사진. 혁명 후 이들은 망명지에서 차례로 불귀의 넋이 되었다.

불꽃을 보고 진리를 깨닫고자 했던 동양의 오랜 문명들은 그 순간 신생 서구문명에 역전당하고 말았다. “법문(부처님 말씀) 백 마디가 대포 한 문을 이기지 못한다.”(한용운)

페르시아 지역은 본래부터 3대륙과 3대양의 배꼽이자, 유라시아의 중원으로서 중국을 제외한 모든 유라시아 제국이 혈투를 벌인 곳이다. 석유가 발견되면서부터 페르시아는 강대국끼리 약육강식하는 무법천지의 정글이 됐다.

■목욕탕에서 숨진 최초의 근대인

핀 가든에서 우리는 이란 근대사의 뜨거운 상징을 만나게 된다. 정원 중앙에 2층짜리 왕의 별장이 있고, 오른편에 목욕탕과 손님을 위한 방들이 길게 늘어서 있다. 그 목욕탕은 페르시아 최초의 근대인(人)이라 할 만한 아미르 카비르(1807~1851) 기념관이 됐다.

그의 시대였던 카자르 왕조(1779~1925)는 5000년 페르시아 역사에서 가장 치욕스러운 제국이었다. 황제는 유럽 여행 경비를 마련하려고 철도 부설권, 지하자원 개발권 등을 외국에 팔아치웠다. 그 밑의 귀족도 함께 썩어갔다. 카스피해를 내해로 두었던 페르시아가 쪼그라들 대로 쪼그라든 현재의 국경선으로 정해졌다.

아미르는 제국의 최하층, 부엌데기 하인의 아들이었다. 그의 주인이 재상이었다는 게 행운이었다. 그를 눈여겨본 주인댁 덕분에 교육을 받으면서 ‘개천에서 난 용’이 됐다. 그는 왕의 누이와 결혼했다.

아미르는 1848~1851년 재상이 되어 국가 개조에 나섰다. 국민적 지지를 배경으로 왕족과 신하의 급여를 줄여 예산을 아끼고, 부정부패와 싸웠으며, 군대와 행정을 개혁했다. 신문을 창간하고 최초의 기술계 고등교육기관을 만들었다.

기득권층은 살의를 느꼈다. 왕후장상들은 황제의 어머니를 꼬드겨 재상을 핀 가든으로 유배 보냈다. 아미르는 황제의 어머니가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자객에게 습격을 당해 목욕탕에서 죽었다고 한다.

하지만 훗날 밀랍인형인지 마네킹인지로 재현된 모습을 보면 아미르의 죽음은 자결에 가깝다. 아미르가 심복의 칼에 자신의 손목을 내어준 채 의연하게 앉아 있다. 아미르의 죽음 이후 페르시아 역사는 날개 없이 추락했다. 자생적 근대는 좌절되고, 하이에나 떼에게 뜯어먹히는 덩치 큰 초식동물 신세가 됐다.

■팔레비 왕조, 페르시아에서 이란으로

제1차 세계대전 중 러시아혁명이 일어났다. 영국을 등에 업은 레자 팔레비 대령(1878~1944)은 자신의 코사크 여단(당시 페르시아의 유일한 신식 군대)을 테헤란으로 회군했다. 그는 군 총사령관에 이어 총리가 됐고, 1925년 팔레비 왕조를 세워 나폴레옹처럼 스스로 황제(‘샤’)가 됐다.

그는 ‘근대화=서구화’라 여겨 여성의 히잡 착용을 금지시켰다. 대학에서는 미니스커트가 유행했다. 보수주의자들은 세상 전체가 타락하고 오염됐다면서 저항을 개시했지만, 레자는 코웃음을 쳤다. “종교지도자들의 뇌는 1000년 동안 회전하지 않았다.”

그는 1935년 나라의 이름을 이란으로 바꾸었다. 나치 독일이 승승장구하자, 이란 역시 그들과 같이 우월한 아리안족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었다.

그의 아들 무하마드 팔레비(1919~1980)는 팔레비 왕조의 두번째이자 마지막 황제였다. 그의 치하에서 모사데크 총리는 “석유로 번 돈을 국민에게 되돌려주겠다”면서 석유 산업을 국영화했다. 국민들은 그를 ‘이란 독립의 아버지’라고 불렀다. 미국과 영국은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모사데크를 제거한 뒤, 팔레비에게 ‘절대 반지’를 주었다. 팔레비는 비밀경찰을 이용한 공포정치로 이란을 통치했다.

팔레비는 자국민 앞에서는 황제였으나, 미국 앞에서는 장기판의 졸(卒)이었다. 자신이 미국의 국익에 배치되면 언제라도 ‘바꿔치기’되는 운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국민의 절대다수가 팔레비 왕정에 반대했다.

1978년 지미 카터 미 대통령이 테헤란을 방문했다. 저녁 뉴스에 샤가 샴페인으로 축배를 하는 모습이 나왔다. 이란의 국가 지도자가 술을 마시는 장면이 최초로 방송을 탄 것이라고 한다. 이슬람 혁명을 슬로건으로 내건 호메이니가 국민들의 정신적인 지주로 급부상했고, 1979년 민중봉기에 의해 팔레비 왕조가 무너졌다.

■팔레비 왕가의 거처

팔레비 왕조의 수도였던 테헤란에는 팔레비 가족이 살던 곳이 두 군데 있는데, 지금은 팔레비 관련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사드아바드궁은 황제 가족의 여름 별장이었다. 사시사철 스프링클러가 돌면서 잔디를 적시고 있다. 키 큰 아름드리나무들이 빽빽하고, 테헤란 북쪽 만년 설산에서 녹아내린 시냇물이 급한 경사를 따라 폭포수처럼 흐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별유천지비인간’이다.

이 궁은 18개의 주제별 박물관으로 구성됐다. 그중 백색 궁전은 1930년대 팔레비 왕이 지은 것으로 왕비의 거처였다. 그곳에 있는 모든 것은 먼지조차 당대 지구촌 최고의 명품들일 것이다.

또한 니아바란궁은 팔레비 가족이 이란에서 마지막 10년간 살았던 곳이다. 이슬람 혁명 때 얼마나 황망히 나라를 떠났는지, 황제 가족의 세간이 숟가락 한 개까지 그대로 남아 있다. 1970년대 세계 최고 부자의 집을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 있다.

세계 각국 정상들의 가장 값지고 의미 있는 선물들, 왕비가 고른 세계 최고의 명품들이 즐비하다. 벽에 걸린 초상화나 사진을 보면 왕은 왕처럼 잘생겼고, 왕비는 또 왕비처럼 잘생겼다. 그들의 아들인 황태자는 축구를 좋아했는지 멋진 포즈로 슈팅하는 장면의 사진들이 보인다. 공주의 침실은 월트디즈니 캐릭터의 소품들로 가득하다.

왕비는 인상파에서 팝아트까지 최고급 미술품을 사 모았는데, 프랑스 파리의 미술관 하나를 통째로 가져다 놓은 듯한 풍성하고도 수준 높은 컬렉션을 자랑한다. 프랑스제 가구, 독일제 식기, 중국제 도자기들도 하나하나 현대판 문화재급 가치가 있는 것들이 아닐까.

■왕가의 최후

말년 운이 좋아야 성공한 인생일까. 금수저 정도가 아니라 ‘미다스의 손’을 지닌 황제와 그의 가족들인데, 그 삶이라고 해서 더 행복했을까.

팔레비 왕은 망명 이듬해인 1980년 암으로 사망한다. 왕비도 그해 죽었다는 것 같다. 팔레비가 가장 아꼈다는 막내딸 레일라 공주는 우울증 끝에 마약과 약물과용으로 런던의 한 호텔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다섯 자녀의 막내아들은 프린스턴대와 컬럼비아대에서 공부했는데, 미국 보스턴 자택에서 권총으로 자살했다.

망자에게 평온이 있기를. 부귀영화가 무슨 소용인가. 산 자들은 오래오래 살아남기를.

■페르시아 전통 삶을 보고 싶다면길·집·들·산이 온통 붉은 마을 ‘아비여네’

아랫집 지붕은 윗집 마당인 산골 ‘마슐레’
마슐레 지붕 위를 걷는 이란인 부부. 이란에서는 부부가 아니라면 팔짱을 낄 수 없다.
페르시아인의 전통적인 삶을 보고 싶다면 테헤란에서 네댓 시간 걸리는 두 전통마을을 권할 만하다.



아비여네는 커션에서 80㎞쯤 떨어진 산기슭에 자리한 ‘붉은 마을’이다. 붉은 땅에 형성된 마을인지라 길도 집도 들과 산도 붉은색 일색이다. 이제는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나가 노인들만 남아 있다. 무너져내린 집이 한둘이 아니다. 여인들은 꽃무늬 히잡을 쓰고, 주름치마를 입는다. 남자는 치마바지처럼 품이 넓은 바지를 입는다. 할머니들도 수염이 꽤 굵고 길다.



마슐레는 카스피해 부근 산속 마을이다. 숲이 우거지고 시도때도 없이 안개비와 보슬비가 내려 마치 동남아시아의 겨울 새벽 속으로 들어온 듯한 느낌을 준다. 이곳은 가파른 산을 깎아 집을 짓다 보니 나의 집 지붕이 너의 집 마당으로 사용되는 풍광이 이채롭다. 굽이굽이 골목길엔 수레바퀴와 오토바이 다닐 길이 없어서 히말라야 셰르파처럼 온갖 짐을 짊어지고 오르는 짐꾼들을 만나게 된다. 국내외 예술인들이 이곳에 오래 머물며 작품활동을 하기도 한다.



두 곳은 우리로 치자면 ‘민속마을’쯤 된다. 이란에서 가장 아름답기로 소문난 ‘포토제닉’ 마을이다. 해 뜨면 일하고, 해 지면 잠들면서 소위 ‘진보’와 ‘발전’이라는 게 없었던 ‘벨 에포크’(아름다운 시절)의 삶이 남아 있다.



때로는 역사의 현장보다는 역사가 없는 듯한 곳에 가서 여유롭게 차 한 잔 하고 싶은 것이다.

<글·사진 김중식 시인 uuyouu@naver.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