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투사·CEO·원내대표·부천시장..'혁신 전도사' 원혜영

구경민 기자 2014. 8. 14.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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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300][국회의원 사용 설명서]원혜영 국회 남북관계발전특별위원회 위원장

[머니투데이 구경민 기자][열린정책 소통합시다] [[the300][국회의원 사용 설명서]원혜영 국회 남북관계발전특별위원회 위원장]

그래픽=이승현 디자이너.

"우리나라 국회의원 가운데 이만한 국회의원이 몇명이나 될까?" 한 시간 가까이 진행된 인터뷰 내내 원혜영 국회 남북관계발전특별위원회 위원장의 말 한마디 말한디에서 진실함이 묻어났다. 인터뷰로 그를 파악하는 데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를 더 알고 싶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그의 자서전 3권을 손에 들었다. 이 책들을 읽어 내기까지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민주 투사, 유기농 식품회사 풀무원 창업자, 문화도시 부천 창조자' 새정치민주연합 원혜영 의원에 따라붙는 수식어들이다. 그는 부드럽고 원만한 성격의 화합형 리더로 꼽히지만 알고 보면 역동적이고 다이나믹한 삶을 살아왔다. 그 결과 정치개혁의 주역으로 경영· 지방자치·정치분야에서 괄목할만한 혁신의 성과를 남겼다.

1951년 경기도 부천에서 태어난 그는 전쟁에 대한 깊은 기억은 없지만 전쟁이 남긴 것이 무엇인지 어려서부터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갈 곳 없는 전쟁고아와 장애아이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면서 공동체 생활을 통해 배우게 된 것이다. 아버지의 베품으로 사랑하는 법과 세상을 품는 법, 힘들고 불편해도 올바른 일을 하는 법을 익히게 됐다고 그는 말한다.

어떻게 보면 그를 지금의 정치인으로 이끈 시발점은 대학시절 부터다. 서울대 교양과정부 학생회장으로 반독재 민주화 운동을 주도하다 두 차례 복역하고 세 번 제적당했다. 1975년 학교 선배의 동갑내기 여동생을 만나 결혼을 하고 아들을 낳았지만 민주화 운동으로 도피생활을 하면서 가정에 신경을 쓰지 못했다. 신문기자로 가정을 책임지던 아내마저 전두환 신군부의 탄압으로 해직을 당했다.

당장 먹고 사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당시 대학 졸업장도 없고 옥살이까지 한 사람이니 어디 제대로 된 직장을 알아볼 수도 없었다.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 풀무원 식품의 창업이었다. 아버지의 영향이 크게 미쳤다. 아버지 원경선씨는 유기농 선구자였다. 아버지가 일궈낸 유기농으로 생산한 농산물을 유통시켜야겠다고 결심했다. 1981년 31살 나이에 압구정동에서 '풀무원농장 무공해 농산물 직판장'을 시작했다.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풀무원은 그렇게 태어났다. 중화학공업 위주의 1980년대에 '안전한 먹거리, 깨끗한 먹거리'라는 새로운 식품문화를 창조해 성공한 기업인이 됐다. 풀무원 식품이 자리를 잡자 고교 동창 남승우(현 풀무원 사장)에게 회사를 맡기고 더 큰 뜻을 펼치기 위해 본격적으로 정치권에 뛰어들었다.

기업을 운영하면서도 재야와의 끈을 이어간 그는 1987년 6월 항쟁 이후 양김(兩金)의 분열로 정권교체에 실패하자 야권 통합 운동과 새로운 정치운동을 주도했다. 이듬해 한겨레민주당 대변인으로 정치권에 첫발을 디딘 뒤 14대 총선에서 국회에 입성했다. 국회 입성 후 고 제정구 의원 등과 함께 정치비용 공개, 외제차 타지 않기 등 헌정 사상 최초의 정치 자정운동을 주도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계복귀 선언 이후에는 '통추(국민통합추진회의)'에 참여, 소신행보를 보였고 이때 통추 멤버였던 노무현 전 대통령과 두터운 친분을 쌓았다. 15대 총선에서 낙선한 뒤에는 통추 멤버들과 함께 '하로동선(夏爐冬煽)'이라는 고깃집을 운영해 화제를 낳기도 했다.

원혜영 위원장이 사무실에서 만화가들이 캐릭터를 그려 선물한 액자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다. 부천을 '만화 문화'의 도시로 발전 시킨데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만화가들이 직접그린 캐릭터 액자를 원 위원장에게 선물을 했다고 한다./사진제공=최부석 기자

원 위원장이 생활정치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98년~2003년 경기도 부천시장을 역임하면서부터다.

부천시장을 하면서 자기 색깔을 가진 도시로 만들었다.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일에 능력을 발휘했다고 그는 생각한다. 부천시장으로 재직한 6년여 동안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부천국제만화영화축제 등 국제적 문화행사를 이끌어 특색 없던 수도권 변두리 도시 부천을 대한민국 대표 문화도시로 탈바꿈 시켰다.

그는 민주당 원내대변인을 포함해 열린우리당 최고위원, 사무총장, 정책위의장, 국회 예결특위 위원장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또 대선 후 민주당이 '수도권 전멸'을 우려하는 분위기에서도 수도권에서 유일하게 당선될 인물로 꼽힐 정도로 지역구에서 입지를 확고히 다졌다.

그는 이제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 통일로 하나 된 '큰 나라'를 구상하고 있는 것. 지난달 7일 남북관계발전특별위원장에 선출된 데도 그의 뜻이 컸다. 그는 8000만명의 겨레가 세계 어느 나라 못지않게 잘사는 좋은 사회. 그것이 그가 꿈꾸는 '한반도 통일 강국'이라고 자서전을 통해 밝혔다.

[프로필]

△1951년 경기 부천 △경복고 △서울대 역사교육과 △(주)풀무원식품 창업·경영 △한겨레민주당 대변인 △제14·17·18·19대 국회의원 △국민통합추진회의 대변인 △민선 2·3기 경기 부천시장 △열린우리당 최고위원 △17대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장 △민주당 원내대표 △ 민주통합당 초대 대표 △국회 남북관계발전특별위원장

[키워드→혁신]

지난해 11월. 원 위원장은 한신대학교 총학생회 초청으로 한신대 60주년 기념관에 섰다. '혁신하라 대한민국'을 주제로 특별강연을 펼치기 위해서다.

"나는 대한민국의 가장 창조적 기업인 풀무원을 창업한 사람이고 익명의 도시 부천을 '문화도시'로 변화시켰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에 가장 필요한 게 혁신입니다. 이를 통해 빈부격차가 크지 않고 시민의 정치참여가 활발하며 사회안전망이 잘 갖춰진 풍요롭고 행복한 사회로 나가야 합니다."

그는 강연 내내 '혁신'을 강조했다. 강연을 마치며 혁신을 위해 끊임없이 도전하는 삶을 살아왔다고 자평하고 학생들에 도전과 혁신에 매진할 것을 당부했다.

원 의원은 '혁신'이란 자신의 소명이자 정치 철학이라고 밝힌다.

그는 과거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20대 반독재 민주화 운동으로 나라체제 혁신, 30대 풀무원 창업으로 먹을거리 혁신, 40대 민선 부천시장으로 도시혁신, 그리고 50 대 국회의원으로 국회선진화법 등 정치문화 혁신을 일궈왔다"고 말했다.

혁신이란 '무엇인가를 크게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 기존에 있던 것에 작은 변화를 단행해 만들어내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그의 대표 법안은]

원 위원장은 지난 18대 국회에서 '국회선진화법' 도입을 주도했다. 이 법안은 국회의장 직권상정 조건을 천재지변, 전시 또는 사변과 같은 국가비상사태로 엄격히 제한하는 내용을 담았다. 또 쟁점 법률안이 통과되려면 재적의원 과반이 아니라 5분의 3(180명)에게 동의를 얻도록 했다. 국회 폭력을 막아보자는 일종의 자정 노력이었다. 이후 국회에서 몸싸움을 하는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기부문화 활성화를 위해 지난해 2월 발의한 '조세특례제한법 일부개정법률안'도 원 의원의 대표적인 법안이다. 올 1월1일 본회의 통과해 취지대로 법이 개정된 상태다. 이 법안은 지정기부금을 소득공제 종합한도 대상에서 제외해 기부문화를 활성화 하자는 취지를 담고 있다.

[그의 사람들]

원 위원장은 유인태 새정치민주연합 의원과 김부겸 새정치민주연합 전 의원과 함께 1988년 총선을 앞두고 새정치의 효시라는 '한겨레민주당'을 만들었다. 유 의원과 김 전 의원과는 이념적 스펙트럼이나 정치 과정을 함께 해왔다.

원 위원장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계복귀 선언 이후에는 '통추(국민통합추진회의)'에 참여, 소신행보를 보였고 이때 통 추 멤버였던 노무현 전 대통령과 두터운 친분을 쌓았다. 그는 고 김 대통령과 노 대통령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경기도지사 출마를 결심하기도 했다.

[연관 검색어→기부]

원 위원장은 '기부 정치인 원조'로도 불린다. 사회운동을 하기 위해 풀무원을 그만둔 후 창업자 몫으로 받은 21억원 상당의 풀무원 지분 전부를 처분해 장학재에 기분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부터 '기부 정치인'이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었다. 장학재단 설립 이후 16년 동안 2000여 명의 학생들에게 모두 10억원에 달하는 장학금을 전달했다. 2009년 모친상을 치르며 들어온 부조금 1억여원도 지역 시민단체에 전달하는 등 기부활동에 매진해 오고 있다.

하지만 지역구 부천에서 30평대 아파트 1억4000만원 전세를 살고 있는 그는 집주인이 물가 인상을 이유로 전세금 4000만원을 올리자 은행 대출을 받아 전세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사연이 공개된 후 인터넷 상에서는 '진정 행동하는 양심' '아름다운 정치인' 등의 찬사가 줄을 이었다.

아직도 원 위원장을 성공한 CEO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 후원금 모금이 어려울 때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후회는 없고 사업을 다시 할 생각도 없다"는 소신을 거듭 밝혀왔다.

원 위원장은 검소함이 몸에 배어있다. 지난해에는 도저히 수리가 불가능하다는 판단에 어쩔 수 없이 차를 새로 바꿨다. 지난 2004년 1월 구입해 누적 주행거리가 45만 km로 웬만한 영업용 택시의 주행거리를 넘어서는 것으로 더 이상 수리해 타고 다닐 수 없다는 정비사의 말에 교체하기로 했다. 그의 검소한 생활이 다시 한 번 세상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자동차를 새로 바꾼 것이 화제가 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는 자서전을 통해 "정치인의 길에 들어선 이상 부를 축적하는 것에 엄격히 선을 그어야 한다. 공인인 정치인이 부 축적에 몰두하고 공직에 있는 사람 이 권력을 돈을 버는 기회로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정치인은 국민에게 모범이 돼야한다"고 밝혔다.

[이 한장의 사진]

생전의 원경선 원장(오른쪽)과 아들 원혜영 위원장의 모습./사진=원혜영 위원실

원 위원장의 인생 멘토는 '생명 농사꾼', '유기농의 선구자, '인간 상록수'로 널리 알려진 아버지 고(故) 원경선 풀무원 원장이다. 그가 '섬김의 정치, 사람이 기준'이라는 모토로 일관된 정치를 할 수 있었던 데는 아버지의 역할이 컸다.

원 위원장이 학생운동에 뛰어들었을 때 '데모의 불이익'보다는 '학생시위가 옳은 일이냐 아니냐'로 판단하고 아들을 묵묵히 지원했던 아버지였다. 수배 중이던 원 위원장을 쫓아 형사가 집으로 왔을 때 고인은 "부모님은 좋은데 아들이 왜 데모를 하느냐"는 형사의 말에 "아들을 제대로 길렀으니 그런 일(학생운동) 하는 것 아니냐"고 도리어 역정을 내기도 했다고.

그는 처음 정치를 시작하려 했을때 '사람을 기준으로 정치를 잘하겠다'는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 왔다고 말했다.

원 위원장의 사무실에는 원경선 선생과 생전에 함께 찍은 사진이 크게 걸려 있다.

[요! 주의]

과거 남북관계발전특위는 '식물특위'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성과뿐 아니라 특위 차원에서의 활동조차 미미했기 때문이다. 앞으로 그가 남북 관계 발전에 있어 남북관계발전특위를 어떻게 이끌고 어떠한 성과를 내놓을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또 새정치민주연합 당 내에서는 과거에 비해 당내 영향력과 세력이 약해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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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투데이 구경민 기자 kmkoo@mt.co.kr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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