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굴기의 꽃산 꽃글]하늘말나리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2015. 9. 14.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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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100편 암송하고 졸업…살아가는 데 힘과 위로 줍니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읽었다(경향신문9월2일자). 17년째 중학생들의 가슴에 마르지 않는 우물을 선물하는 어느 선생님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게 실마리가 되어 떠오르는 기억이 하나 있다.

예전 민음사에 근무할 때 ‘세계의문학’ 편집위원들과 김우창 선생님께 신년 세배를 갔었다. 어느 해 선생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오래 안 잊혔다. 미국의 생태주의 시인, 게리 스나이더의 주장인데 아이들한테 동식물 이름 100개를 외우게 하면 심성 공부에 아주 좋다는 것이었다. 그냥 흘려들을 법도 한데 마음의 공감이 컸던가 보다. 그 말씀을 접수한 이후 인왕산 자락을 어슬렁거리는 동안 소나무 말고 정확하게 이름을 불러줄 수 있는 나무가 하나도 없다는 자각이 문득 일어났다. 뻔질나게 산을 들고나지만 비닐 봉지를 얼굴에 뒤집어쓰고 호흡하는 기분. 그 난처하고 답답한 사정을 벗어나려다가 결국 꽃산행에 빠져들게 되었다.

그러던 중의 어느 지리산 등산길. 중산리에서 법계사를 거쳐 천왕봉에 올랐다가 어둑한 저녁에 치밭목에 도착하니 산장은 이미 만원이었다. 캄캄한 밤중. 오늘 만난 꽃을 중심으로 흐르던 화제가 급기야 하늘로 향했다. 하늘에는 별, 들에는 꽃, 가슴에는 꿈이라는 상투적인 표현이 떠오르기도 했다. 바람만 피하는 자갈마당에 겨우 자리를 비집고 눕자 하늘의 별이 초롱초롱했다. 꽃이 꽃으로 되려면 꽃만으로 될 일이 아니지 않은가. 꽃이 딛고 있는 흙이며 바위, 바람, 별에게로 공부가 확장되어야겠구나! 사소하고도 웅장한 결심을 했더랬다. 곤히 자고 일어났더니 허리에 배긴 돌 하나에 몸이 뻐근했다.

가랑잎초등학교가 있는 유평마을로 가는 길은 여유가 있었다. 하산 도중에 많은 꽃을 만났지만 단연 눈길을 끈 것은 하늘말나리. 나리 종류 중에서 꽃잎이 아래나 옆이 아니라 위를 향하는 꽃이다. 다시 말해 편평하게 돌려난 잎 위로 쭉 뻗어올라 하늘을 향해 환히 벌어진 꽃이다. 별, 꽃, 꿈 그리고 돌로 연결되는 이 거대한 고리에 시(詩)도 끼워 넣으면서 다시 한번 떠올려보는 하늘말나리. 백합과의 여러해살이풀. 궁리출판 대표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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