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 FOCUS] 포상금 사냥꾼 vs 공익 수호자..파파라치의 세계

서태욱,정희영 2016. 9. 30.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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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거장 영화감독 페데리코 펠리니가 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60년대 우울했던 사회상을 적나라하게 그린 '달콤한 인생(La dolce vita)'.

남자 주인공 마르첼로는 선정적 기사를 위해 온갖 거짓을 따라다닌다. 그와 2인1조로 움직이는 사진기사 '파파라초'는 유명인사가 보이는 곳이면 어디든 나타나 셔터를 눌러댄다. 가장 좋은 위치와 돈이 될 만한 사진을 위해 아귀다툼을 벌이는 사진기자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파파라치라는 용어의 원조 격이다. 파파라치가 대중 속으로 확 들어온 건 1997년 8월 31일. 고 다이애나 영국 왕세자빈이 파파라치를 따돌리다가 교통사고로 죽음을 맞은 바로 그날이다. 연예인을 쫓아다니며 각종 스캔들 사진을 찍어대는 파리 떼 같은 '파파라치' 이미지가 굳어진 것도 이때다.

한국에선 2001년 3월 교통위반 신고보상금제가 도입되면서 본격 상륙했다. 한국에도 유명 연예인 사생활을 캐내는 '파파라치 언론'이 생겨났지만 이보다는 일반인 범법 행위 장면을 찍거나 제보해 포상금을 노리는 소위 '공익신고자'라는 두 번째 얼굴이 더 낯익다.

지난달 28일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일명 김영란법)'의 시행으로 다시 한국의 파파라치는 물 만난 고기가 됐다. 일명 '란파라치'로 간판을 바꿔 달았을 뿐 하는 행위는 기존 파파라치와 별반 차이가 없다. 부정한 청탁을 하거나 금품을 수수한 법 적용 대상자의 행위를 적발해 신고하는 것이다. 매일경제는 서울 강남 모처의 S파파라치 학원의 특강에 참여해 그들의 세계를 넌지시 들여다봤다.

강남 S파파라치 학원의 강습 교재.
◆ 종류만 수십 개, 전문 영역 따라 '클래스' 있다

파파라치 학원 강사 문 모씨가 늦은 저녁 작은 강의실이 50여 명의 사람들로 꽉 찬 가운데 입을 열었다. "가난한 사람, 불쌍한 사람도 물불 안 가리고 신고하고, 사촌형·아버지도 돈만 준다면 신고하는 게 진짜 파파라치다." 파파라치들은 스스로를 '공익신고요원'이라는 고급스러운 말로 부르지만 실상은 영화 '달콤한 인생' 속 파파라초와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얘기다.

문씨는 "나는 한 지방 모텔에 현금을 내고 투숙한 뒤에 인근 다방에 커피도 시켰다"며 "배달 온 여자가 샤워를 할 때 모텔은 탈세로, 다방은 성매매업소로 신고해 돈을 벌었다"고 말했다. 모텔 탈세로 100만원, 성매매 신고로 200만원을 벌었고 모텔료와 커피값 등으로 25만원을 지출해 총 275만원을 득 봤다는 게 문씨 얘기다. 파파라치의 '먹잇감'과 '주 전공'은 그들의 이름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쓰레기 불법 투기 현장을 포착하는 쓰파라치, 차량 법규 위반을 포착하는 차파라치, 담배꽁초 버리는 현장을 노리는 담파라치 등 현재 위키피디아 사전에 등록된 종류만 족히 30여 개에 달할 정도다. 학원강사 문씨는 일명 모텔과 다방 성매매를 신고하는 '성파라치'에 속하는 셈이다.

하지만 자신을 '13년차 베테랑 파파라치'로 소개한 A씨(38)는 이런 성파라치 쓰파라치 차파라치 등은 파파라치계의 '3D 업종'이라고 말했다. A씨는 "이를테면 성형외과 인테리어업체 결혼식장 가구점 등을 방문해 상담을 받고 '현금으로 낼 테니 가격을 깎아달라'고 하면 일부 업체에서는 지인 명의의 차명계좌를 알려준다"며 "속칭 파파라치계의 하이 클래스들이 사용했던 세(稅)파라치가 돈을 버는 수법"이라고 설명했다.

◆ 장비 갖추려면 수백만 원, 더 중요한 건 '연기력'

파파라치 이론을 S학원 같은 곳에서 습득한 뒤 실전에 나설 때 당장 필요한 게 바로 장비다.

요즘 파파라치들은 007 영화의 비밀특수요원이 쓸 법한 장비를 총동원한다. 안경 시계 볼펜 자동차열쇠 단추 반지 USB 등 다양한 형태의 카메라와 녹음기는 타인의 시선을 끌지 않고 증거 장면을 포착할 수 있게 돼 있지만 조작이 어렵다. 이런 장비들은 수십만 원짜리부터 비싼 제품은 수백만 원을 호가한다. 용산전자상가에 따르면 녹음과 도청이 동시에 되고 리모컨 조작까지 가능한 수입산 '몰래 카메라'의 경우 수백만 원짜리 제품도 있다.

그러나 파파라치들이 말하는 소위 '건수'를 올리는 포인트는 '장비'가 아니다. 연기력이 생명이다.

학원강사 문씨는 "장비가 아무리 좋아도 '연기력'이 뒷받침돼야 한다"며 "예를 들어 불법 외국인결혼 중개업소에 가서 자신을 농촌 노총각이라며 여자를 소개해달라고 하고 '노모를 모셔야 한다'며 '눈물'을 주르륵 흘릴 수 있는 감정 연기는 필수"라고 강조했다.

◆ 파파라치 학원서 사기 당하기도

최대 관심사인 벌이는 얼마나 될까. 일단 성공만 하면 보수는 꽤 짭짤한 편이다. 단적으로 세파라치 계열의 경우 국세청은 탈세 예방 효과가 크다고 보고 차명계좌 한 건(1000만원 이상 추징 시)당 100만원까지 포상하고 있다.

파파라치 A씨는 "나를 위시해 능숙한 파파라치 고수 1%들은 월 300만원 이상 벌기도 한다"고 말했다. A씨에게 "나머지 99%는 어떤가"라고 물었다.

그는 "동네 편의점 알바보다 못한 수준이라고 보면 된다"고 답했다. A씨는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라. 몇 시간, 어떨 땐 한 건 올리기 위해 몇 날 며칠을 한자리에 죽치고 있어야 한다. 공치는 동안에도 밥 먹고 차에 기름 넣고 활동비를 써야 한다"고 말했다.

파파라치 중에선 결국 생활고에 못 이겨 '자살'을 선택한 경우도 있다고 했다. A씨는 "파파라치를 하겠다고 하다가 되레 '사기'를 당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강남의 한 파파라치 학원은 실습에 필요하다며 수강자에게 180만원짜리 몰래 카메라를 팔았다. 그러나 한 수강생이 용산전자상가에서 해당 상품의 가격을 문의한 결과 시가는 20만~30만원에 불과했다.

서울 강남 소재 S파파라치 사설 학원에서 수강생들이 김영란법 시행 첫날인 지난달 28일 강의를 듣고 있다. [정희영 기자]
◆ 민생범죄 신고가 대부분

신고포상금 제도가 공익을 해치는 대형 범죄사건에는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면서 민생에서 발생하는 사소한 범법 행위에 대한 신고만 늘려 오히려 일선 관공서 행정력 낭비를 심화시킨다는 지적도 있다. '바늘 도둑'만 잔뜩 잡고 정작 '소도둑'은 놓치게 된다는 것이다. 사회에 큰 해악을 끼치는 대형 부패범죄는 주로 공직사회나 기업 내부에서 벌어진다. 이런 범죄는 아무래도 내부 사정을 잘 아는 내부자가 용기를 내 신고하는 경우가 아니면 적발하기가 쉽지 않다.

제3자인 파파라치들이 이런 대형 부패범죄의 구체적인 정보와 가담한 인물들을 파악하고 증거를 모으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렇다 보니 파파라치들이 쉽게 범법 행위 증거를 찾을 수 있는 교통법규 위반이나 쓰레기·담배꽁초 투기 등 일상에서 발생하는 가벼운 범법 행위를 쫓을 수밖에 없고, 결국 신고포상금 제도는 이런 민생범죄 신고만 폭발적으로 늘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김영란법 시행 후 지난달 30일까지 사흘간 모두 84건의 신고가 경찰에 접수됐다. 서면 3건, 112전화 81건이었다. 그러나 대부분 "교수가 학생에게서 커피를 받았다"며 증거 없이 전화로만 신고를 하는 등 수사 요건을 갖추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나마 정식 신고 요건을 갖춰 수사 대상 1호가 된 신연희 서울 강남구청장은 신고자를 무고죄로 고소하겠다며 발끈하고 나섰다. 신 구청장이 지난달 28일 지역 경로당 회장 160명을 초청해 관광을 시켜주고 점심을 제공했다는 혐의다. 신 구청장은 "김영란법에서 예외 사유로 규정하고 있는 '공직자 등의 직무와 관련된 공식적인 행사' "라며 "내가 수사 1호가 아니라 고발자가 '김영란법 무고죄 처벌 1호'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서태욱 기자 / 정희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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