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굴기의 꽃산 꽃글]물옥잠

이굴기|궁리출판 대표 2015. 9. 21.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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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 참 좋다. 싱그러운 들판을 걸어가면 햇빛 알갱이가 곱게 빻은 쌀눈처럼 하늘에서 마구마구 쏟아지는 것 같다. 이 삽상한 기운을 짓기 위해 올 여름이 그렇게 뜨거웠나 보다. 따끈따끈 구들장을 데워놓고 굴뚝을 빠져나가는 연기처럼 여름의 열기도 이제 떠나가고 있다.

구월이다. 수생식물을 공부하러 석모도에 갔다. 모래밭으로 들어서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파도가 철썩였던 듯 물결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갈대와 억새가 우거진 습지를 통과하니 민머리해수욕장으로 가는 이정표가 보였다. 길 좌우의 논에는 벼들이 빼곡히 자라고 있었다. 찰랑대던 물은 모두 사라지고 이삭이 누렇게 익어가는 중이었다. 벼 또한 반듯한 수생식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상했다. 멀리서 보니 논 한 귀퉁이가 허전해 보이는 게 아닌가. 어린 시절 시골에서 보았던 풍경이 떠올랐다. 간밤의 태풍에 마치 도미노처럼 차례로 쓰러지고 구겨져 있던 누런 황금색의 벼들. 동네 어른들의 땀방울처럼 흩어진 낟알들. 석모도의 논을 그렇게 만든 건 바람이 아니라 논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물옥잠이었다. 아예 한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논두렁으로 내려가 자세히 관찰했다. 물옥잠은 여간 예쁜 야생화가 아니다. 강가나 논에서 자라기에 줄기가 곧게 선다. 깨끗한 심장형의 잎을 달고 훤칠하게 서 있는 보랏빛 꽃.

적막했다. 이제 물은 모두 마르고 결실을 기다리는 논 가운데에서 벼의 줄기는 제법 통통했고 알곡이 차곡차곡 여무는 소리만 들리는 듯했다. 아하, 둔한 나에게도 퍼뜩 스치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이 논에서는 농약 냄새가 전혀 나질 않았다. 만약 농약을 뿌렸다면 부작용도 상당히 많았을 것이다. 그런 약을 치지 않았기에 여기저기 웃자란 피도 드문드문 보였다. 이곳의 농부는 차마 물옥잠에게 농약을 먹일 수가 없었던 것일까.

의젓했다. 논 가운데의 물옥잠은 그런 농심을 알기라도 하는 듯 활짝 피어 있었다. 진동하는 꽃내음을 맡으며 이 논의 벼는 참 향기롭게 여물겠다. 석모도에서 생산하는 물옥잠표 쌀! 추석이면 그만한 햅쌀밥도 달리 없겠다. 물옥잠과의 한해살이풀.

<이굴기|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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