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규의 미스터리 산책]한국문학 스파이소설이 드문 '원초적 이유'

2015. 2. 17.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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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는 꾸준히 인기를 얻은 스파이 소설을 찾아보기 어렵다. 외국 작품이나 영화가 인기가 끄는 것을 보면 스파이 이야기 자체에 거부감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국내 작품은 극히 드문 편이다.

'세상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직업'은 무엇일까?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면 다름 아닌 '스파이'이다. 스파이라고 불리지는 않더라도 그리스 신화나 삼국지 등에서 현대의 스파이와 흡사한 활동을 했던 인물의 기록을 찾아볼 수 있고, <삼국사기>에 나오는 낙랑국 멸망 이야기도 넓은 의미에서 스파이 활동 이야기가 아닐까. 아시는 분도 많겠지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낙랑 공주와 혼인한 고구려 왕자 호동은 고구려로 돌아온 후 공주에게 사신을 보내 자신의 뜻을 전한다. 자명고(적이 침입하면 저절로 울리는 북)를 파괴해야만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것. 사랑에 빠진 공주는 그 지시대로 자명고를 부쉈고, 고구려는 그 틈을 타 공격을 개시한다. 뒤늦게 침입 사실을 안 낙랑 국왕은 배신한 딸을 죽이고 고구려에 항복해 낙랑국은 멸망한다.'

애절한 로맨스가 곁들여져 있지만 전형적인 스파이 소설의 플롯을 갖추고 있어, 시대배경을 21세기로 옮기고 자명고 대신 레이더 기지 정도로 바꾸어도 충분히 통할 것 같다. 상투적으로 볼 수 있는 미인계 대신 미남계를 썼다는 것도 독특한 점이고, 배신(배우자에 대한)과 배신(국가에 대한)이 이어진다는 점 역시 더욱 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스파이라고 하면 어쩐지 그럴듯해 보이지만, '간첩'이라고 하면 어감이 크게 달라진다. '우리 편'과 '적'으로 느껴지는 관점 차이일 것이다. 호칭이야 어쨌건, 스파이 소설은 불가능해 보이는 임무 수행, 화려한 모험담, 그에 덧붙여 매력적인 주인공의 활약 등을 통해 오락소설의 한 갈래로 우뚝 섰고, 또한 대(對) 스파이 활동이 범죄 수사와 흡사하다는 점 덕분인지 어느덧 스파이 소설은 추리소설의 한 갈래로 자리를 잡고 있다. 영화나 TV드라마 등을 통해 스파이는 탐정보다 오히려 대중들에게 익숙해진 상태이기도 하다.

제임스 본드 시리즈 첫 작품 <카지노 로열> 초판 표지. <전격 후린트 Go Go 작전> 신문광고. (1967)

소설보다 영화가 더 유명한 제임스 본드

스파이 소설의 인기를 촉발시키고 21세기까지 끌고 온 주역으로는 아무래도 영국 작가 이언 플레밍이 창조한 제임스 본드라는 인물을 첫손에 꼽아야 할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시기에 해군 정보부 장교로 복무한 플레밍은 종전 후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 1953년 <카지노 로열>을 발표, 부와 명성을 동시에 얻었다. 본명보다 007이라는 암호명('00'이라는 숫자는 임무 수행 중 살인을 허가받았음을 의미한다)으로 훨씬 잘 알려진 영국 비밀정보부 소속의 제임스 본드는 '영국과 세계 평화를 위해' 온 지구를 누비며 종횡무진 활약한다. 이제는 책보다 영화로 훨씬 더 유명해진 007은 탄생 50여년이 지난 지금도 새 작품의 제작 소식이 이어지고 있다.

지명도는 제임스 본드에 훨씬 떨어지지만,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는 인상적인 스파이가 있다. 1965년 제작된 영화에서 처음 등장한 데릭 플린트(우리나라에서는 <전격 후린트 Go Go 작전>이라는 제목으로 개봉했다)는 능력이 무척 많은 사람이다. 45개 국어와 방언이 가능하고, 17개 대학에서 학위를 받은 화가이자 음악가, 의사, 변호사, 엔지니어이며 명예 인디언 추장이기도 하다. 또 올림픽 메달리스트에 유도 유단자이며 50경기 연속 KO승을 거둔 권투선수인 그는 세계에 위험한 일이 벌어지면 출동하여 해결한다. 게다가 잘생긴 외모까지 갖추고 있어, 이웃에 있으면 불편한 '엄마 친구 아들'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비현실적 인물이 등장할 정도로 스파이는 어느덧 대중들에게 매력적인 존재가 되었지만, 1950년대 들어 이어진 냉전은 새로운 스파이 소설이 탄생하는 계기가 된다. 미국과 소련으로 대표되는 동서진영의 경쟁은 군사력뿐만 아니라 치열한 정보 싸움으로도 이어졌다. 이 시기에 등장한 작가가 존 르 카레다. 그는 활극이 아닌 냉정한 첩보전을 묘사해 스파이 소설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했다. 이처럼 서구의 스파이 소설은 '활극→현실적 첩보전→두 가지의 절충' 등의 형식으로 꾸준히 이어졌으며, 동구 공산진영의 몰락 이후에도 작가들은 갈등이 발생한 곳을 배경으로 치열한 첩보전을 묘사하고 있다.

조풍연 <심연의 안테나> 연재 1회.(1959)

스파이보다는 '대간첩활동' 작품 많아

이와는 대조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꾸준히 인기를 얻은 스파이 소설을 찾아보기 어렵다. 외국 작품이나 영화가 인기가 끄는 것을 보면 스파이 이야기 자체에 거부감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국내 작품은 극히 드문 편이다. 근대에 외국을 침략하지 않은 역사 탓인지 스파이의 활약을 그린 작품보다 '대(對) 간첩활동'에 주력하는 작품이 훨씬 많다. 일제강점기에는 김동인이 스파이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수평선 너머로>를 발표했다. 김내성은 <백가면>, <태풍> 등의 대(對) 스파이소설을 발표했는데, 명탐정으로 유명한 그의 주인공 유불란은 외국의 스파이 조직과 대결을 벌인다.

한국전쟁 후에는 휴전이라는 이례적 대치상황 속에서 남파간첩을 수사하는 작품들이 종종 출간됐다. 언론인이자 아동문학가로 잘 알려진 조풍연(趙豊衍)은 추리소설도 몇 편 썼다. 1959년 잡지에 연재했던 <심연(深淵)의 안테나>가 유일한 장편 추리소설이자 간첩을 다룬 작품이다. 어느 독신 여성 아나운서의 기묘한 자살에 의심을 품은 수사관 사광필의 수사로 전개되던 이야기는 중반까지만 해도 형사를 주인공으로 한 추리소설처럼 보였으나 후반부에 들어와서는 급속하게 간첩단의 음모가 밝혀지는 쪽으로 전개된다.

조풍연은 훗날 "첫째 스케일이 클 수 있고, 둘째 활동에 제한이 없으며, 셋째 재정(財政)의 범위가 넓고, 넷째 신무기를 마음대로 쓸 수 있으며 사회성을 띨 수 있다"는 것을 스파이 소설의 특징으로 꼽았다. <심연의 안테나> 역시 그런 방향으로 모색했음을 밝혔다. 이런 특징은 요즘도 충분히 통용되는 내용이지만, 그런 장점과는 별개로 한국의 스파이 소설은 성장하지 않았다. 1970년대 이후 당시 최고의 인기 작가였던 김성종은 <z 비밀> 등 국제적 음모를 다룬 작품을 발표했고, 중앙정보부 근무 경력을 가진 노원은 남북 간의 첩보전을 묘사한 <야간항로> 등을 내놓았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극소수에 불과해 스파이 소설이 자리 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는 21세기에 들어와서도 거의 마찬가지인 상태이다.

일본에서는 2차 세계대전이나 심지어 직접 참전하지도 않은 월남전 등을 배경으로 하는 스파이 소설이 꾸준히 출간된다. 반면 일제강점기를 거쳐 한국전쟁까지 수많은 사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쪽 분야의 작품이 나오지 않는다는 점은 어딘가 원초적인 이유가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간첩'이라는 존재에 대한 거부감, 적국 침략에 대한 결벽증, 그리고 대한민국의 공식 정보기관이 대외활동보다 자국민을 상대로 공작을 벌이고 있다는 인상이 강하다는 것이 가장 문제가 아닐까. 국가에 대한 믿음이 살아나면 그와 함께 멋진(약간 비현실적일지라도) 스파이 소설이 등장할 것이라고 기대한다.

<박광규 추리소설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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