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장에 밥 비벼 양푼째 올린 제사상

2015. 10. 9.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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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강원도의 맛]이밥: “열심히 일해서 우리도 채김치에 고추장 넣고 이밥을 비벼먹고 살자”며 일만 시키던 시어머니가 갑작스럽게 쓰러졌는데…

구라우에서 시집온 새댁은 제삿날 시어머니 몰래 이밥을 한 주걱 훔쳐 찬장 밑에 감춰두었습니다. 다들 잠든 틈을 타 몰래 고추장 한 숟갈 넣고 비벼먹을 생각입니다. 새댁네는 논농사를 안 해 제삿날에만 이밥을 먹어볼 수 있습니다.

시어머니는 야속스럽게도 뭐든 아낍니다. 고추장도 조그만 오갈단지에 하나 해놓고 남자들 상에만 조그만 종재기에 떠놓습니다. 여자들은 막장이나 먹고 1년 가야 고추장 먹어보기가 힘듭니다. 임신하여 비틀어져도 먹고 싶은 것을 먹어본 적이 없습니다.

오랫동안 기다린 제삿날 밤, 가슴 두근거리며 이밥 한 숟갈 고추장에 비벼먹다가 시어머니에게 들켰습니다. 어데 여편네가 고추장을 먹나, 어엉? 손님 오면 먹구 1년을 먹어야 하는데 어엉? 못된 버르장머리를 하나! 날이 밝으면 친정으로 가그라~. 새댁은 어머님 다신 안 그럴게유 다신 안 그럴게유, 빌어 빌어 살았습니다.

다수리에 시어머니 친척 형님이 혼자 농사를 짓고 삽니다. 아들들은 도시로 떠났습니다. 1년에 한 번 형님네 타작날은 시어머니가 새댁을 데리고 가줘서 이밥을 고추장과 채김치(무생채)에 실컷 비벼먹을 수 있습니다. 다수리 사는 형님은 항상 말버릇처럼 내가 아들네 집으로 살러 가면 집 앞 반듯한 논 열 마지기는 자네가 사게, 합니다. 시어머니는 딴 사람한테 팔면 안 돼유, 그 약속 꼭 지켜유, 답합니다. 걱정 말게나, 큰아들한테 꼭 자네 주라고 얘기해놓음세.

시어머니는 집 안의 돈이 될 만한 것은 다 갖다 팔아 돈을 모읍니다. 1년에 쌀 한 말 사다가 조그만 장롱 속에 쌀자루를 넣고 자물통을 잠그고 열대(열쇠)를 허리띠에 차고 다닙니다. 시어머니는 새댁이 잠시도 쉬는 꼴을 못 봅니다. 이때 허리띠 졸라매고 열심히 일해서 우리도 채김치에 고추장 넣고 이밥을 비벼먹고 살자고 합니다. 새댁은 너무 아끼고 일만 너무 많이 하는 시어머니를 바로 쳐다보기도 싫습니다.

추석을 앞두고 시어머니는 내일 장에 팔러 갈 나물을 손질하다가 왜 이렇게 졸리나, 하며 눕습니다. 감기인 줄 알았는데 삼일 되는 날 며늘아 며늘아, 새댁을 불러 열대를 쥐어주고는 손이 힘없이 툭 떨어졌습니다. 어머니 어머니, 아무리 흔들어도 꿈적하지 않습니다. 너무 기가 막혀 눈물이 나지 않습니다. 시어머니의 장롱을 열었습니다. 낡은 옷 몇 가지와 작은 쌀자루 하나가 나왔습니다. 쌀자루 속에 돈뭉치가 들어 있습니다.

시어머니가 너무 갑자기 그것도 가실 때도 되지 않았는데 돌아가셔서 다들 충격이 너무 컸습니다. 다수리 친척 할머니네 큰아들이 새댁을 불렀습니다. 집 앞 반듯한 논 열 마지기를 사라고 합니다. 논 열 마지기를 사기에는 소까지 팔아 보태도 모자랍니다. 다수리 할머니는 나는 아들네 집으로 가니 이참에 이 집으로 이사를 오게, 있는 돈만 내고 남은 땅은 도지로 주고 갈 테니 부지런히 벌어서 갚게, 하십니다.

구라우 새댁은 열다섯에 열여섯 살 신랑한테 시집왔습니다. 그때부터 머리가 허연 지금도 사람들은 구라우 새댁과 새신랑이라고 부릅니다. 이제 새댁네는 시어머니 덕분에 이밥에 채김치에 고추장 비벼먹고 삽니다. 구라우 새댁은 함께할 수 없는 시어머니 생각으로 늘 명치끝이 아립니다. 시어머니 살아생전 늘 원망과 불평으로 살았던 것을 두고두고 후회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부질없는 짓인 줄 알지만 시어머니 제삿날을 위하여 할 수 있는 정성을 다합니다. 정성 들여 가꾼 올벼쌀로 이밥을 합니다. 햅쌀은 물을 잘 맞추어야 합니다. 쌀 위에 자작자작하게 물을 붓고 고슬고슬 이밥을 짓습니다. 시어머니 제사를 위하여 고추 농사도 정성 들여 지어 고추장을 별도로 담급니다. 제사상에는 빨간 채김치를 푸짐하게 올립니다. 고추장도 큰 탕기로 하나 올립니다. 이밥에 채김치 넣고 고추장에 밥 비벼 양푼째 올립니다. 시어머니 생전의 소원을 이루시라고….

전순예 1945년생 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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