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민주 '영입 3호' 이수혁, 참여정부 이라크 파병 설계자

2016. 1. 5.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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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정치BAR_“북핵 문제 합의 핵심 역할”…과한 평가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5일 오전 국회에서 '인재영입 3호'로 영입한 이수혁 초대 북핵6자회담 수석대표와 입당원서를 함께 들어보이고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1월5일 더불어민주당이 이수혁(67) 6자회담 초대 수석대표 영입을 발표했습니다. 이 전 수석대표는 “외교의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고 국민의 기대와 요구에 부응하는 국가전략을 마련하는 데 기여코자 입당한다”는 소감을 밝혔습니다. 표창원 전 경찰대 교수, 김병관 웹젠 이사회 의장에 이은 3번째 ‘인재 영입’입니다.

이 전 수석대표는 어떤 사람일까요? 일반 대중에게는 낯선 인물입니다. 문 대표는 “6자회담 초대 수석대표를 하시면서 북핵문제 합의 이끌어내는 데 핵심 역할을 하신 분이다. 최고의 통일 외교 전문가”라고 소개했습니다. 하지만 ‘모시고 오는’ 입장에서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겠죠? 이제훈 통일외교팀장이 이 전 수석대표와 관련된 일화 몇 가지를 소개합니다.

이라크 파병 설계자

2003년 9월4일 조지 부시 미국 행정부가 한국 정부에 이라크 파병을 공식 요청해왔다. 한국은 이미 600명 규모의 공병·의료병으로 이뤄진 서희·제마부대를 보낸 터였다. 요컨대 미국의 추가 파병 요구였다. 미국 쪽은 3000~5000명 규모로 이뤄진 1개 보병 전투여단을 갖춘 ‘폴란드형 사단’을 한국 정부가 파병하기를 원했다.

노무현 당시 대통령의 고민이 깊어졌다. 끊었던 담배도 다시 입에 댔다. 부시 행정부는 거세게 압박하고, 국내 여론은 분열됐다. 노 대통령의 핵심 지지층은 부시의 이라크 침략전쟁에 한국이 동조하면 안 된다며, 파병에 격하게 반대했다. 노 대통령 스스로도 파병을 원치 않았다. 그러나 파병을 거부하면 한-미 동맹에 심각한 균열이 불가피했고, ‘제2차 북핵 위기’를 풀 해법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부시 행정부의 협력을 얻기도 어려웠다. 고민이 깊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참여정부 내부에서조차 파격적인 규모의 전투병 파병으로 균열 조짐이 있는 한-미 관계를 봉합·강화해야 한다는 의견이 적지 않았다. 김희상 청와대 국방비서관은 8000명 안팎의 사단급 부대 파병이 적정하다는 의견을 냈다. 언론에선 1만2000명 규모의 전투사단을 보내게 되리라는 추측성 보도가 쏟아졌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한-미 관계와 북핵 문제를 고려할 때 ‘파병은 불가피하다’고 판단하면서도 대규모 전투병력을 이라크에 보내고 싶어하지는 않았다. 문제는 대규모 전투병을 보내지 않고도 부시 행정부한테서 적어도 겉으로나마 ‘파병에 감사하다’는 인사를 받을 방법이 마땅치 않다는 데 있었다.

출구를 찾지 못한 노 대통령이 담배를 태우며 밤을 지새우는 날이 잦아졌다. 그때 이수혁 당시 외교통상부 차관보가 노 대통령의 외교안보분야 핵심 참모인 이종석 청와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차장을 찾아왔다. 이 차관보가 말했다.

“대규모 전투병을 파병하지 않고도 부시 행정부의 불만을 사지 않고, 오히려 감사하다고 인사받을 방법이 있습니다.”
노 대통령과 함께 파병 문제로 노심초사하던 이 사무차장의 눈이 커졌다.
“정말 그런 방안이 있습니까?”
“3000명 규모의 비전투병을 보내되, 특정 지역의 재건사업과 치안을 전담하는 방안입니다.”
“정말 그 방안이면 미국이 만족하겠습니까?”
“틀림없습니다. 속으로야 어찌 생각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겉으로는 감사하다고 할 겁니다.”

이 사무차장은 이 차관보를 데리고 노 대통령한테 바로 보고하러 갔다. 노 대통령이 크게 기뻐했음을 물론이다. 참여정부는 이런 추가 파병안을 내부적으로 확정해 부시 행정부와 협의를 거치고 현지 조사를 마친 뒤 실행에 옮겼다. 2004년 8월 2500명(서희·제마부대 포함 3000명 이내) 규모의 독립 여단급 파병부대를 이라크 아르빌 지역에 파병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도널드 럼스펠드 미 국방장관한테서 “현실을 고려할 때 아주 어려운 결정이었다는 사실을 이해한다”는 말과 함께 감사 인사를 받았음은 물론이다.

대연정 불씨 키운 독일총선 보고서

참여정부 3년차인 2005년 정치권은 노무현 대통령의 ‘대연정 제안’으로 들끓었다. 노 대통령은 2005년 9월7일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와 단독 회동 뒤 ‘대연정’을 사실상 포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그로부터 한달여 뒤인 2005년 10월6일 청와대는 정책고객서비스(PCRM)에 등록된 교수·기자·여야의원과 당직자 등 모두 3만8812명한테 ‘(9·18) 독일 총선 전후 정치분석’이라는 A4 32장 분량의 보고서를 일괄 발송했다. 이 보고서를 “감명 깊게 읽었고, 한국 상황과 비교해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독후감’도 함께 발송했다. 보고서는 ‘의회해산→조기총선’의 배경을 짚고, 결국 독일 정계는 ‘경제개혁과 기민-사민당 대연정’이라는 해법을 모색하리라는 결론을 담고 있다. 그러자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은 즉각 기사와 사설로 당시 정치권의 핵심 쟁점이던 노 대통령의 ‘대연정’ 제안과 연결해 맹비난을 퍼부었다. 노 대통령이 “감명깊게 읽었다”고 밝힌 보고서의 작성 주체가 바로 이수혁 당시 독일대사였다.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5일 ‘인재 영입 3호’ 사례로 소개한 이수혁 단국대 석좌교수와 관련된 일화다. 이 교수는 2007년 국가정보원 제1차장(국외 담당)으로 공직을 마무리했지만, 전형적인 직업 외교관 출신이다. 1975년 외무고시에 합격해 외교관의 길에 들어섰고, 외교통상부 차관보 겸 6자회담 초대 수석대표, 유고슬라비아 대사, 독일대사 등을 지냈다. 참여정부 시절이 그의 관료 생활의 정점이었다.

그는 부지런하고 아이디어가 많은 사람이다. 이라크 파병 및 대연정 논란 와중에 그가 보인 행보가 드러내듯 최고 리더의 의중을 읽는 정무 감각도 출중하다. 요컨대 외교관으로서의 전문성과 정무 감각을 겸비한 인물이다. 다만, 대다수 외교관이 그렇듯이 그 또한 ‘신념’에 목숨을 거는 사람은 아니다.

"북핵 해결 핵심 역할" 과한 포장

사실 확인 차원에서 덧붙일 말이 있다. 우선 “북핵 문제 합의를 이끌어내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분”이라는 문재인 대표의 소개는 과한 측면이 있다. 이수혁 교수는 1~3차 6자회담에 한국쪽 수석대표로 참여했다. 3차 회담까지는 6자회담에서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동북아 탈냉전의 청사진으로 불리는 9·19공동성명은 이수혁 교수와 직접 관련이 없다. 2005년 4차 6자회담에서 9·19공동성명을 합의·채택하기까지 핵심적인 구실을 한 정부 쪽 인사는 노 대통령, 송민순 당시 외교통상부 차관보 겸 6자회담 수석대표, 이종석 사무차장, 정동영 당시 통일부장관 등이었다.

이제훈 기자 nom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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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5일 오전 국회에서 '인재영입 3호'로 영입한 이수혁 초대 북핵6자회담 수석대표와 입당원서를 함께 들어보이고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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