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슬치기의 행복, 아이패드의 슬픔

2016. 5. 5.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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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매거진 esc] 김소민의 부탄살이

라주 아저씨. 사진 김소민 제공

심심하다. 부탄에서 보통 사무실은 오후 5시면 문 닫는다. 점심 먹고 와서 다들 주섬주섬 퇴근 준비한다. 그런데 수도 팀푸라고 해봤자 갈 데가 별로 없다.

영화관은 팀푸에 한 개 있고 그것도 부탄 영화만 튼다. 한 번 가볼 만한데 두 번은 나한테 돈 주면 갈 거다. 텔레비전 채널은 많다. <위기의 주부> 등 미국 드라마도 하는데 대개는 인도 방송이다. 부탄 애들은 텔레비전만 보고 힌디어를 배울 정도다. 부탄 채널은 두 개, 점심시간 뒤 고등학교 수학시간만큼 졸리다.

공짜 요가 수업이 있긴 하다. 그런데 인도인 요가 선생님이 아무래도 페이스북 중독인 거 같다. 동작은 꼼꼼하게 잘 가르쳐 주는데 한 번씩 무제한 휴식시간을 준다. “편안한 자세로 쉬세요.” 수강생들은 쉬다 잠이 들고 자기는 핸드폰 삼매경에 빠져 있다. 노래방하고 클럽도 몇 개 있는데 나는 개 공포 때문에 밤에 집 밖에 못 나간다. 어디 인간 따위가 개 허락도 안 받고 밤에 싸돌아다니나.

라주(41) 아저씨가 없었다면 내 팀푸 생활은 절간이었을지 모르겠다. 한국으로 치면 불법 다운로드 가게다. 이름은 ‘라주의 시네마’. 어차피 부탄에선 합법으로 외국 영화를 보려고 해도 볼 수가 없다. 디브이디며 시디며 살 데가 없다. 이 ‘라주의 시네마’는 팀푸에서 가장 번화가인 ‘홍콩 마켓’에 있다. 홍콩이랑 무슨 관계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번화가라고 해봤자 ‘라주의 시네마’ 옆에 동네 구멍가게만한 슈퍼, 그 옆에 피자집, 그 앞에 부탄식 만두 모모가게가 있는 게 전부다.

어슬렁거리다 라주 아저씨 가게에 들렀다. 부탄 여자들 몇 명이 한국 드라마를 고르고 있었다. 라주 아저씨가 <가면>을 추천했다. “(수애를 가리키며) 한국에서 유명한 배우라니까. 후회 안 해.” 16편이면 600눌트룸(1만2천원)이다. 손님들은 한참 재더니 <후아유>를 받아달라고 주문하고 갔다. 나한테도 한국 영화 하나 추천해달라니까 <7번방의 비밀>을 내놨다. “아, 정말 많이 울었어.”

“한국 드라마가 광맥이라니까.” 2007년부터 갑자기 소녀들이 ‘이것 좀 찾아 달라’며 오기 시작했다. 영화 한편에 50눌트룸(1000원)인데 그 10배도 아낌없이 내놨다. “한국 드라마가 스토리가 좋아. 아주 빠져들지. 내가 좋아하는 건 <로드 넘버 원>인데 전쟁 드라마야. <쓰리 데이즈>는 정치 드라마인데 권력 쟁탈전이 끝내준다니까. 나는 특히 노인 공경하는 문화가 참 좋아? 너희 나라 그렇지?” 나는 차마 한국이 오이시디(OECD) 나라 가운데 노인 빈곤율이 가장 높다는 말은 못했다.

한국 드라마 붐에 대해 여성단체에서 일하는 메낙시 박사는 이렇게 설명한 적이 있다. “문화적 공통점이 있는 거 같아. 그래서 주인공에 감정 이입하기 쉽지.” 내 친구 니릅은 이 분석이 다 ‘헛소리’라고 했다. “내가 볼 때 이유는 딱 하나야. 남녀 주인공이 예뻐.”

부탄에 방송과 인터넷이 들어온 건 1999년이다. 대체 그 전엔 사람들은 뭘 했을까 싶다. 라주 아저씨가 이 가게를 친구한테서 인수한 건 1992년이다. 남쪽 치랑 출신인데 일거리를 찾아 팀푸로 왔다. 처음엔 차 정비소에서 경리 일을 했는데 오후 5시 퇴근하자마자 친구 비디오 가게에 와서 죽쳤다. “그때는 콜카타(캘커타)에서 브이에이치에스(VHS)로 비디오를 복사해 왔어. 그걸 밤새도록 돌려야 해. 빨리 감기 이런 것도 안 되잖아. 동네 사람들이 또 모여. 복사 뜨는 영화 보려고. 그때 정말 장사가 잘됐어.”

라주 아저씨는 원래 영화라면 환장했다. 그가 청소년일 땐 딱 하나뿐인 영화관에서 인도 영화를 틀었다. 16살엔 인도와 부탄 국경마을인 푼촐링에서 ‘인생의 발견’을 했다. 성룡. “밤마다 인도 쪽으로 넘어가서 성룡 영화는 다 봤어.”

비디오 떠다 팔던 시절이 라주 아저씨 가게 전성기였다. 팀푸 시내에만 해도 그런 가게가 22개 있었다. 텔레비전과 인터넷이 들어오면서 다 망하고 라주 아저씨네하고 라이벌 두 곳만 남았다.

부탄에서 인터넷으로 영화를 내려받으려다간 몸에 사리가 생기는 수가 있다. 라주 아저씨 친구가 타이 갈 때마다 대규모로 내려받아 온다. “부탄에서 처음 방송이 시작됐을 때는 매출이 40%가 줄었어. 문화충격 그런 건 별로 없었던 거 같아. 이미 이래저래 다들 외국 영화를 봐왔잖아. 나야 매출은 줄었어도 복사하기 편해졌지.”

방송, 인터넷이 들어와서 부탄 사람들은 더 행복해졌을까? 라주 아저씨는 반신반의했다. “내가 축구를 좋아해요. 경기 경과를 바로 알 수 있으니까 정말 좋아. 세상 돌아가는 것도 알고. 그런데 또 옛날 친구들을 만나면 그런 얘기를 해. 우리 어린 시절은 행운이었다고. 그땐 구슬치기 하거나 등산을 했거든. 지금 애들은 비디오게임 하지. 또 약물에 빠지는 애들도 많아.”

원래 옛 시절은 다 아름다운 법이니까 라주 아저씨 말을 다 믿을 건 못 된다. 그런데 확실히 재미에도 역치가 있는 거 같다. 이젠 그게 너무 높아져 넘기가 힘들다. 인도 국경마을 푼촐링에서 어린 시절을 난 체링(25)은 이렇게 회상했다. “부탄엔 방송이 없던 시절이라 인도에서 넘어오는 채널이 딱 두 개 나왔어. 뉴스. 지금은 보라 그래도 안 보지. 그런데 그때는 다들 넋이 나갔어. 텔레비전 있는 집에 동네사람들이 모여서 넋 나가 뉴스를 봤지. 우리 때는 구슬만 있으면 행복했어. 그런데 내 조카는 아이패드가 없어서 슬프대.”

김소민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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