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덜 고추는 머리 쪽을 들고 먹어야 한다

2015. 2. 7.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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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강원도의 맛] 콩죽과 지진 막장 고추장아찌 고춧물이 튀지 않게 먹으라고 당부했건만

기어코 물이 튀어 싸움이 나고 말았네

초가을에 막장에 박아두었던 고추장아찌가 맛들 때쯤이면 별미로 꼭 콩죽을 쑤어 먹습니다. 고추장아찌는 두 종류로 나누어 담급니다. 겨울 동안 일찍 먹을 고추는 맛이 잘 배도록 고추 끝 부분을 바늘로 찔러 구멍을 내주고 1년 내내 두고 먹을 것은 구멍을 내지 않고 그냥 막장에 넣습니다. 1년 두고 먹을 고추에 구멍을 뚫으면 시간이 지날수록 삭아서 껍데기만 남기 때문입니다.

구멍을 낸 막장 고추장아찌를 막장과 함께 퍼담고 짠맛을 줄이기 위해 무를 도톰도톰하게 썰어 넣고 미리 준비한 화롯불에 버글버글 지지다가 은근히 보글보글 끓여서 고추가 푹 무르도록 큰 장뚜가리로 하나 빡빡하게 지져놓습니다. 잘 익은 시원한 동치미도 준비합니다.

이제 콩죽(사진)을 준비합니다. 가을에 추수한 햇콩을 한 되들이 양푼으로 하나 빡빡 움켜서 깨끗이 씻어 큰 그릇에 물을 많이 붓고 불립니다. 콩이 너무 많이 들어가면 콩죽이 텁텁하고 콩이 적게 들어가면 고소한 맛이 없어서 양 조절을 잘해야 합니다.

아침나절에 담근 콩이 다 불으면, 저녁 할 때쯤 담갔던 물에 콩을 살짝 삶아서 맷돌에 아주 조금씩 떠넣으며 곱게 갈아놓습니다. 콩을 너무 오래 삶으면 뜬내가 나고 너무 덜 삶으면 비린내가 나기 때문에 콩을 솥에 안치고 불을 때면서 콩이 부르르 끓어오르면 불을 멈추고 찬물에 얼른 담가 식혀서 건져놓습니다. 콩 삶은 물도 버리지 않고 솥에 남겨두었다 그대로 죽 국물로 사용합니다. 곱게 갈아놓은 콩을 콩 삶은 물과 함께 큰 솥에 안치고 쌀을 씻어 넣고 물을 맞추고 넘치지 않게 조심해서 끓입니다. 자칫 끓어 넘치면 사정없이 콩물이 넘쳐 먹을 것도 없고 맛도 없어집니다.

벅(부엌) 앞을 떠나지 않고 지키고 불을 때면서 끓을 때쯤이면 솥뚜껑을 열어 한번 저어주고 솥뚜껑을 반쯤 열어놓고 넘치지 않게 끓이다가 다 끓으면 그제야 솥뚜껑을 닫고 불을 치우고 잠시 뜸을 들여 작은 버래기 두 개에 퍼담습니다. 밥때가 되면 언제나 객식구가 있기 마련이어서 여분을 더 만듭니다.

아버지와 할머니와 집안 할머니와 큰오빠·작은오빠가 한 상에 앉고, 어머니와 동생과 친척 아주머니가 한 상에 먹습니다. 지진 고추를 작은 뚝배기에 담아 동치미와 함께 차립니다. 어머니는 죽을 먹기 전에 당부하십니다.

느덜 고추는 머리 쪽을 들고 먹어야 한다. 꼬리 쪽을 들고 먹으면 고춧물이 멀리 튀어 남의 옷도 버리고 얼굴에도 튈 수가 있으니 아예 아덜은 손으로 들고 맛있게 먹고 다 먹은 뒤에 손을 씻어라. 두 번이나 얘기해주셨습니다.

콩죽 한 그릇에 지진 막장 고추를 먹느라고 정신이 없습니다. 모두 다 약속이나 한 것처럼 죽 한 숟갈 떠먹고 고추 한번 베어먹고 다음에는 죽을 뜬 수저에 고춧물을 부어서 먹고 나머지는 죽과 함께 먹고, 고추 하나에 죽을 세 숟가락씩 먹습니다. 지진 막장 고추는 짭조름한 물이 나오고 물렁하면서도 너무 짜지도 않고 맛있습니다.

동생 친구가 와 있었는데 동생과 마주 앉아 저녁을 먹습니다. 두 놈은 서로 빙글거리며 고추를 거꾸로 들고 깨물어서 고춧물을 찍 튀깁니다. 갑자기 동생 친구가 아이구 눈이야 앙앙∼ 웁니다. 너 이 새끼 내 얼굴에다 일부러 고추를 칙 깨물어서 눈에 고춧물이 들어가게 했지. 미안해, 실수였어. 동생은 잽싸게 도망갔습니다. 이 새끼 꼼짝하지 말어. 나도 네 얼굴에 대고 고추를 칙 깨물어서 네 눈에 고춧물을 튀길 거여. 그래야 얼마나 쓰라리고 아픈지 알지. 친구는 동생을 잡으려고 쫓아다니며 한번 터진 울음이 끝이 안 납니다. 저녁을 먹을 수 없이 시끄러워 오빠들이 동생을 붙들어다줄 테니 울지 말라고 달랠수록 더 서럽게 웁니다. 집이 그리워진 모양입니다.

오빠들은 자기들이 아끼던 팽이도 주고 멀리 뛰어가는 자치기도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저 새끼가 가지고 있는 예쁜 팽이채를 주면 안 울겠다고 하여 동생 팽이채를 주고서야 조용해졌습니다.

동생 친구는 언제 싸웠느냐는 듯이 고추를 뭉텅뭉텅 베어 먹으며 동치미 국물도 훌훌 마시면서 죽 한 그릇을 순식간에 먹어치우고 떼써서 번 물건들을 가지고 동생보고 빨리 먹으라며 나갔습니다. 어른들이 어이가 없어 웃습니다. 자칫하면 우리도 싸울지 몰라, 조심해서 먹자며 죽 그릇을 상 끝으로 잡아당겨 거리를 넓힙니다. 죽 위에 막장에 끓인 무를 얹어 먹어도 맛있습니다. 쉬었다 먹으니 더 맛있다고 동치미에 있는 배추도 찢어서 죽 위에 걸쳐 먹고 무와 동치미 국물도 마시고 아주 한가롭게 천천히 즐기며 먹습니다. 전순예 1945년생 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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