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脈을 잇다] 우리 모두 前生에 陶工이었던 것 같아요

이천/심현정 기자 2015. 6. 30.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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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예 가족 김세용·김현정·김도훈 아버지는 새 기법 추구 50년, 딸은 생활도자기에 전념하고 아들은 회사 차리고 특허도 내 "다들 종일 흙 만지며 살다보니 손 부르트고 지문까지 사라져"

반(半)백년 하루도 손에서 흙 반죽 놓아본 적 없는 도예가 김세용(69)씨. 가족도 모두 도예를 뿌리로 살아가고 있다. 남편의 고된 작업을 도와 온 이순이(58)씨는 그 작품들에서 받은 영감을 시(詩)와 수필로 옮겨 책을 냈다. 흙을 '가장 좋은 장난감'으로 알고 자란 남매 김현정(40)·김도훈(37)씨는 아버지 뒤를 이어 도자기를 빚고 있다. 철학을 전공한 현정씨는 생활도자기를, 테니스 선수를 꿈꿨던 도훈씨는 고려대에서 조소를 전공하고 아버지를 돕고 있다. 아들은 '도예의 가르침'이라는 뜻인 '도훈(陶訓)'으로 개명(改名)까지 했다.

경기도 이천 작업장에서 만난 김씨는 양쪽에 남매를 앉히고 자랑하기에 바빴다. "지금 드시는 그 커피잔과 이 필통은 얘(현정)가 만든 거예요. 내 청자와 달리 아주 자유롭고 비(非)정형적이지만 인기가 좋아요. 우리 아들은 회사를 차려서 어린이 식기(食器)를 도자기로 만들어 팔아요. 특허 등록도 했죠."

아버지는 "나는 우연히 도예를 하게 됐다"고 했다. "고3 때 갔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청자를 본 게 계기였어요. 도자기가 많더라고요. 내가 저걸 만들어야겠다 싶었죠." 그렇게 결심하고 입대해 월남전에 참전했는데, 마침 전장(戰場) 근처에 도자기 공장이 있어 꿈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제대 후에 아버지 친구가 운영하는 이천의 도예 공방에 일자리를 얻었다.

그렇지만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었다. 흙 빚는 작업부터 조각까지 독학(獨學)했다. 낮에는 가마에 불을 때고 도자기 옮기는 잡일을 하며 흙 반죽을 곁눈질로 익히고, 해가 지면 직접 만든 칼로 깨진 도자기에 조각 훈련을 했다. "전깃불이 없던 시절이라 호롱불을 썼어요. 동트는 줄 모르고 연습한 거죠. 밤새 호롱불에 얼굴을 들이대니 그을음에 코밑이 시커매졌습니다." 마침내 작업장 조각실장이 됐다. 도예를 시작한 지 5년 만이다.

그는 늘 '남들과 다른 청자'를 만들고자 했다. 밋밋한 표면에 조각해 구워내는 단순한 청자가 아닌, 표면을 이중으로 제작해 겉면에 구멍을 낸 '이중투각' 방식의 청자다. 주제도 다양화했다. 학(鶴)이나 난(蘭) 같은 고전적 틀에서 벗어나 장미·사군자·용을 새겼다. 유약도 새로 개발했다. "유약은 12가지 재료 가운데 하나만 잘못돼도 색이 나오질 않아요. 수백번 실험해서 맑은 옥빛이 도는 유약을 만들었죠. 기존 청자의 유약은 쑥색에 가까운 빛이거든요."

무엇이건 새롭게 시도하는 그를 원로(元老)들은 탐탁지 않게 봤다. 기존의 흙벽돌 가마도 고온(高溫)에서 구운 내화벽돌 가마로 바꾸었다. 흙벽돌 가마는 고열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도자기를 망가뜨리곤 했기 때문이다. "첫 가마를 굽던 날 동네 사람들이 구경왔어요. 한 시간이면 달궈지던 가마가 뜨거워지지 않아 3시간 넘게 불을 땠죠. 다들 혀를 찼죠." 하지만 결과는 성공이었다. 도자기는 더 견고해졌고, 유약도 색이 잘 배어 빛깔이 고왔다. 김씨는 전승공예대전 입상(1981년)을 시작으로 국제현대미술제전 도예부 대상(1984년), 문화체육부 도자기 공모전 금상(1997년)을 받았다. 2002년 명장(名匠)으로 선정됐고 일본에서도 수차례 전시회를 열었다. 그의 작품은 신라호텔 면세점에서 판매되기도 했다.

아들은 얼마 전 흙이나 유약에 쓰이는 신소재를 연구하기 위해 명지대 세라믹공학과에서 석사 과정까지 마쳤다. 김씨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새로운 것을 찾아나서는 걸 보면 우리가 전생(前生)에 도공(陶工)이었나 싶으면서 든든하다"고 했다. "후손들이 300년 뒤에 내가 만든 청자를 볼 것 아닙니까. 그런데 고려시대 것과 똑같아선 안 되잖아요. 아름다우면서 정교하고, 크면서도 소박한 청자가 원(願)이에요."

딸 현정씨는 "서른이 넘어 도예를 시작한 탓에 뒤늦게 기술을 배우느라 처음 한동안은 밤을 새워가며 손이 부르트도록 연습했다"며 "흙을 만져 도자기를 빚고 굽다 보면 모든 잡념이 사라져 좋다"고 했다. 아들 도훈씨는 "한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짧게는 한 달, 길면 1년까지 끈질기게 매달려야 하는 이 일이 참 멋지다고 생각한다"며 "여러 해 매일 흙 그릇을 빚다 보니 이제 나도 아버지처럼 손에 지문이 다 지워졌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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