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규의 미스터리 산책]사실인 듯 사실 아닌 사실 같은 거짓말

2015. 2. 10.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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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 거짓말처럼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생동감 넘치는 문장, 첨단기술의 묘사 등 글 솜씨나 소재로 승부하는 정공법이 있지만, 약간의 편법을 동원하기도 한다.

'이 작품은 픽션이며 특정 인물이나 상호, 특정 사실과 관련이 없습니다.'

소설책을 보면 가끔 이런 안내문이 눈에 띈다. 소설을 한자 뜻으로만 풀어보면 '작은(小) 이야기(說)' 정도의 의미가 되겠지만, 영어 단어 '픽션'(Fiction)에는 '허구'(虛構), 즉 실제 이야기가 아닌 상상 속 이야기라는 뜻이 있다. 이런 안내문은 작가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우연하게도 실존 인물, 혹은 어떤 사건과 비슷하여 발생할 수도 있는 명예훼손 문제 등을 미리 방지하기 위한 선언문이라 할 수 있다.

따지고 보면 훌륭한 소설가는 솜씨 좋은 거짓말쟁이(?)인 셈이다. 소설가들은 자신이 창조한 이야기가 조금이라도 더 사실처럼 보일 수 있도록 다양한 방법을 동원한다. 추리소설도 마찬가지.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까지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두뇌를 지닌 천재적 탐정이 연이어 등장했지만, 서서히 현실적인 인물상으로 수렴해 가면서 요즘 추리소설의 주인공은 정말 있을 법한 인물처럼 느껴지도록 묘사되고 있다.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 표지.

독자 관심 끌려고 실화로 위장하는 허구

추리소설가가 조심해야 할 것은 너무 세세한 범죄 방법의 묘사이다. 우리나라에서 추리소설이 모방범죄의 원인으로 지목된 경우도 적지 않은 탓에 약간의 자기검열이 들어가곤 한다. 만약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교묘한 범죄수법을 고안했다면 한 번쯤 다시 생각해보는 것이다. 혹시 누구나 쉽게 가능하다면 빛을 못 볼 가능성이 크다. 일본의 의사 출신 추리소설가 유라 사부로는 그의 수필에서 '진정한 완전범죄 방법을 하나 알아냈으나, 공개하면 누가 악용할까 두려워 그냥 내 마음속에만 담아두겠다'고 밝힌 일이 있다. 이렇게 덮어버리기도 하지만, 아예 그럴 듯하게 보이는 가짜 범죄수법을 꾸미는 편이 가장 적절해 보인다. 역시 일본의 추리소설가인 기시 유스케는 <푸른 불꽃>의 후기에서 '이 작품에 나온 살인 방법은 기발한 것처럼 보이지만, 현실에서는 이 방법으로 사람이 죽지는 않는다'고 즉 살인 방법이 거짓임을 친절하게 알려주고 있다.

소설이 거짓말처럼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생동감 넘치는 문장, 첨단기술의 묘사 등 글 솜씨나 소재로 승부하는 정공법이 있지만, 약간의 편법을 동원하기도 한다.

신경순 <암굴의 혈투>. ('실화'로 되어 있음)

'당연히, 이것은 수기(手記)이다.'

이는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1980) 첫 문장이다. 이어 서문에서 '1968년 8월 16일, 나는 발레라는 수도원장이 펴낸 한 권의 책을 손에 넣었다'면서 이 이야기가 자신의 창작이 아니라 과거(14세기)의 문헌을 번역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로 인해 <장미의 이름>이 실화라고 생각했던 독자도 꽤 있었던 것 같지만, 이 작품이 움베르토 에코의 순수 창작물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처럼 '사실'은 '허구'보다 아무래도 강렬한 인상을 주기 때문인지, 가끔 '실화'로 위장하는 경우도 볼 수 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제 강점기 시절부터 1960년대까지 언론인으로 활동했던 신경순(1904~1970)은 1930년대에 짬짬이 추리소설을 발표했다. 그런데 그중 잡지 <개벽>에 실린 <암굴의 혈투>(1934), <미까도의 지하실>(1935) 등은 내용상 틀림없는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모두 '실화'라는 표제를 달고 있다. 아마도 당시 독자들의 눈을 끌게 하기 위한 수단이었음에 틀림없다.

<슬리퍼스> 영화 포스터.

<1995년 미국에서는 로렌조 카르카테라가 자신의 어린 시절 경험을 토대로 집필한 <슬리퍼스>(<윌킨슨의 아이들>이란 제목으로 번역되었다)가 화제를 모았다. 사소한 장난을 벌이다가 누군가를 크게 다치게 한 네 소년이 소년원에 들어가면서 벌어지는 비극적 이야기를 그린 이 '실화'는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톱스타들이 출연한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다른 방향에서 다시 화제가 되었다. 이것이 '실화'가 아니라는 것. 저자는 등장인물 보호를 위해 이름과 장소, 날짜 등을 의도적으로 바꾸었다고 주장했지만, 그의 주장과는 달리 책에 나오는 사건과 비슷한 재판 기록이 없으며, 또 한때 소년원에 있었다는 그의 이야기도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작가가 더 이상의 언급을 하지 않아 진위가 확실하진 않으나, 인터넷 백과사전 위키피디아의 <슬리퍼스> 항목에는 '허구라는 의혹이 있지만 국회도서관 분류에는 여전히 논픽션에 포함되어 있다'고 되어 있다.

이처럼 거짓말을 하는 것은 쉬워도 들키지 않는 것이 훨씬 어렵다. 누군가 미심쩍어 파고들면 그것을 모면하기 위해 거짓말을 또 하게 되는데, 당장에는 위기를 모면한 것 같아도 결국 탄로 나게 마련이다.

존 러퍼리의 밴 다인 전기 <aliasS.S. Van Dine>.

세월이 흐르면서 거짓말로 밝혀지기도

수많은 추리소설가 중에서도 위대한 작가로 손꼽히는 한 인물은 세월이 흐르면서 차츰 거짓말이 드러나고 있다. 혁신적인 스타일과 현학적인 문체로 1920년대 미국에서 가장 많은 돈을 번 추리소설가 S.S. 밴 다인은 미국의 추리평론가 하워드 헤이크래프트가 <오락을 위한 살인>(Murder For Pleasure)에서 이렇게 표현할 정도였다.

"…1926년 늦었지만 갑작스러운 새벽이 찾아왔다. S.S. 밴 다인의 획기적인 파일로 밴스가 등장하는 첫 번째 작품인 <벤슨 살인사건>이 출판되었다. 하룻밤 사이에 미국 추리소설은 성인이 되었다."

그런데 작품 면에서는 찬사를 보냈던 헤이크래프트가 놀랍게도 같은 책의 뒷부분에서는 그를 악질적인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출간되지도 않은 책을 자신의 저작 목록에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사실 밴 다인이 '윌러드 헌팅턴 라이트'라는 본명으로 비평가 활동을 시작할 때부터 그가 밝힌 경력은 날조에 가까웠다. 존 러퍼리가 쓴 밴 다인의 전기 <aliasS.S. Van Dine>(1993년 미국추리작가협회상 평론/전기 부문 수상)에 따르면 하버드 대학 졸업 경력은 허위였으며,(실제로는 하버드 대학에서 두 과목을 청강) 아직 출간하지도 않은 책을 자신의 저서로 소개했다. 또한 그의 필명 S.S. 밴 다인은 어머니 쪽 먼 친척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했으나, 그런 성을 가진 친척도 없었다는 것이다. 이 전기는 이외에도 널리 알려진 것과는 여러 가지 다른 사실을 소개하고 있다. 진실을 추구하는 파일로 밴스와는 달리, 그의 인생 속에는 이처럼 거짓말이 곳곳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밴 다인의 거짓말은 남에게 큰 피해를 입히지 않은 일화 정도로 넘어갈 수준이다. 가끔 뭔가 의심스러운 일을 벌인 듯한 정치인에게 의혹을 제기하면 '추리소설 쓰지 마시오'라고 반박하는 모습을 1년에 한두 번씩은 꼭 보는 것 같다. 이럴 때마다 추리소설 애호가로서 불쾌한 느낌이 드는 동시에 예전에 들은 우스갯소리가 떠오른다.

'나는 그 사람이 언제 거짓말을 하는지 보면 알아.' '그게 언제인지 어떻게 알지?' '그 사람이 말을 할 때라니까.'

얼마 전 출간된 어느 회고록을 보면, 위의 우스갯소리가 '농담'이 아닌 '참말'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추리소설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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