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규의 미스터리 산책]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복면작가'

2015. 6. 24.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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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한 일은 아니지만 정상급의 인기를 과시하는 작가가 자신을 숨기면서 새로운 작품을 발표할 때가 있다. <해리 포터> 시리즈의 작가 J.K. 롤링이 로버트 갤브레이스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쿠쿠스 콜링>에 얽힌 사건이 가장 유명할 것이다.

두어 달 전부터 TV에서 얼굴을 가리고 노래하는 프로그램이 등장했다. 즉 노래 실력만으로 청중의 평가를 받는다는 것이다. 나름대로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누구인지 도저히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였으니 기획 의도는 분명 성공한 것 같다.

추리문학계(뿐만 아니라 문학계 전체)에서는 신분을 숨기고 글을 쓰는 사람이 종종 있다. 필명 사용은 소극적인 수준이라 할 수 있겠지만, 아예 얼굴이나 문학 외적 약력조차 밝히지 않을 정도로 적극적으로 숨기는 작가도 있다. 일본에서는 후자의 작가를 ‘복면(覆面)작가’라고 일컬으니, 음악 프로그램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고 할까. 데뷔 당시부터 필명을 쓰는 이유는 자신의 이름이 다소 밋밋하게 느껴진다거나, 직장인이라 본명을 쓰기가 어렵다거나, 여성(혹은 남성) 작가가 중성적인 느낌을 주려고 한다거나 등으로 무척 다양하다.

에드워드 호크 (엘러리 퀸 미스터리 매거진 표지), <제5열> 사고(일간스포츠 1977.2.28.), 존 애봇의 <언월도> 표지

영국 작가 존 크리시는 28개 필명 사용

이와는 달리 이름이 알려진 기성 작가마저도 새로운 필명을 사용할 때가 있다. 영국 추리소설가 존 크리시는 무려 28개의 필명을 사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에 걸맞게 600여 편의 작품을 남겼다. 불가피하게 필명을 써야 하는 상황도 있다. 흔하진 않지만 한 지면에 같은 작가의 작품이 동시에 수록될 때이다. 미국 작가 에드워드 D.호크는 1973년부터 추리소설 전문지인 <엘러리 퀸 미스터리 매거진>에 1973년부터 2007년까지 34년 동안 매월 하나 이상의 단편을 계속 발표했다. 가끔 두 편을 싣는 경우도 있어서 어쩔 수 없이 본명 이외에도 대여섯 개의 필명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일이 드물긴 하지만, 한국 추리소설의 대표주자 김성종은 놀랍게도 일간지에 장편을 동시에 연재한 바 있다.

1975년 10월부터 <일간스포츠>에 <여명의 눈동자> 연재를 시작한 김성종은 1977년 3월부터 ‘추정(秋政)’이라는 필명으로 <제5열>을 함께 연재했던 것이다. 연재 직전의 사고(社告)에서는 작가 사진은 보여주면서도 작가 설명이 없다는 것이 흥미롭다. 김성종은 올해 <달맞이언덕의 안개>를 발표하면서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흔한 일은 아니지만 정상급의 인기를 과시하는 작가가 자신을 숨기면서 새로운 작품을 발표할 때가 있다. <해리 포터> 시리즈의 작가 J.K. 롤링이 로버트 갤브레이스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쿠쿠스 콜링>에 얽힌 사건이 가장 유명할 것이다. 이 작품은 2013년 4월 나왔다. 출간 당시 발 맥더미드나 마크 빌링엄 등 영국의 유명 추리작가들의 칭송을 듣는 등 ‘신인의 데뷔작’ 치고는 많은 호평을 받았다. 그런데 3개월 후, <선데이 타임스>의 칼럼니스트인 인디아 나이트는 이 책을 읽은 후 작가가 여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작품에 등장하는 패션 디자이너나 모델, 복장, 액세서리 등의 묘사로 볼 때 출판사가 소개한 ‘육군 헌병대 근무 후 퇴역해 현재는 민간 경비회사에 근무 중인 남성(이 경력은 주인공 코모란 스트라이크와 흡사하다)’이 쓴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작가가 누구이건, 나이트는 자신의 트위터에 ‘아주 좋다’고 추천했다.

J.K.롤링의 정체를 밝히는 계기가 된 인디아 나이트의 트위터

그런데 얼마 후 낯선 사람의 글이 올라왔다. ‘작가가 J.K.롤링이라는 것을 아시는지?’ 깜짝 놀란 그녀는 진담이냐, 어떻게 알았느냐고 질문했으나 ‘그냥 안다’는 것으로 답이 없었다. 특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나이트는 이 이야기를 <선데이 타임스> 문예부장 리처드 브룩스에게 전했다. 그가 알아본 결과 갤브레이스와 롤링은 에이전트가 같았으며, <쿠쿠스 콜링>과 <캐주얼 베이컨시>는 같은 출판사에서 출간되었으며, 같은 편집자가 담당하고 있었다. 갤브레이스 정도의 신인 작가를 경륜 있는 편집자가 담당하는 경우가 드물며, 광고를 위해 인터뷰 등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도 이상했다. 상황 증거를 모은 브룩스가 출판사에 문의하자, ‘사실이다’라는 답장이 돌아온 것이다. 비밀을 누출한 사람도 밝혀졌다. 롤링의 법무법인 소속 변호사가 아내에게 이야기했고, 아내는 친구에게 전했는데, 그 여성이 나이트의 트위터에 글을 썼던 것이다. 법무법인은 사죄하고 보상금을 롤링이 지정한 퇴역군인복지재단에 기부했으며, 또한 롤링도 정체가 밝혀진 이후부터 3년간 인세를 같은 조직에 기부하기로 결정했다.

롤링은 ‘새로운 장르에 작가로서 도전하고 싶은데, 이름에 기대지 않고 신인으로 돌아가 솔직한 피드백을 받고 싶었다. 조금 더 오랫동안 밝혀지지 않기를 원했다’고 했다. 필명은 어린 시절 공상의 세계에서 자신을 지칭하던 ‘엘라 갈브레이스’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리처드 바크만 명의의 작품집 <바크만북스>
유명작가 작품으로 밝혀지면 판매 늘어

1992년, 존 애봇이라는 작가의 <언월도(偃月刀)>라는 서스펜스 소설이 미국에서 출간되었다. 리비아의 암살집단이 미국 대통령을 암살하려 한다는 내용의 이 작품은 출판사가 10만 달러의 광고비를 쓰면서 초판 7만5000부를 찍었다. 1956년 런던에서 태어난 ‘무명작가’의 작품 치고는 꽤 큰 투자라 ‘존 애봇은 누구인가?’하는 의문이 나왔다. 작가의 정체가 <87분서> 시리즈로 유명한 에드 맥베인임을 눈치챈 사람이 많았다. 그 근거는 저작권회사가 같다는 점, 맥베인이 자주 사용하는 그림이나 사진이 작품 속에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뒷표지에 나온 작가 사진 역시 역광으로 흐릿하지만 맥베인임을 알아볼 수 있는 근거였다. 다만 맥베인은 롤링과는 달리 1년이 지나서야 어느 잡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처음으로 그 사실을 인정했다.

공포소설가로 유명한 스티븐 킹 역시 한동안 리처드 바크만이라는 이름으로 여러 작품을 썼다. 스티븐 킹이 필명을 사용한 이유는 당시 미국의 출판업계에 1년 1작가 1권 출판의 풍조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도 롤링과 마찬가지로 무명의 ‘리처드 바크만’이 ‘스티븐 킹’과 같은 지위를 획득할 수 있을까 도전해보고 싶었다는 것이다. 예정대로라면 <미저리>를 바크만 이름으로 발표할 예정이었으나, 어느 서점 점원에 의해 정체가 들통나는 바람에 결국 그 계획은 실패했다.

사실 아무리 좋은 작품이라도 운명은 예측할 수 없다. 롤링의 <쿠쿠스 콜링>은 출간 후 3개월 동안 하드커버, 전자책, 오디오북, 도서관 구입까지 모두 8500권 판매의 실적(신인 작가로는 좋은 수준)이었으나 작가가 누구인지 밝혀지자 바로 일주일 만에 1만8000권이 팔렸으며 곧 베스트셀러 1위의 자리에 올랐다. 스티븐 킹도 마찬가지. 신분이 알려지기 전의 리처드 바크만 마지막 작품 <시너>는 2만8000권이 팔렸으나 스티븐 킹이 된 순간부터 28만부나 팔렸다는 것은 이름값을 무시할 수 없음을 증명한다. 어쩌면 필명으로 작품을 썼지만 반응이 형편없어서 여전히 신분을 숨기고 있는 유명 작가가 더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박광규 추리소설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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