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냥 왕' 또는 '금융 사기꾼'이라 불린 사나이

2014. 8. 10.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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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개량 성냥'으로 유럽 성냥산업 독점한 스웨덴의 크뤼게르

불투명한 자금 흐름·무분별한 투자로 200여개 기업 일궈

'금융 투기 다빈치' '천재 사기꾼' 등 오명 속 비참한 말로

[먼 경제 이웃 경제]

얼마전까지 성냥은 생활필수품이었다. 초기 성냥의 점화 부분은 황으로 만들어 색이 노랬는데, 독성이 강했을 뿐만 아니라 불이 너무 잘 붙어 크고 작은 사고가 잦았다. 20세기 초 한 남자가 머리 부분을 개량해 점화성을 낮췄다. 그는 이 성냥을 '안전한 성냥'으로 광고했다.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붉은색 성냥 머리가 이때 나온 디자인이다. 안전한 빨간 성냥은 날개 돋친 듯이 팔려 나가 세계 시장을 휩쓸었다. 그때부터 그의 별명이 '성냥왕'이었다 .

이바르 크뤼게르 (Ivar Kreuger, 1880~1932).

스웨덴의 경제사를 말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름이다. 1920년대 이름 없는 변방 국가 스웨덴에 신화 같은 존재로 통하던 남자다. 스웨덴은 철광석과 우거진 숲을 제외하고는 특별한 자원이 없다. 1년에 절반은 어둠에 덮여 있는 춥고 척박한 나라다. 하지만 크뤼게르의 명성은 전 유럽을 넘어 미대륙까지 퍼졌다. 그는 재계의 거물이자 이웃 유럽 국가의 총리와 왕래하고 미국 대통령이 자문을 구하는 인물이었다.

개인적인 흥망사도 흥미롭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크뤼게르가 스웨덴 경제구조와 세계 금융산업에 미친 영향은 적지 않다.그의 사기 수법은 당시 스웨덴에만 머문 것이 아니다. 오늘날 투자은행의 대부분이 그가 고안한 금융 발명품을 팔고 있다.

크뤼게르는 '금융 절도의 다빈치', '천재 사기꾼' 등의 별명을 갖고 있지만 주가조작꾼이기 전에 유능한 사업가였다. 그의 아버지는 스웨덴의 남동쪽 해안도시인 칼마르에서 성냥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크뤼게르는 16세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스웨덴 왕립공과대학KTH에서 기계공학을 공부했다. 20세에 기계공학과 도시공학 석사 학위를 딴 것을 보면 머리가 비상했던 듯하다.

건설업을 통해 모은 자본금으로 크뤼게르는 투자사를 차린다. 먼저 아버지의 성냥 공장을 중심으로 여타 군소 성냥 공장을 인수한 후 스웨덴 내 성냥 생산과 공급의 독점권을 따낸다. 다음으로 이웃 나라 노르웨이의 성냥 생산 업체를 차례로 인수해 북유럽 성냥 시장을 접수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유럽에서 가장 큰 시장인 독일의 성냥 생산과 판매의 독점권을 얻는다.

성냥은 스웨덴의 가장 중요한수출품이었다. 당시에도 특정 산업, 특히 생필품의 독점 생산권은 아무나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크뤼게르는 넘치는 자본을 국가에 대출하고 그 대가로 성냥 독점 판매권을 얻어 냈다. 독일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독점권을 따냈다. 안전한 성냥을 출시한 이후 크뤼게르는 세계 성냥 시장의 75퍼센트를 점유했다. 생필품의 생산과 판매 독점권을 가진 그는 스웨덴과 미국의 큰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다양한 기업을 인수하기 시작한다.

제지(SCA), 금광 채굴(볼리덴Boliden), 은행(스칸디나비아 신용대출회사Skandinaviska Kreditaktiebolaget) 등 1931년 당시 그가 손을 댄 기업이 무려 2백여 곳에 달한다. 특히 그가 보유한 채굴권은 세계 철광 시장의 50퍼센트를 좌지우지할 정도였다. 그 다음으로 휴대전화(에릭손), 탄광, 철도, 목재, 영화 유통, 부동산, 언론사에 이르기까지 업종을 넘나드는 문어발식 확장을 한다. 일찍이 재벌의 자리에 올랐다.

크뤼게르는 공학을 전공했음에도 언변이 좋았다. 그가 호소력이 짙은 말투로 투자자들에게 한바탕 사업 설명을 하고 나면 투자금이 쏟아져 들어왔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한 분야를 점령하기로 마음을 먹고 나면 먼저 인수 합병을 통해 몸집을 불렸다. 저항하는 기업이 있으면 숨통을 조이는 방식으로 줄줄이 기업들을 병합해 갔다. 그렇게 자신의 회사를 독과점으로 만들어 가치를 띄웠다. 미국 대통령의 초대로 백악관도 방문했다. 국제적인 거물로 통했던 그의 재산은 당시 3억 크로나에 달했다고 한다. 지금 가치로 환산하면 12조 원에 이른다.

물론 눈부신 성공 뒤에는 어두운 면이 있었다. 어느 누가 무슨 재주로 10년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정직하게 일을 해서 그렇게 큰돈을 벌 수 있겠는가. 하지만 금융시장에 대한 크뤼게르의 이해와 아이디어만큼은 금융 공학이라 불러도 될 정도였다. 그가 돈을 불리고 굴리는 기술은 오늘날 골드만삭스나 파산한 리만브라더스 등의 투자은행이 머리를 조아려야 할 만큼 혁신적이었다. 그가 개발한 금융 상품과 자산 운용 기법은 현대의 투자은행이 지금도 두루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크뤼게르를 그 시초라고 봐도 무리가 없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

크뤼게르는 빚도 자산임을 일찍이 깨달았다. 그는 은행에서 낮은 이자로 융자를 받아 자신이 소유한 기업에 투자했다. 값이 오르면 그것을 담보로 또 대출을 받았다. 이렇게 연쇄적으로 여러 회사에 투자해 재산을 계속 불렸다. 그뿐만 아니다. 독점으로 운영하는 성냥 공장을 미끼로 고배당을 약속하는 장기 무담보 사채를 발행해 자금을 쓸어 담았다. 해외 투자자들에게는 주식과 채권의 중간 개념인 주식예탁투자증권을 발급해 투자금을 모았다. 이는 당시로 치면 새로운 개념으로 해외투자가 막혀 있던 돈 많은 미국의 투자자와 해외 기업을 연결하는 역할을 했다.

크뤼게르는 자신이 투자한 회사의 경영권을 확보하기 위해 주식의 등급을 나눴다. 즉 배당은 받을 수 있지만 의결권을 행사할 수 없는 주식과 한 주에 여러 의결권을 얹어 의결권에 가중치를 더한 주식이다. 오늘날의 투자사들도 소액 주주들이 경영권을 주장하는 것을 막기 위해 단순 투자 주식과 의결권이 있는 주식으로 주식의 종류를 나누어 판매한다. 한국에서는 한 주당 여러 의결권을 행사하는 주식은 발행할 수 없지만 서유럽과 미국의 오래된 기업에서 왕왕 찾아볼 수 있다.

크뤼게르는 규제를 피하고 기업가치를 부풀리기 위해 부외거래off balance sheet financing를 활용했다. 그가 소유한 수많은 기업 간의 거래를 회계장부에 기재하지 않고 임의로 처분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자회사의 재무 상황을 모기업의 재무제표에 표기하지 않는 것이다. 그가 시작한 이 관례는 오늘날 제도로 자리잡았다. 모회사가 대상 기업의 주식을 인수할 때 그 수치가 50퍼센트 이하의 주식을 보유한 경우 투자로 인식해 자세한 재무 상황은 보고할 필요 없다는 것이다.

크뤼게르식의 회계 관리는 투명하지 않은 자금 흐름과 무분별한 투자를 불러 부실 경영을 낳는다. 기업의 가치에 대해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보니 한없이 부풀려지기도 한다. 2000년대 세계적 경제 위기를 초래한 엔론도 바로 이런 방식으로 회계 처리를 했다. 1백여 년 전 이미 이런 식으로 투기를 했다는 점에서, "사기계의 레오나르도" 라는 크뤼게르의 별명은 무색하지 않다.

부외거래를 통해 당국의 규제를 피할 수 있었던 크뤼게르는 순환출자를 통해 왕국을 만들어갔다. 크뤼게르는 성냥회사를 중심으로 자신이 투자한 기업에 연쇄적으로 출자해 계열사를 늘려갔다. 돈이 오가는 것이 아니라 장부에만 남는 유령 자금이다. 실물경제가 움직이지 않는 금융시장은 투자가 투자를 낳아 계속 돌아간다. 순환 출자의 함정도 거기에 있다. 하지만 이것이 가능한 것은 경기가 활황일 때다. 거품에 의존한 이 사슬이 어느 시점에 그 속도를 멈추면 도미노처럼 와르르 무너진다. 크뤼게르 왕국도 그랬다. 1929년 월가의 주가 대폭락과 경제공황으로 그의 투자 사이클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크뤼게르 왕국이 붕괴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에릭손이었다. 그는 1930년 그가 갖고 있던 에릭손의 주식을 미국의 전화통신기 제조 회사인 국제전화전신(ITT)에 팔았다. 이 회사는 에릭손의 경쟁사였다. 1932년 ITT는 크뤼게르가 주식을 팔 당시 고의로 에릭손의 자산 상태를 부풀려 놓은 것을 발견하고는 계약을 무효로 하고 판매 대금(1천1백만 달러)을 환급할 것을 요구했다. 물론 크뤼게르는 그럴 만한 자금이 없었다. 대공황 중이라 투자자를 모집하기도 어려웠다.

환급 요구가 있은 지 몇 주 후인 1932년 3월, 크뤼게르는 파리의 한 아파트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사인은 자살로 판명되었다. 크뤼게르의 죽음과 함께 그가 소유한 기업은 줄줄이 도산했다. 그가 주로 활동했던 스웨덴과 미국의 투자자들이 들고 있던 채권은 한 순간에 휴지가 되었다. '크뤼게르 크래시'라고 불리는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은 1933~34년 연달아 금융 규제를 위한 입법을 실행한다.

한편, 정부까지 나서서 크뤼게르에게 거액을 대출했던 스웨덴은 일대 혼란에 빠졌다. 나라 전체가 충격에 흔들리던 이때, 당시 사민당 대표였던 페르 알빈 한손은 강한 정부를 내세우며 자본의 규제와 사회 안전망 구축을 위한 복지 정책을 내놓아 정권을 잡는다. 그리고 이후 44년간 스웨덴에서는 사민당이 집권했다.

하수정 지역연구가 @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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