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집의 인문학 속으로] 세계에서 번안물이 가장 많은 나라

2014. 6. 27.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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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문화 아는 것이 진짜 정체성..문화적 자생력 빈곤 벗어나야

"순애, 김중배의 다이아몬드 반지가 그렇게 좋더냐?"

가난한 고학도 이수일과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여인 심순애의 사랑에 틈이 생긴 건 신흥 부자 김중배의 집요한 구애 때문이었다. 이제는 이 소설을 읽는 이도 별로 없지만 '김중배의 다이아몬드 반지'는 여전히 하나의 관용구처럼 쓰인다. 문학은 그런 힘을 지녔다. 바로 이야기의 힘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연말이면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눈물샘을 자극하며 옛 향수에 젖게 하는 신파극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게 '이수일과 심순애'였다. 하도 많이 듣고 봐서 우리 소설인 줄 아는 사람도 많고 번안 소설이란 걸 아는 이도 적지 않다. 연극이나 영화로도 많이 만들어진 이 작품의 원작은 조중환이 쓴 '장한몽(長恨夢)'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일본인 오자키 고요가 쓴 소설 '금색야차(金色夜叉)'를 한국을 배경으로 해 조선 사람을 등장시켜 바꾼 번안 소설이다.

'장한몽'은 조선이 일본에 강제로 나라를 빼앗긴 직후인 1913년 매일신보에 연재돼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다. 그 여세를 몰아 악극과 신파극 그리고 마침내 영화로 만들어져 인구에 회자되면서 등장인물이나 배경 등으로 미뤄 한국의 작품이라고 착각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왜 이 소설이 매일신보에 연재됐을까. 가난한 고학생 이수일, 그의 연인 심순애 그리고 경성 제일의 갑부 김중배의 삼각관계를 통해 당시의 황금만능주의 세태를 고발·비판하고(일본의 원작 소설 제목도 '황금을 좇는 돈 귀신'을 뜻한다) 사랑의 소중함을 주제로 했다는 통속적인 평가 너머에 있는 문제를 찾아볼 필요가 있다.

이 소설은 당시 유행하던 신소설을 일거에 몰아내고 베스트셀러가 됨으로써 통속적 애정 소설의 등장을 재촉했다. 즉 새로운 형태의 소설이 이 나라에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인데, 문제는 그게 다름 아닌 일본 소설을 번안했다는 점이다. 물론 작가가 자신의 작품인 것처럼 감추지 않고 분명히 원작을 밝혔다는 점과 원작을 그대로 옮긴 게 아니라 후반부는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거의 창작에 가까운 각색을 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시기에 유의해야 한다. 소설이 나온 시점은 바로 일본이 조선을 강제로 점령하고 그들의 식민지로 삼은 직후였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일본의 식민지 문화 정책과 상통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조중환은 다른 번안 소설들과 달리 일부를 자신이 개작해 우리 정서에 맞는 새로운 시도를 보였다. 즉 원작 소설이 물질적 가치에 의해 희생당하는 개인을 그려 내는데 중점을 뒀다면 '장한몽'은 물질로 상징되는 역경을 딛고 두 사람이 결합한다는 내용에서 전통적인 한국 소설의 구성 방식을 계승하고 있다. 이 점에선 분명 정당한 평가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그가 의도했건 아니건 간에 '장한몽'이 그리고 이후 이 작품을 따라 만든 연극이나 영화가 일본의 식민지 문화 정책에 이용됐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이수일과 심순애'가 외국 작품?

번안 소설은 외국어로 된 원작의 줄거리를 대체로 살리면서 자국(自國)의 언어와 전통적 유형으로 개작한 소설을 뜻한다. 이때 자국의 언어는 상정된 독자가 사용하는 쉬운 표현을 말하며 전통적 유형은 자국의 인명·지명·인정·풍속 등에 따르는 공통된 특질을 말한다. 사실 번안은 일반적으로 번역·모방·표절 등의 문학 행위와 혼돈하기 쉬운 개념이다. 이들 모두가 의도적이라는 점은 같지만 원작을 이용하는 방법, 개작자의 창조성에 따라 각각 분별되는 개념이다. 번안은 두 언어 사이의 이행(移行)을 뜻하는 번역보다 자유롭게 개작되며 기술 습득의 의도적 방법인 모방보다 훨씬 창조적이다. 더구나 남의 작품을 자작(自作)인 양 훔쳐오는 표절과는 근본적으로 구별된다.

번안 소설이 또다시 유행한 것은 개화기 때다. 중국 문학이 주류를 이루던 원작 소설은 일본과 서구의 문학으로 바뀌었다. 이런 현상은 문호를 개방하면서 외국의 문물이 물밀 듯이 유입되는 시기에 흔히 볼 수 있는 초기 현상이다. 개화기에 이러한 번안 소설이 쏟아졌던 것은 미처 개화의 문물을 자생시킬 토양이 미흡한 상황에서 어느 정도 불가피한 면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번안 소설은 외국 문학의 모방이나 자기 문화에 대한 열등감의 표출로 나타날 수도 있었고 심지어 제 문화의 전통을 스스로 단절시키는 부정적인 측면도 분명히 존재했다. 물론 최근에 비교문학적 관점에서 어느 정도 긍정적인 평가가 시도되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초기 수입 과정에서 외국 문학의 이질감을 어느 정도 덜어내고 친숙감을 가미함으로써 쉽게 읽고 이해하도록 만들었다는 점, 즉 문화 수용의 측면에서 긍정적인 면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또 궁극적으로는 자국 문학을 자극시켜 보다 진일보한 문학을 구축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한 측면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긍정적 효과보다 부정적인 측면이 더 강하다는 점에서 번안 문화는 지양해야 할 문제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비단 개화기 때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사람들이 즐겨 듣는 가요에도 상당히 많은 번안 가요들이 있다. 예를 들어 펄 시스터즈의 '첫사랑'은 달리다(Dalida)의 '몬 코르 에스트 푸(Mon Coeur est Fou)'를, 양희은이 불렀던 '아름다운 것들'은 조앤 바에즈(Joan Baez)의 '매리 해밀턴(Mary Hamilton)'을, 홍민의 '고별'은 미란다 마르티노(Miranda Martino)의 '스트링지티 알라 미아 마노(Stringiti Alla Mia Mano)'를 우리 식으로 바꿔 부른 대표적인 가요다.

정체성(正體性)을 정체(停滯)시키는 번안 문화

번안 가요 가운데 아예 우리 곡이라고 천연스럽게 여기는 곡들도 꽤 있는데, 대표적인 게 아마 '최 진사 댁 셋째 딸'일 것이다. 조영남과 이은하가 즐겨 불렀던 이 곡의 원래 제목은 '뱀(The Snake)'으로, R&B 가수인 올 윌슨(Al Wilson)과 자니 리버스(Johnny Rivers)가 불렀던 노래다. 심지어 이 곡을 '전통 가요'로 아는 사람들도 있는데, 실제로 예전 음반 재킷에 그렇게 표기한 것도 있었다. 게다가 이 곡은 한국 가요 특유의 신민요풍 분위기로, 마치 옛날이야기를 전해 주는 듯한 구성진 매력이 있었기에 더욱 그랬다.

'물레방아 인생' 역시 대표적인 조영남의 번안곡으로 CCR의 '프라우드 매리(Proud Mary)'가 원곡이다. 실제로 조영남은 꽤 많은 팝을 가요로 둔갑시킨 대표적인 가수로, 올리비아 뉴튼 존의 '뱅크스 오브 디 오하이오(Banks of the Ohio)'를 '내고향 충청도'로, '그린 그린 그래스 오브 홈(Green Green Grass of Home)'을 '고향의 푸른 잔디'로, 멕시코 민요인 '라 골론드리나(La Golondrina)'를 '제비'로 번안해 부르기도 했다.

요즘엔 더 이상 외국 곡을 번안해 우리 가요로 만드는 일은 거의 없다. 오히려 우리 가요가 널리 퍼져 외국에서 번안해 부르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한류와 케이팝의 성황은 더 이상 외국의 노래에서 얻어 와야 할 문화 자산 풍토가 아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자국 문화가 융성하면 외국 문화에 의존할 까닭이 자연스럽게 줄어든다는 점에서 우리 문화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설정하고 성장시키는 것은 필연이다. 주체성과 정체성은 불가분의 관계라는 점을 잊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문화에서 국수주의는 자칫 근친교배의 부작용을 낳기 쉽다. 끊임없이 외국의 문화와 접촉하고 교류하면서 자기 문화의 토양을 배양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요즘 청년들이 가요에만 함몰하는 것은 다소 아쉽다. 지나친 종속은 문제지만 과한 폐쇄성 또한 바람직하지 않다. 비록 우리 가요가 풍요롭고 전 세계로 확산되는 열풍을 낳고는 있지만 그것이 다른 문화에 대한 호기심까지 배제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타국의 문화를 자국의 문화로 오인하는 번안물의 범람도, 자국의 문화만 최고라는 그릇된 자부심도 바람직하지 않다. 그 적절한 조화가 자기 정체성을 강화하고 성장하는 문화로 나아갈 수 있다. 창작이 풍요로울 때 번역이나 번안도 정체성을 훼손하지 않고 풍부한 다양성을 생산할 수 있다.

문화의 주체성이 없으면 민족이나 국가의 정체성도 없다. 세계에서 번역물이 가장 많은 나라가 한국이라는 사실은 뛰어난 문화의 흡수력이기도 하겠지만 여전히 문화 종속성과 자생력의 빈곤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작가도 독자도 그런 점에서 각성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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