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수의 인터스텔라] 슈퍼 디자이너 알렉산드로 멘디니 "난 늘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김지수 대중문화전문기자 2016. 10. 22. 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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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세에 데뷔해 전 세계 건축 산업 디자인계 이끌다알레시의 와인 따개 안나G, 스와치의 컬러풀 시계 등 공산품에 생명 불어넣어“내 디자인은 실패의 역사… 잘못된 것이 돌고 돌다 하나가 맞아 떨어져 대박나는 것"15년 간 한국 오가며 수많은 기업과 협업, “한국과 이탈리아는 미치광이 정신 있어"

이탈리아의 디자인 거장 알렉산드로 멘디니(85세). 멘디니는 현대 디자인의 역사에서 늘 전위에 서 있었다. 인천 영종도의 복합건물 파라다이스 시티 외벽 디자인과 순천의 크리에이티브 가든쇼 진행을 위해 10월 초 한국을 찾았다./사진=박상훈 기자

뿔테 안경 속에 빛나는 눈, 유난히 큰 코가 인상적인 알렉산드로 멘디니(85세). 처음 얼굴을 마주하면 미국의 시니컬한 영화감독 우디 앨런이 떠오른다. 하지만 대화를 나눌수록 우디 알렌보다는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를 만든 이탈리아 영화감독 로베르토 베니니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시절 겪은 전쟁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평생 유토피아를 담은 디자인 추구

현대판 레오나르도 다빈치, 이탈리아가 낳은 디자인계의 거장 등 알렉산드로 멘디니를 수식하는 말은 많지만, 어린 시절 전쟁(2차 세계 대전)을 겪고 동심과 유토피아를 꿈꾸며 일해왔던 이 노인은 평생을 ‘인생은 아름다워'의 낙천주의자 아버지 ‘귀도’와 같은 마음으로 살았는지 모른다.

매일이 전쟁 같은 우리에게 따뜻하고 시적인 디자인을 선물처럼 내놓으며.

그가 1993년에 디자인한 알레시의 와인오프너 안나G는 기지개를 켜는 단발머리 여자아이를 본뜬 단순한 모양이다. 하지만 ‘퐁'하고 와인 코르크가 경쾌하게 솟아오를 때, 두 팔을 들어 올렸다 내리는 그 반복적이고 간결한 몸동작은 우리를 안도하게 한다. 안나G는 현재까지 전 세계적으로 1분에 한 개씩 팔리고 있는 디자인계의 베스트 히트 상품이다.

바로크 양식에 색점을 찍은 그 유명한 프루스트 의자(1978년)는 어떤가. 고가구에 색색의 점을 찍는 것만으로, 이미 낡아 버린 이 세계의 육중한 문이 다시 열렸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낭만적인 부추김까지 떠올리면, 당장에라도 이 ‘앨리스의 낙원’에 몸을 파묻고 싶지 않던가.

멘디니는 테이블 위에 주름진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서 눈을 빛내며 말했다. “인생은 로맨틱한 소설이에요’라고. 간간이 “난 제정신이 아니에요.” 휘파람 불듯 속삭이며.

행복감보다 더 전염성이 강한 것은 없어서, 녹색 스웨터를 입고 시 낭송하듯 말하는 그를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인생은 아름다워'라고 고백할 것만 같았다.

멘디니가 디자인한 와인오프너 안나G와 알렉산드로 M.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와인 따개 커플이다./사진 제공=아틀리에 멘디니.

멘디니는 58세에 처음으로 자신의 아틀리에를 열었고, 노익장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27년간 디자인, 건축, 가구, 도자기, 조명, 페인팅, 주방용품 등의 분야에 어마어마한 양의 작품과 협업을 끌어냈다.

-행복하세요?

“저는 일하는 걸 아주 좋아해요. 하지만 일하는 게 행복한 것만은 아니죠. 힘들고 외롭고 인내해야 하고 원하지 않는 길도 가야 해요. 제게 ‘행복할 때'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아요. 85년을 살았지만, 늘 긴장 속에 삽니다. 역설적으로 행복하지 않을 때는 혼자라고 느낄 때뿐이죠.”

지난해 10월, 멘디니는 동대문 DDP에서는 ‘디자인으로 쓴 시'라는 제목으로 동아시아 최대 규모의 전시회를 열었다. 당시 전시장엔 부모 손을 잡고 온 꼬마 아이들이 디즈니랜드에 온 것처럼 흥분해서 프루스트 의자 사이를 말처럼 뛰어다녔다.

-어린 시절은 어떻게 보냈나요?

“저는 유년에 전쟁을 겪었어요. 머리 위에서 폭탄이 터지는 일도 있었지요. 늘 공포와 두려움이 함께 했어요. 굶주림도 심했죠. 아버지가 먹을 것을 구하러 100km가 넘는 먼 길을 다녀오시곤 했는데, 그 길에 독일 병사들이 숨어서 총을 쏘곤 했어요. 견디기 어려운 공포였어요.

덕분에 저는 내향적인 성격이 됐어요. 남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나만의 유토피아를 그려보길 좋아했지요. 대학은 서른이 돼서야 졸업했어요. 저는 대학에 남아 그림을 계속 그리고 싶었어요. 대학을 졸업한 건 순전히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서였어요. 다행히 글을 잘 써서 잡지사에 취직했고 1년 반 만에 편집장이 됐죠.”

-58세에 아틀리에 멘디니를 창업하고 늦깎이 디자이너로 데뷔했어요. 한국에서 58세면 직장에서 은퇴할 나이지요.

네덜란드 그로닝겐에 있는 그로닝거 미술관(1994년). 포스트모더니즘 양식을 띠는 멘디니의 첫 건축 작품으로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건축물로 꼽힌다./사진 제공=아틀리에 멘디니.

“이탈리아도 그런 경우가 많아요. 하지만 일은 나이가 들어야 제대로 할 수 있어요(웃음). 건축가들도 훌륭한 작품을 한 것은 70세 이후예요.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모든 일엔 경험과 지혜가 필요해요. 필립 존슨(유리 건물 양식을 처음 만든 미국의 건축가)도 좋은 작품은 75살 즈음에 했어요.

저도 58살 전까지는 본격적인 디자인과 건축을 준비하는 단계였죠. ‘까사벨라' ‘모도' 도무스' 등의 디자인 건축 잡지사에서 일하고, 단순히 기능적인 것에만 집중하는 바우하우스 디자인에 반대하는 운동도 했어요. 58살에 아틀리에 멘디니를 연 이유는 그때부터 프로젝트가 들어왔기 때문이에요.

-첫 고객은 누구였지요?

“알레시 회장인 로베르토 알레시가 첫 고객이었어요. 자신의 집을 지어달라더군요. 처음엔 당황스러워서 ‘멘붕' 상태가 됐어요. 그래서 동생에게 SOS를 보냈고, 동생이 자신의 건축 사무소를 접고 저와 함께 일하게 됐어요. 아틀리에 멘디니의 시작이었죠.”

-첫 고객은 알레시였지만, 첫 작품은 네덜란드 그로닝거 미술관인 걸로 압니다. 언뜻 뒤죽박죽처럼 보이지만 볼수록 아름답고 기능적으로도 최적화된 디자인이예요.

“그로닝거 미술관은 현대 미술을 다루기 때문에 그런 양식을 취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기획했지만, 몇몇 건축가들을 불러모아서 협업했지요. 말했듯이 58세 이전에 건축잡지 편집장을 했기 때문에 나로서는 그런 공동작업이 매우 쉬운 일이었어요, 그 이후로 많은 일이 몰려들더군요.”

-듣자 하니, 그로닝거 미술관이 잇따른 행운을 물고 왔다고요. 20세기 최고의 디자인 히트 상품이 된 알레시의 와인오프너 안나G 말입니다.

“(미소 지으며)안나G는 본격적인 디자인 상품이 아니었어요. 그로닝거 미술관을 오픈할 때 기자들에게 선물할 요량으로 몇 개 만들어본 거예요. 굉장히 빨리 스케치했죠. 세밀한 디자인도 없이 정말 대충 스케치했어요. 발레리나 친구가 기지개를 켜는 모양으로, 아주 단순하잖아요. 300개 정도 만들어서 참석한 기자들에게 열쇠고리 대신 나눠줬죠.

한국을 무척 사랑하는 멘디니. 고은 시인과 가야금 명인 황병기를 좋아한다고./사진=박상훈 기자

그런데 안나G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어요. 제품이 마음과 접촉한 거죠. 다들 너무 좋아해서, 카탈로그에도 실리고, 모델이 된 발레리나 친구에게 이름을 사용을 사용해도 좋다는 허락도 받았죠. 그게 내 대표작품이 될 줄이야(웃음).”

-바로크양식의 의자에 색색깔 점을 찍어 만든 프루스트 의자(1978년)는 프로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은 후에 만든 건가요?

“프로스트 의자도 마찬가지예요. 우연히 나왔죠. 저는 세잔, 고흐, 폴 시냑 등의 화가를 참 좋아해요. 그래서 어느 날 클래식한 의자에 점을 찍어보기로 했어요. 오래된 낭만적인 그림같은 디자인을 해보고 싶었어요. (잠시 침묵하다)저는 모든 사람의 인생은 로맨틱 소설 같다는 생각을 해요.”

-로맨틱한 소설이라니요?

“모든 사람은 누가 읽지 않더라도 자기 자서전을 써봐야 해요. 자기가 주인공인 로맨틱한 소설 말이지요. 그러면 자신이 소중하다는 걸 알게 돼요. 프루스트라는 작가도 마찬가지예요. 계속해서 자신의 자서전을 썼던 거죠. 어느 날 제가 그것을 읽고 영감을 받아 의자를 만든 것이고요. 기막힌 우연인데, 프루스트와 화가 폴 시냑은 동시대 파리라는 같은 공간에서 살았다는 거예요(웃음).

문득 이런 의문도 들었어요. 프루스트와 시냑을 하나의 의자에서 만나게 한 것이 정당한 디자인인가? 안락의자도 시냑의 그림도 원래 있었던 것이니 혹시 내가 그걸 훔친 건 아닌가? 이런 식의 접목을 산업디자인이라고 해야 하나? 예술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데 그 질문에 응답할 필요가 없어졌어요. 프루스트 의자도, 안나G만큼 인기를 얻었고 혼자서 날개를 달고 날아갔거든요.

1978년에 나온 오리지널 프루스트 의자는 한 유명 패션 디자이너가 사들여서, 나중에 아주 비싼 값으로 되팔았다고 들었어요(웃음). 그 이후로 다들 프루스트 의자를 카피하기 시작했죠. 전 그것도 몰랐답니다. 따져보면 내가 만든 프루스트 의자는 70~80개 정도예요. 인기를 얻은 직후 아뜰리에 멘디니에서 제작한 것들이죠.

그 이후 모자이크, 세라믹, 금도금 등 다양한 프루스트 의자가 나왔어요. 처음엔 고가의 제품이었는데, 마지스(magis)라는 이태리 플라스틱 회사에서 3D로 생산해 내면서 저렴하게 팔게 되었어요. 재미있는 건 몇몇 작가가 마지스에서 구매한 프루스트 의자에 다시 색이나 장치를 덧입혀서 작품으로 재생산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렇게 디자인이 다시 디자인되면서 순환을 거듭하는 거죠(웃음). 자, 얼마나 로맨틱한 소설입니까?”

프루스트 의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쓴 소설가 프루스트와 점묘법의 대가 폴 시냑을 연상하며 만든 작품. 기능주의 중심의 디자인 흐름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사진 제공=아틀리에 멘디니.

멘디니는 자신이 “아무것도 안 하고 프루스트 의자만 만들어도 된다"며 웃었다. 문제는 그의 디자인 영감이 여러 물줄기로 끊이지 않고 샘솟는다는 것.

그는 필립스, 스와치, 까르띠에, 알레시, 에르메스 등 수많은 기업과 일했지만, 유독 한국과 인연이 많았다. 한샘, 삼성전자, LG, 한국 도자기, 한스킨, SPC 등등. 가장 최근엔 인천 영종도의 파라다이스 시티 건축물에 한국의 조각보를 응용한 외벽 디자인을 하고 있다. 건물 앞에는 가로 4.5m 세로 4.5m의 초대형 프루스트 의자 조형물이 세워진다.

-한국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나요?

“제가 한국을 알게 된 게 15년 전이에요. 건축 공모전의 심사위원으로 초빙되면서 인연이 됐어요. 덕분에 동양의 건축물을 알게 됐죠. 한국의 디자이너들과는 달리 나는 건축, 그래픽, 수공예, 산업 디자인 등 다방면을 해서 점점 여러 기업과 일할 기회가 많아지더군요. 한국과 이탈리아는 비슷한 부분이 많습니다.”

-두 나라 다 피가 뜨겁고 컬러풀하죠?

“한국인이나 이탈리아인이나 다 제정신이 아니에요(웃음).”

-제정신이 아닌 두 나라를 오가면서 일하는 동안 특별히 흥미로웠던 기억이 있습니까?

“첫 클라이언트였던 한샘의 조창걸 회장은 제 프루스트 의자를 한 개 사셨어요(웃음). 그분이 처음 저에게 의뢰한 프로젝트는 아침 준비를 위한 스피드 가전제품이었어요. 토스트를 구우면 잼도 자동으로 발라지고 커피까지 한 번에 나오는 머신이었죠. 제품으로 나오진 않았지만, 정말 엉뚱하고 기발한 생각이었어요.”

멘디니가 캐릭터를 그리고 디자인한 베스킨라빈스의 컬러블록./사진 제공=아틀리에 멘디니

-삼성과 LG와도 함께 일을 했는데, 두 기업의 작업 방식에는 어떤 차이가 있던가요?

“삼성전자와는 갤럭시 기어 S2를 했고 LG와는 하우징 관련 일을 했어요. 바닥재와 냉장고 장식 문양을 만들어내는 일이었는데 그리 큰 작업은 아니었습니다. 비교하긴 좀 어렵죠(웃음).

특별히 삼성은 공식적으로 외부 디자이너에게 의뢰하는 일이 없다고 들었기 때문에, 의미 있는 작업이었어요. 이전에 필립스와 일한 경험이 있지만, 삼성은 규모 면에서 다른 조직과 비교할 수가 없어요. 마치 저는 성경에 나오는 다윗, 삼성은 골리앗처럼 보였달까요(웃음).

애플과 비교해보면 애플 시계는 사각형인데, 삼성 시계는 원형이죠. 삼성은 원형이라는 아날로그 시계 본래의 형태를 유지하고 그 안에 그래픽을 현대화시키고 싶어 했어요. 점점 더 디지털로 가는 시대에는 삼성의 접근 방식은 매우 지혜로워요.

가령 한 손에는 최첨단 휴대폰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글이 새겨진 돌판을 들고 있는 모습이, 내가 생각하는 가장 현대적인 모습입니다. 기능적인 디지털 시대로 갈수록 기업은 소비자에게 판타지와 직접 접촉, 이 두 가지를 만들어내는 데 몰두해야 할 거예요.”

-삼성 갤럭시 기어 S2는 써보셨나요?

“(파안대소하며)나는 아직 작동법을 못 배웠어요. 나는 매우 아날로그적인 사람이에요. 컴퓨터나 스마트폰도 아주 기초적인 것만 쓸 줄 알죠. 카메라도 한 번도 사용해본 적이 없답니다. 이메일 관리도 비서가 다 해서, 애인이 생겨서 연락하려면 손편지를 보내야 할 거예요(웃음).”

-첨단 기기를 다루지 못하면서 전 세계 유수 기업과 연결이 되어있다는 게 놀랍군요. 협업 제안을 받으면 어떤 부분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합니까?

“첫째 저에 대한 호감도가 있는가. 둘째, 서로 존중하는 자세가 되어 있는가. 셋째, 내가 할 수 있는 일인가. 저는 생각보다 문턱이 높지 않습니다(웃음). 항상 열려 있어요. 어떤 디자이너들은 기업과의 협업을 마치 정복의 깃발을 꽂는 것처럼 생각하는데, 저는 그런 전쟁 정신을 혐오합니다. 제 작업은 좋은 에너지와 행복감을 주는 것입니다.”

-건축 잡지에서 편집장으로 일하면서 많은 건축가를 발굴하기도 했습니다. 그 시절의 경험이 당신 삶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겠지요?

“저는 디자인과 건축 분야의 인재를 발굴하기 위해 항상 리서치를 했어요. 덕분에 자하 하디드, 프랭크 게리, 필립 스탁 등 소중한 예술가들 발굴했죠. 그들은 성공할만한 충분한 잠재력이 있었고, 저는 그들의 혁신성을 간파한 것 뿐이에요. 하디드를 처음 잡지 표지로 내보냈을 때가 생각나네요. 그녀는 몸집이 좀 큰 젊은 여자 건축가였어요. 필립 스탁도 여드름이 많이 난 청년이었고요.”

-기억나는 일화가 있습니까?

“필립 스탁은 알레시에 자신이 디자인한 오렌지 과즙 짜게(쥬시 살리프) 디자인을 보냈는데, 알베르토 알레시 회장이 그걸 깜빡 잊고 책상 서랍에 3년간 넣어두었다는군요(웃음).”

-손자를 위해 디자인했다는 조명등 라문 아물레또(수호물이라는 뜻)는 미니멀한 조형이 참 아름다워요. 연결된 세 개의 원에서 기독교의 삼위일체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80세에 만들었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젊은 디자인이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빙그레 웃으며)그냥 젊은 디자인이 아니라 제정신이 아닌 디자인이죠. 어찌 보면 아이가 디자인한 것 같기도 하고, 장애가 있는 사람이 디자인한 것 같기도 하죠. 유심히 보면 전문가가 디자인한 거라는 걸 알 수 있어요.”

-기하학적인 황금 비례로 황금컴퍼스 상을 수상했는데, 어떻게 나온 디자인인가요?

합리적인 기능주의에 기반한 독일 디자인의 반대편에 역동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멘디니의 이탈리아 디자인이 있다./사진=박상훈 기자

“나는 모든 길을 한길로 가기보다 여러 방향으로 가보려고 했어요. 왜냐하면, 할 일이 너무 많거든요(웃음). 그렇게 여러 길을 가다가 영감이 떠오르지요. 이리저리 파헤치다 보면 방법도 생기고요. 세 개의 원은 손자와 해와 달과 땅(지구)에 대한 얘기를 나누다 그려본 거예요.”

-문득 다빈치의 인체비례도가 생각나네요. 디자이너들은 당신을 현대판 레오나르도 다빈치라고 부르더군요.

“쉿! 다빈치 선생이 들으면 큰일 날 말이에요(웃음). 다빈치 선생을 욕보이느니, 차라리 저를 월트 디즈니라고 불러주세요. 사실 저는 그편이 훨씬 좋습니다. 그리고 요즘엔 디즈니가 더 힘이 세지 않나요?”

-꽤나 상업적인 생각인데요(웃음). 사실 당신은 젊은 시절 기능적이고 상업적인 디자인을 거부했지만, 지금은 가장 상업적인 디자인을 하고 있어요.

“그것은 비단 저에게만 적용된 모순은 아니에요. 당시의 건축가들은 다 나 같은 변화를 겪었지요. 다만 상업적으로 또는 산업적으로 의도하지 않았지만, 오히려 아름다움에 대한 순수한 열망이 시대의 흐름을 탔다는 게 맞지요. 알레시 같은 경우가 그래요. 알레시는 이탈리아의 전통적인 스테인리스 회사일 뿐이었어요. 제가 디자인 고문으로 있으면서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게 됐어요. 당시에 저는 그저 소통을 위한 재미있는 제품을 만들었을 뿐인데요.”

-여전히 독일 바우하우스의 최소의 디자인에 반대하시나요?

“기능성과 예술성의 핑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지요.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미 끝난 이야기예요. 디자인에도 부채처럼 다양한 길이 있어요. 과거를 돌아보세요. 전통과 추억과 역사는 귀중합니다. 저는 학생들에게도 파르테논 신전을 다녀오지 않고 디자인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하지요(웃음).”

-자신의 역작 3개를 꼽아보시지요.

멘디니의 손길로 컬러와 장식이 한층 더 유쾌해진 스와치 시계./사진 제공=아틀리에 멘디니

“첫 번째는 네덜란드의 그로닝거 미술관, 두 번째는 처음 만들었던 만든 프로스트 의자, 그 의자는 시간이 오래 지나 색도 멋지게 바랬어요. 세 번째는 역시나 와인오프너 안나G예요.”

-쓰라린 실패의 기억도 있겠지요?

“드러나지 않은 대부분의 일이 쓰라린 실패였지요. 겉으로는 성공한 디자이너처럼 보이지만, 제가 볼 땐 제대로 된 일이 거의 없었어요. 영어로는 에러(error), 이탈리아어로는 에어레(erróre)인데, 이것을 변형하면 에라레(errare)예요. ‘떠돌아 다니다, 잘못 알다'는 뜻이죠. 잘못된 것이 계속해서 돌고 도는 데, 그중 하나가 딱 덜어져서 히트를 하는 거죠.”

-수많은 실패가 돌고 돌다 하나가 맞아 떨어지는 셈이라면, 멘디니의 성공 요인은 첫째, 기회가 계속 열려 있도록 융통성 있는 사람이 된 것, 둘째, 실패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것 정도가 되겠군요.

“그런 셈인가요(웃음). 더불어 저는 나이가 들수록 저는 사회적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고민하면서 디자인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말씀하신 사회적 디자인은 요즘 디자인계의 이슈예요. 이케아도 유럽 난민을 위한 대피소를 만들었고, 런던에서는 성인 기숙사 형태의 공유 건물도 생기고 있어요.

“이케아 같은 회사가 그런 생각을 한다는 건 고무적이에요. 세계적인 규모에 저렴한 물건을 팔기 때문이죠. 하지만 판매를 위해 너무 거친 제품을 생산하는 것은 찬성하지 않아요(웃음).

가족 단위 주택이 아닌 공유 생활을 위한 건물은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해요. 거실과 부엌을 함께 쓰면서 사회적으로 교류할 수 있다는 건 좋은 아이디어거든요.

황금콤파스상을 수상한 라문의 조명 아물레또. 그 안에 들어간 동그란 멘디니./사진=박상훈 기자

한때 건축은 서로 경쟁하며 튀려고 이상한 형태로 진화한 적도 있어요. 이젠 패러다임이 달라졌어요. 모든 걸 환경적으로 재검토해야 하죠. 자재도 환경을 파괴하지 않는 친환경 용품으로 대체해야 하고요. 현재로썬 브라질이나 핀란드 같은 나라가 잘하고 있어요.”

-한국에선 북유럽식 라이프 스타일이 인기예요.

“핀란드 사람들은 정말 미니멀한 집과 라이프를 원해요. 한국인들도 그런가요? 본인의 정확한 주거 방식을 아는 게 우선이죠. 그걸 잘 모르고 섣불리 따라 했다가는 예상치 못하게 우울한 집에서 살게 될지도 모릅니다(웃음).”

-색채의 마술사, 슈퍼 디자이너,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환생 등등 여러 평가 중 어떻게 불리길 원합니까?

“(빙그레 미소 지으며)저는 그저 ‘멘디니 저 사람 머리가 좀 이상하다, 생각하는 게 좀 이상하다'라고 해주면 그걸로 족해요. 저는 사실 늘 제가 뭘 할지를 몰랐어요. 젊은 시절에도 서른 살까지 뭘 할지 몰랐죠. 지금도 딸들이 뭘 할거냐고 물으면 대답을 잘 못 합니다. 너무 많은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거든요. 다시 태어난다면 전 화가로 태어나고 싶어요. 화가는 한길만 갈 수 있을 테니까요.”

-당신이 그토록 염원하는 유토피아의 세계는 이룰 수 없기에 더 간절한 것인가요?

“그렇습니다. 공중에 붕 떠 있는 성처럼, 바다 밑 정원처럼 도달하기 힘든 곳이에요. 유토피아를 간직한 아름다움의 세계… 그걸 떠올리면 총을 맞는 기분입니다. 도달할 수 없는데, 그걸 알면서도 정진하는 것, 그 자세를 유지하려면 또 지나치게 그걸 쫓아서도 안 됩니다.”

-좀 더 쉽게 설명해주시지요.

멘디니는 늘 A4용지에 손으로 스케치한다./사진 제공=아틀리에 멘디니.

“쉽게 말하면 다른 사람들이 나보다 훨씬 유능하다는 걸 깨달아야 해요. 왜냐하면, 내가 잘났다고 생각하면, 나는 성장이 멈춰요. 그러면 내가 그토록 원하던 유토피아에도 도달할 수 없겠지요(웃음).’

-손에 주름이 많으십니다. 왜 여전히 손으로 직접 그리나요?

“저는 보통 A4 사이즈에 스케치를 해요. 그보다 더 큰 종이를 선택하지 않았으니 얼마나 다행이에요. A4 사이즈에 직접 그리면 내 눈으로 전체를 볼 수 있어요. 제가 디자인한 모든 제품이 다 이 안에서 나왔지요.”

-디자이너는 어떤 존재인가요?

“더 나은 삶, 더 나은 세계를 위해 형태를 부여하는 사람.”

알베르토 알레시 회장은 그에 대해 “디자인 분야의 모든 미스터리를 계속 알려준 소크라테스이자 실천의 달인”이라고 했다.

그가 르네상스 인간인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닮은 점이 있다면 수많은 클라이언트와 경계 없이 분투하며 성실하게 일했다는 것이다. 다른 점은 그가 산업디자인계에서 이룬 업적의 대부분은 의도적인 것이 아니라 우연히 자연스럽게 나왔다는 것.

그리하여 멘디니는 여전히 장수하며 우리 옆에서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응원가를 부르고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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