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과 포르노 사이, 정치자금에 길을 터줘라

2015. 4. 25.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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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토요판] 박성민의 2017오디세이아

(8) 정치인과 돈

이례적인 기자회견이었다. 그는 '국민들께 드리는 호소문'이라고 했지만 내용은 '박근혜 대통령에게 드리는 호소문'에 가까웠다. 이 자리에 선 것은 "잘못된 사실로 인해 오해하고 계실 국민"들에게 양해를 구하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그가 가장 먼저 오해를 풀어주고 싶은 국민은 박근혜 대통령으로 보였다. 성완종은 '억울'하다고 했다. "자원개발과 관련해 융자금을 횡령한 사실이 없는데 '잘못 알려진 사실로 인해' 제 한평생 쌓아온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 같아 참담하기 그지없습니다." "저는 엠비(MB)맨이 결코 아닙니다." 이 모든 일이 자기가 엠비맨으로 '잘못 알려진 탓'에 벌어진 일이기 때문에 자기가 박근혜 대통령 사람이라는 사실만 증명하면 '오해가 풀릴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 같다. 그는 대담하게도 2007년 대통령 경선 당시 허태열 의원의 소개로 박근혜 후보를 만났다고 구체적으로 말함으로써 '뭔가'를 상기시키려 했다. 대통령을 향한 마지막 호소마저 통하지 않자 그는 다음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성완종은 정권이 자기를 오해했다고 믿은 모양이지만 어쩌면 오해한 것은 그였는지도 모른다. 경험을 통해 굳어버린 '돈 앞에 장사 없다'는 생존철학(?)이 먹히지 않자 어쩔 줄 몰랐다.

남에게 일어난 일은 나에게도 일어나고, 나에게 일어난 일은 남에게도 일어나는 게 세상의 이치다. 그러나 어리석게도 인간은 남에게 일어난 일이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남의 고통과 슬픔에 무관심하다. 전쟁, 학살, 고문, 투옥, 테러, 사고, 질병, 가난, 장애, 폭력, 왕따, 범죄 등에 노출된 사람들의 고통을 외면하는 것은 남의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 아이는 절대 그렇게 죽을 리 없다고 믿기 때문에 세월호 유족들에게도 그리 잔인하게 대하는 것이다. 역지사지는 어렵기 때문에 강조되는 것이다. 그와는 반대로 '억울함'은 나에게 일어난 일이 남에게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피해망상 때문에 생긴다. 성완종의 극단적 선택도 여기서 시작됐다. 그는 자기보다 더 나쁜 놈들은 아무 일도 없는데 자기만 당하는 게 억울했다. 박근혜 정권 실세들에게 그렇게 많은 돈을 갖다 줬는데도 이 정권의 '부패척결 1호'로 찍힌 것도 너무 억울했다. 어떤 기준을 갖다 대도 자기가 처음일 수는 없었다. 온 세상이 나만 죽이려 드는 것 같아 두려웠다. 원래 떡은 남의 것이 커 보이고 병은 자기 것이 커 보이게 마련이다. 그러나 남에게 일어난 불행이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듯이 나에게 일어난 불행은 남도 겪는 것이다. 대통령을 지낸 사람도 그런 억울한 일을 겪을 수 있는 것이다.

'비선출 권력' 손에 달린 '선출 권력'

성완종의 죽음은 그와 가족의 비극이지만 성완종 게이트는 한국 민주주의의 비극이다. 그의 잘못은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을 전혀 구분하지 않은 것이다. 그에게는 사업이 정치였고 정치가 사업이었다. 더 큰 잘못은 그것이 왜 문제인가를 끝내 깨닫지 못한 것이었다. 사업을 위해 정치와 손을 잡았기 때문에 직접 정치를 하면 더 큰 기회가 있을 것으로 봤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국회의원의 힘을 사적 이익을 위해 사용했다. 리스크가 클수록 수익도 커지는 게 돈 버는 사람의 셈법이므로 대통령 선거는 돈이 무기인 그에게는 엄청난 기회였다. 무슨 일이든 익숙해지면 대범해지기 마련이다. 정권을 직접 만들 수만 있다면 그저 옆에서 돕는 거랑은 보상의 차원이 다를 터였다. 그의 분석(?)대로 반기문을 대통령으로 만들려는 '베팅'이 그와 이완구를 갈라놓았고 결국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는지 모른다. 정치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해서는 안 된다. 공적 소명의식이 없는 사람은 정치를 하면 안 된다. 사익을 위해 해서는 절대 안 된다. 성완종 게이트가 터지자 당·정·청이 쑥대밭이 되었다. 이 말은 곧 대한민국이 그렇게 되었다는 뜻이다. 국민의 애국심과 군인, 경찰, 공무원의 충성심은 지도자를 통해서 생긴다. 그들이 보기에 "저 사람들은 우리 같은 사람들과는 확실히 다른 게 있어"라는 게 있어야 한다. '지도자다움'과 '공적 이미지'가 그것이다. 눈에 보이는 대통령, 총리, 장관, 사단장, 경찰청장에 대한 존경이 없으면 애국과 충성의 마음도 생기지 않는다.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이 분노하는 나라의 미래는 없다. 이완구 총리의 사퇴는 너무 늦었다. 대통령이 국가의 품격을 생각했다면 빨리 해임했어야 한다.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대한민국 정치 지도자들의 격이 바닥을 드러냈다. 이제 박근혜 정권이 내건 국가개조, 관피아 척결, 부패 척결은 사실상 끝났다. 메신저의 신뢰가 땅에 떨어지면 어떤 메시지도 먹히지 않는다.

불길한 예측을 하자면 이런 일은 또 터질 것이다. 지금은 정권을 흔들 뿐이지만 다음에는 나라를 흔들 것이다. 6년 전의 박연차 게이트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대가다. 박근혜 대통령은 "검찰이 정치개혁 차원에서 확실히 수사"하라고 했다. 황교안 법무부 장관은 "정치권에서 오가고 있는 불법 정치자금 전반에 대한 검토가 필요한 시점"이라며 수사를 정치권 전반으로 확대할 의지를 내비쳤다. 야당의 문재인 대표도 "성역 없는 수사"를 촉구하면서 "부패 없는 깨끗한 나라"를 만들자고 했다. 또다시 '선출권력'의 운명이 '비선출권력' 손에 달렸다. 많은 전문가들도 신문 칼럼을 통해 연일 정치권을 부패집단으로 몰아붙이고 있다. 이미 국민들은 모든 정치인이 불법자금을 받았을 거라고 확신한다. 검찰도 그렇게 생각할 가능성이 크다. 결국 부패한 집단인 정치인은 '많이 먹은 놈과 적게 먹은 놈', '걸린 놈과 걸리지 않은 놈', '혐의가 입증된 놈과 입증되지 않은 놈'으로 인식될 것이다. '죄인'인 정치인들은 반박도 못 하고 게이트가 터질 때마다 '리스트'에 오르지 않은 것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같이 돌을 던진다. 그러나 남들에게 일어난 일은 나에게도 일어나는 것이다. 내일은 내가 리스트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현명한 사람은 들으면 알고, 똑똑한 사람은 보면 알지만, 미련한 사람은 당해야 알고, 답답한 사람은 망해야 안다.' 개인이든 국가든 남의 일에서 교훈을 얻는 경우는 거의 없다. 자기가 당하고 나서야 배우는 법이다. 타산지석도 어렵기 때문에 강조되는 것이다. 일이 터지면 후진국은 '사람'을 바꾸고, 선진국은 '제도'를 바꾼다. 검찰이 '성역 없는 수사'를 하기도 어렵지만, 어렵사리 해서 많은 정치인을 사법처리하면 '부패 없는 깨끗한 나라'가 될까? 나는 불가능하다고 본다. 지금의 제도로는 성인군자가 정치를 해도 범죄자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도덕성을 생명으로 했던 재야인사들과 종교인도 정치권에 들어와 범죄자가 되었다. 선관위 고위 인사, 판사, 검사들도 예외가 아니다. 그들이 특별히 부도덕해서 그런 게 아니다. 비현실적인 법과 제도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민주주의 국가라면 정치와 돈의 문제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1990년대 기업인 출신의 정치인은 "기업 할 때는 모이면 정치 얘기를 했는데, 정치를 해보니 모이면 돈 얘기만 하게 된다"고 하소연했다.

'많이 먹은 놈과 적게 먹은 놈''걸린 놈과 걸리지 않은 놈''혐의 입증된 놈과 입증 안된 놈'정치인에게 남의 일 아닌 게이트누구나 그 그물에 걸릴 수 있다사법처리만 하면 부패 척결될까성인군자가 정치해도 현 제도론범죄자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다깨끗이 걷고 투명하게 쓰도록과감히 후원제도를 바꿔야 한다

'오세훈법'은 한국판 금주법이라 할 만

규제가 많을수록 부패와 비리는 커지고, 리스크가 클수록 비용은 상승한다. 2004년에 발효된 정치자금법 개정안, 이른바 '오세훈법'은 한국판 '금주법'이다. 1919년 미국 헌법 수정안 18조에 의해 도입된 이 법은 1933년 미국 헌법 수정 21조에 의해 폐지되었다. 알코올 중독과 범죄를 줄일 목적으로 도입되었지만 실제로는 밀주를 만들어 유통시킨 '마피아'만 떼돈을 벌게 만들었다. 세계적인 거장인 세르조 레오네 감독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Once Upon A Time In America)는 이 시대를 그린 명작이다. 그는 뉴욕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에서 유대인 이민자의 아이들이 금주법 시대에 밀주를 만들어 돈을 벌면서 '마피아'로 성장해 가는 과정을 밀도 있게 그려냈다. 금주법이 폐지되자 돈벌이가 막히게 된 이들은 연방준비은행을 털 계획을 할 정도로 대담해졌다. 이 계획을 주도했던 맥스(제임스 우즈)는 갈수록 대담해져 결국 신분 세탁을 거친 뒤 정계에 진출하여 장관까지 된다. 그가 정계에 진출한 것도 결국은 돈을 더 많이 벌기 위한 것이었던 만큼 권력을 이용해 온갖 부정과 비리를 저지르다 최후를 맞게 된다. '오세훈법'도 2003년 '차떼기 사건'으로 상징되는 불법 정치자금 조성을 차단할 목적으로 만들어졌지만 정치인과 정당에 대한 후원을 지나치게 막아 결과적으로 리스크를 안고 뛰어들어 불법 정치자금을 제공하는 사람들에게 '사적 이익'의 기회를 안겨주고 있다. 법과 제도를 바꾸지 않으면 다음에는 더 대담한 불법이 나라를 흔들게 될 것이다.

정치를 바꾸려면 세 가지 발상의 전환을 해야 한다. 첫째, 공천이 투명해야 한다. '대기번호표'는 공정하고 예측가능하다. 공천도 그렇게 해야 한다. 언제, 어떤 방법으로 후보를 선출하는지를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금지된 선거운동을 전면적으로 풀어야 한다. 개인이나 단체 누구나 특정 후보나 정당을 지지하거나 반대할 수 있어야 한다. 정치인과 유권자가 만나는 일은 좋은 일이지 의심받을 일이 아니다. 이는 민주주의 철학에 관한 문제다. 장려할 일을 범죄로 보면 민주주의는 발전할 수 없다. 셋째, 정치에는 돈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폭력을 배제하고 말로 싸우는 제도다. 더 많은 지지를 얻기 위한 홍보와 조직을 위해서는 돈이 들어간다. 민주주의의 비용이다. 깨끗하게 걷고 투명하게 쓸 수 있도록 과감하게 후원제도를 바꿔야 한다. 대가를 기대하는 특정인의 불법 자금이 아니라 정치인과 정당을 지지하는 불특정 다수와 기업에 정치자금의 길을 열어줘야 한다. 지금과 같이 걸핏하면 게이트가 터지고 리스트가 폭로되면 우수한 자원이 정치에 들어오지 않는다.

한국은 공공성이 결여된 사회다. '이익은 사유화'하고 '손실은 사회화'한다. 돈을 벌 방법을 연구하는 기업 연구소는 많아도 공공의 이익을 위한 싱크탱크는 찾아보기 힘든 부끄러운 나라다. 여의도에는 권력(정치), 돈(금융기관), 인기(방송)의 욕망을 좇는 군상들이 뒤엉켜 '사익'을 채우고 있다. 우리가 더 나은 나라를 후손에게 물려주려면 대한민국 경제에 걸맞게 여의도에 싱크탱크가 몇백개는 있어야 한다. 그곳에서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나라의 미래를 놓고 뜨거운 토론과 세미나가 열려야 한다. '공익'을 위한 비용을 치르지 않는 나라는 선진국이 될 자격이 없다. 월드컵에서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서는 수십억원의 돈을 주고 외국인 감독은 데려와도 대통령을 비롯하여 대한민국의 운명을 책임질 정치인들에게는 아무 투자도 하지 않는다. 국가의 불행이다. 정치인이 돈 걱정 없이 국가를 이끌 비전을 준비할 수 있도록 기꺼이 비용을 지급해야 한다. 정치지도자를 키우지 않고 조롱하는 나라는 남으로부터 조롱당한다.

박연차·성완종 게이트에서 얻어야 할 것

나는 2009년 5월에 한 일간지에 <고전, 포르노, 정치자금>이라는 칼럼을 기고한 적이 있다. '세상에는 모든 사람이 다 아는 척하지만 사실은 거의가 모르는 것이 있는데 '고전'이 그것이다…반대로 세상에는 모든 사람이 다 모르는 척하지만 사실은 거의가 알고 있는 것이 있는데 '포르노'가 그것이다…세상에는 어떤 사람들은 고전처럼 대하고 어떤 사람들은 포르노처럼 대하는 것도 있는데 '정치자금'이 그것이다…대중은 정치자금에 대해 거의 모르면서도 마치 잘 아는 듯 엄밀한 도덕적 잣대로 비판한다. 정치인들은 정치자금에 대해 너무나 잘 알지만 누구도 꺼내놓고 말하지 않는다…세상 사람 모두가 돈으로부터 자유롭기가 쉽지 않지만 정치인은 특히 더하다. 돈 때문에 감옥에 다녀온 정치인도 꽤 되지만 웬만한 정치인치고 돈 때문에 검찰에 불려가지도 않고 정치하기란 정말 어렵다. 전직 대통령, 국회의원, 자치단체장, 교육감 등 우리가 직접 뽑은 사람들이 우리가 직접 뽑지 않은 검찰에 쉴 새 없이 불려 나간다. 누구나 돈 문제로 비판하기는 쉽다. 그러나 법이란 현실적이어야 한다…현실적이고 합법적인 정치자금 제도를 만들지 않으면 모든 정치인은 정치에 입문하는 순간 잠재적 범죄자가 된다. 이미 입문한 정치인들은 '○○○게이트'가 터질 때마다 리스트에 이름이 나올까 벌벌 떨 수밖에 없다. '모든 정치인은 교도소 담장 위를 걷고 있다'는 말은 농담이 아닌 현실이다. 비현실적인 법과 제도를 고치지 않고 정치인의 '도덕성'에 모든 책임을 떠넘기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지금이 정치자금 제도를 개선할 기회다. 우리도 박연차 게이트에서 뭐라도 얻어야 하지 않겠는가.' 6년 뒤에는 이런 칼럼을 쓰지 않았으면 한다.

박성민 정치 컨설턴트

▶박성민

정치 컨설턴트. 1991년 설립한 '민(MIN) 컨설팅' 대표. 30년간 정치를 현장에서 관찰하고 수많은 선거를 이끌었다. 전략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승리를 위한 캠페인 방법을 몸으로 익혔다. 세계 최고의 전략컨설팅 회사를 꿈꾼다. 생각이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지혜가 민주주의라고 믿고 있다. '힘든 일은 있어도 나쁜 일은 없다'는 인생관으로 버틴다. 책과 영화, 커피를 사랑하며 걷는 것을 즐긴다. '2017 오디세이아'를 통해 차기 대선을 향한 여정을 독자들과 함께한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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